6/05/2009

거꾸로 붙인 그림


뭐 하느라 손톱이 이리 길도록 놔 두었는지….
노트북 키보드를 두드리다가 긴 손톱 끝으로 톡톡 대는 느낌이 별로이고, 흐릿한 머릿속도 정리하려면 먼저 손톱, 발톱을 깍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밀알여름학교가 이번 월요일에 시작되었습니다.
장애 학생들과 자원봉사자들이 만들어내는 여름학교입니다.

지난 토요일 자원봉사자들이 모여서 여름학교 준비기도모임을 하고 난 다음 교실에 이런저런 그림들을 붙이며 예배실? 큰 교실?-저는 아직도 그 곳을 뭐라고 부르는지 모르고 있네요-을 꾸몄습니다.
얼마가 지나고 있는데 같이 일하는 간사님이 큰일 났다며 저를 끌고 갑니다.
“저것 보세요. 어떻게 해요. 어떻게.”
뭘 보라는 것인지 뭐가 잘못되었다는 것인지 눈에 띄지 않습니다.
“뭐가요?”
“저거요. 저 그림.”
간사님은 길게 붙여 놓은 그림이라고 가르쳐주는데도 잘 모르겠습니다.
“이것 보세요. 아래, 위가 바꿨잖아요.”
그렇게 까지 설명을 해주니 그 그림을 거꾸로 붙여놓은 것이 보였습니다.
“그러네.”

자원봉사자들이 열심히 양면 테이프로 철썩 붙여놓은 것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 하며 몇 초가 흐르고 있는데 한 분이 거드십니다.
“그냥 두죠, 뭐. 그것도 나쁘지 않은데. 아래에서 바라보면 그렇게 보이지 않겠어요.”
그 말도 맞는 것 같고, 누군가 그 그림이 거꾸로 붙여진 것이라는 걸 발견하면 재미도 있을 것 같고, 거꾸로 붙여진 것을 저같이 모르고 지나갈 수도 있겠고, 무엇보다 그림을 떼어서 다시 붙이는 수고를 자원봉사자들에게 부탁할 염치가 없어서 그냥 두었습니다.

그러면서 많이 너그러워진 제 자신을 봅니다.
청년 시절 같았으면 아마 그 그림을 볼 때마다 마음이 편치 않았을 겁니다.
사람들과 충돌하는 것이 싫어서 그림을 그냥 그대로 두었을지는 몰라도 그 그림의 위와 아래가 반드시 상식적으로(?) 맞게 걸려야 한다고 생각했을 겁니다.
아무리 시간이 걸리고 돌아가야 해도 횡단보도가 아닌 곳으로 절대(?) 길을 건너지 않으며, 두꺼운 영어 사전에서 한 번 찾은 단어에는 같은 색의 형광펜으로 표시를 해두어야 하고, 책에 줄을 그어야 할 때는 자를 대고 반듯하게 그어야 하고 그랬습니다.
누구의 말처럼 이거 자폐 성향 같습니다.*^^*

대학 시절 항상 붙어다니던 단짝 친구는 그런 제가 답답하게 여겨지기도 했을 텐데 오랜 시간 저를 받아준걸 지금도 고맙게 생각합니다.
예술적인 성향이 많은 그 친구는 수줍은 듯 하면서도 자신을 연극이나 그림으로 표현하는 자유로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다른 기질을 갖고 있는 그 친구와 제가 오래 사귈 수 있었던 것은 서로에게서 어떤 영향을 주고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보고 싶다, 희야!


자, 이제 여름학교가 시작되고 놀이시간에 줄넘기를 하게 되었습니다.
굵고 긴 줄을 두 사람이 붙잡고 돌려주면 한 사람씩 혹은 여러 사람이 줄을 넘으면 됩니다.
뭘 하다가 들어가보니 고등학교 자원봉사자가 사뿐사뿐 줄을 넘고 있습니다.
저도 한번 뛰어보고 싶은 마음에 돌아가는 줄에 걸리지 않고 어렵게 줄 안으로 들어갔는데 두 번을 넘고는 제 발에 줄이 걸렸습니다.
어색하게 웃으며 학생들 옆에 가서 앉는데 무릎이 시큰합니다.
이런 이런 --;

학생들 한 사람 한 사람 이름을 부르면 나와서 줄을 넘어봅니다.
뛰어 넘는 모습이 저마다 다릅니다.
한 발을 들었다 놓으며 다른 한발을 살짝 들어 줄을 넘는 이도 있고, 텔레비전 광고에 나오는 것처럼 높이 뛰어 다리를 앞뒤로 엇갈려 벌리며 뛰는데도 줄에 걸리지 않고 잘 넘는 친구도 있고, 줄을 돌려도 꿈쩍도 하지 않다가 줄이 자기 발 아래에 턱 놓이면 그때서야 홀짝 넘는 아이도 있습니다.
어찌 그 모습들이 자기 멋대로인지 한참 웃었습니다.

줄넘기는 두 발을 모두어 뛰어야 잘 넘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습니다.
줄넘기에 대한 고정관념을 한 부분 깨는 시간이었습니다.

거꾸로 붙여진 그림이나 줄이 발 아래 멈추었을 때 넘는 줄넘기나 다 괜찮습니다.
사람이나 그 관계를 해(害)하는 것이 아니라면 틀린 것도 아니고 나쁜 것도 아닙니다.
-이거 맞는 말인가요???
자기가 경험한 것이나 그래서 굳어진 자신의 삶의 방식만 맞는다고 고집하지 않는다면 세상살이가 훨씬 부드럽고 넉넉해지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서로에게 배우고 사랑 나누며 산다면 꽤 풍성한 삶이 될 것입니다.

“아, 하나님, 내 속에 깨끗한 마음을 새로 지어 주시고 내 안에 정직한 새 영을 넣어 주십시오.”(시51:10, 표준새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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