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9/2008

호랑이 그리는 영어공부

오늘이 4일째.
그래도 마음이 점점 가벼워지고 있습니다.

월요일부터 영어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Community College-그러니까 한국으로 치면 단과대학인가요 아니면 전문대학?-의 평생교육(Continuing Education)원에서 하는 영어반에 들어갔습니다.
큰맘 먹고 일주일에 4일이나 가야하고 교육비도 어느 정도 내는 반에 다니고 있습니다.
9월 중순에 받은 레벨 테스트(Level Test)에 따라 회화반과 ESL(English as Second Language)반에 이틀씩 나가게 됩니다.

가을 학기(Fall Quarter)가 시작하는 월요일 아침.
조금 일찍 도착해서 교실에 가보았더니 두어 사람만 와 있었습니다.
어디에 앉을지 교실을 둘러보면서 보통 때는 눈에 띠지 않을만한 자리를 골랐을 텐데, ‘뒤로 물러서지 말자’ 하며 선생님 책상 바로 앞에 자리를 잡고 앉았습니다.

영어를 듣는 것과 말하는 것이 다 어눌하기에 회화를 많이 하는 반이 필요할 것 같았고 비슷한 수준의 사람들끼리 모이는 것이기에 그다지 부담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수업이 시작되고 자기 소개하는 시간에 보니 문법이 맞는지는 모르겠으나 자기 표현을 다들 잘하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저렇게까지 못하는데.’
거기서 기가 한번 죽었습니다.

선생님이 부르는 차례대로 자기 소개를 다들 마치고 저만 남게 되었습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나를 부르겠구나. 기죽지 말고 할 수 있는 만큼을 자신 있게 하자’ 마음먹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선생님 바로 코앞에 앉은 저는 아랑곳 하지 않고 수업을 계속 진행하는 것이었습니다.
‘우째 이런 일이...’
저는 다시 용기를 내어 “Excuse me" 하고 아직 내 소개를 하지 않았다고 상기시켜 주었습니다.

선생님은 아무렇지 않게 그랬냐며 얼굴 표정으로 해보라는 신호를 보냈습니다.
나름 목소리를 보통 때보다 크게 하여 서너 문장으로 제 소개를 해보았습니다.
소개를 마치자 선생님은 또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수업을 이어갔습니다.
‘젠장. 다른 사람한테는 이것 저것 물어보더니만...’
선생님이 의도적으로 그러지 않았다 해도 소심한 저는 여기서 기가 또 한번 죽었습니다.
그러면서 강윤이가 떠올랐습니다.
‘얼마나 힘들까!’

세 시간 동안의 공부를 마치고 모처럼 남편과 점심을 먹게 되었습니다.
공부하는 동안 있었던 일을 들려주자 남편은 어느 영어 강사가 한 말을 알려 주었습니다.
“사생결단, 체면불구, 초지일관!!!”
이곳에 오기 위해서 인천 공항에서 비행기를 탄 순간부터 되지 않는 영어 실력을 알기에 영어와 관련된 체면은 그때부터 없었으며, 영어 공부를 해야겠다는 마음도 그때부터 놓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생결단의 마음은 아니었나 봅니다.
‘적당히(?) 하다보면 되겠지’ 했던 것 같습니다.
제 자신을 위해서, 가족을 위해서 영어에 익숙해지지 않으면 살기 힘들거라는 사실을 마음에 새기고 죽기 살기로 해야 되려나 봅니다.

나이 사십 넘어 살면서 그래도 많이 담대해졌는지 되든 되지 않든 화요일에 몇 마디 더 하고, 수요일에는 시키지 않았는데도 일부러 손들고 말하고, 오늘은 미국 와서 아마 영어로 제일 많이 말한 것 같습니다.
같은 아시아인 베트남, 인도, 파키스탄 사람들과 남미, 유럽 사람들과도 몇 마디(!) 주고 받았습니다.
물론 수업 시간에 해야만 하는 활동이었어요.*^^*

지켜보아 주세요.
호랑이를 그리고자 하니 못 그려도 고양이는 되지 않을까요?

그리고 착한 척을 좀 하려고 합니다.
학교 가는 길에 아직 자가용이 없는 어떤 분을 제 차에 태워드리기로 했습니다.
이곳에 와서 여러 가지 도움을 참 많이 받았고 지금도 받고 있습니다.
다 되갚을 수는 없을 것 같고, 다른 누군가를 도울 수 있으면 마음의 빚을 조금 덜 수 있을까 싶어서요.
또 혼자 있기 즐겨하고 계획된 틀 안에 있는 것을 편안해 하면서 안으로 잦아드는 제 자신의 기질에 도전하는 시간이 될 것 같습니다.

*****
제 블로그에 글 올리는 것을 할 수만 있다면 수요일에 하고 싶었는데 목요일이나 금요일로 바꾸어야겠습니다.
그런다고 누가 뭐랄 것도 아니지만, 고맙게도 저희 가족을 기억하고 찾아주시는 분들에게 예의를 차리고 싶어서 알려드립니다.
살아가는 얘기를 일주일에 하나씩이라도 쓸 수 있으면 참 좋겠다는 바람을 가져봅니다.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공급하라”(벧후1: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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