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2/2025

자연은 계산하지 않는다





모든 것의 가치를 숫자로 측정하는 인간 사회에서 <자연은 계산하지 않는다> 제목은 삶의 흐름에서 잠시 멈추어 돌아보라고 채근하는 같았다. 책의 원제는 서비스베리(The Serviceberry). 서비스베리라는 이름도 처음 보았거니와 번역한 제목과 사뭇 달라 내용이 더욱 궁금해졌다. 그리고 저자 로빈 키머러에 대한 소개도 눈길을 끌었다. 제일 먼저 보이는 엄마라는 단어. 남성에 대비되는 개념이 아닌 관계를 나타내는 어휘다. 뒤이어 아메리카 선주민 출신 생태학자라고 소개한다.

키머러는 시티즌 포타와토미 네이션의 일원인데, 그들은 서비스베리를 베리 중에 최고로 취급한다. 키머러는 맛을 이렇게 알려준다. 블루베리님 맛이 나는 열매에 사과님의 묵직한 크기, 은은한 장미 , 오도독 씹히는 작은 아몬드 씨앗을 두루 갖춘 열매. 달콤하고 낭만적인 맛일 같다. 사실 키머러는 서비스베리의 맛을 알려주려는 것보다 서비스베리가 담고 있는 의미 때문에 책의 주인공으로 삼았다. 서비스베리는 포타와토미어로 보자크민이라고 부른다. 단어에는 선물이라는 뜻이 들어있다. 서비스베리는 대지에게서 받은 선물로, 그것을 먹고 나누는 새나 인간들은 서로 긴밀한 관계를 이룬다. 키머러는 이러한 선물 경제의 화폐는 관계라고 말한다.

선물 경제는 감사와 나눔을 통해 이루어진다. 저자의 이웃, 샌디는 글라디올러스 줄기 조림병, 호박, 붉은감자를 공짜라는 팻말과 함께 앞뜰 탁자에 내놓는다. 다른 앞뜰에서는 자신이 필요한 양보다 많이 갖고 있는 살림살이를 나눈다. 공짜 나눔을 하는 키머러의 이웃들은 여전히 시장 경제의 일원이지만 동시에 선물 경제에 참여하기도 한다. 키머러는 상호부조, 지역 선물 경제, 돈이 오가지 않는 품앗이, 협동 농장, P2P 대출 등은 풍요와 나눔의 기쁨을 토대로 부의 재분배 체계라고 생각한다.

키머러는 선물 경제가 영향력을 발휘하려면 나눔의 규모가 확장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시장 경제가 여전히 작동하지만 선물 경제도 발전시킬 있다고 강조한다. 경쟁보다 협력을, 쌓아두기보다 나누기를, 선형적이 아니라 순환적인 경제를 이루는 것이다. 대표적인 사례로 공공도서관이 있다. 키머러는 공공도서관의 개념과 실천을 숭배한다. 공공도서관은 도시 규모에서 실천되며 공동 소유 개념이 이뤄지는 곳이기 때문이다. 공원, 산책로, 그리고 문화 경관 등도 공공도서관처럼 소중한 공유 자원이다.

오래전부터 키머러는 기뻐하는 사람이 이긴다고 믿고 있다. 나의 이웃들도 텃밭이나 뜰에서 거둔 선물을 기쁨으로 나눈다. , 깻잎, 고추, 대추나 오디도 있다. 비록 작은 텃밭에서 거둔 열매지만 흥미롭게도 자연은 여럿이 나눌 만큼 넉넉하게 내어준다. 가게에서 배추나 무라도 필요 이상의 것은 기꺼이 나누곤 한다.

키머러의 서비스베리를 읽고 나니 나의 이웃 J 멀베리(오디) 얘기도 하고 싶다. 가지마다 오디가 주렁주렁 열리면 J 그것을 가라고 알려준다. 오디를 따는 일은 즐겁다. 통통하게 영근 오디를 먹으면 오디의 달콤한 즙이 입속에서 부드럽게 터진다. 알씩 먹기도 하고 여러 알을 모아 번에 털어 넣기도 한다. 입이 온통 자줏빛으로 물든다. 건강한 오디를 먹어 즐겁고 공짜라 즐겁다.

오디를 어느 정도 따다가 그만두려고 하면 J 바람이라도 불면 떨어지고 만다며 어서 따라고 고운 소리를 한다. 멀리서 새들이 우리를 지켜본다. 새들도 우리와 오디를 나누는데 불만이 없는 같다. 어차피 뽕나무의 높은 달린 오디는 그들의 몫이니까. J 나눠준 오디를 번에 먹을 없어서 일부를 얼려두었다. 멀리서 사는 둘째 아들에게도 얼린 오디를 나눠주었다.

아들은 멀베리(그는 멀베리라고 부르는 것이 편한가 보다) 받고 얼마 , 그의 친구들과 블루베리를 따러 농장에 갔다. 더웠을 텐데, 열린 하늘을 보며 땅을 딛고 열매를 거두는 기쁨을 찾아내다니 아들이 제법이다. 아들은 친구와 함께 블루베리와 멀베리로 잼을 만들었다. 나는 아들이 만든 베리베리 잼을 사진으로만 맛보아서 아쉬웠다. 하지만 아들이 그의 이웃들에게 잼을 선물하며 누렸을 기쁨을 생각하니 아쉬움보다 흐뭇함이 컸다. 풍요로운 삶의 비밀을 엿보는 같았다.


*이 글은 애틀랜타 중앙일보에도 실렸습니다.

8/14/2025

빛과 멜로디




싱그러운 나뭇잎이 초록빛을 맘껏 발산하는 더운 날이었다. 미미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미미는 나에게 병문안을 같이 가자고 제안했다. H 계단에서 넘어지는 바람에 허리를 다쳤다. H 수술을 받고 입원 중이었다.

미미는 동네 어르신들과 정답게 지낸다. 동네를 걷다가 앞에 앉아 계신 할머니를 만나면 그냥 지나치지 않고 안부를 묻는다. 할머니와의 대화가 어떤 내용일지 뻔히 알면서도 말이다. 같은 이야기를 여러 들어 익숙하지만, 미미는 처음 듣는 것처럼 기울인다. 미미에게는 적극적인 다정함이 있다. 옆집 할아버지의 기운이 부쩍 약해진 것을 느끼고는 정성껏 호박죽을 쑤어 가져다 드렸다. 그리고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잊지 않고 찾아 뵈었다. 다른 이웃집에 평소보다 많은 차가 주차된 , 풍경이 뜻하는 바를 알아채고는 이웃 할머니에게 서둘러 마지막 인사를 드렸다.

이번엔 미미의 다정함이 H 향했다. 미미는 H 지병과 수술한 부위를 고려하여 단백질이 많은 콩국물을 만들었다. 병실 분위기를 밝힐 오렌지 빛의 화분도 준비했다. 그런데 병원에 혼자 가기가 낯설다며 나에게 동행을 요청했다. 그렇지 않아도 역시 H 찾아가 보려는 마음이 있던 터라 미미의 제안을 선뜻 받았다. 나는 뒤뜰에서 아직 살이 오른 연두색 아삭이 고추 여남은 개를 급하게 거두었다. 아삭이 고추가 맵지 않으니 밍밍한 병원 식사를 H 입맛을 돋우면 좋겠다는 마음이었다.

H 수술을 받았는데도 밝은 얼굴로 우리를 맞이했다. 우리는 치료가 순조롭게 이루어지는 것을 하나님께 감사했다. 병실 창가에는 다채로운 꽃다발들이 여러 화병에 꽂혀 늘어서 있었다. 오랜 동안 H 지역사회 다민족 연대를 위해 헌신해 왔다. H 문병 사람들이 많았나 보다.

우리는 병실에서의 지루한 시간을 잠시나마 수다로 채웠다. 잡다한 얘기 가운데 H 작은 아들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아들은 사진과 영상을 다루는 작가이다. 그는 아프리카에서 현지인에게 그의 전문 분야를 가르치고 있다. 현지인들이 기술을 습득하여 자립할 있도록 돕기 위함이다. 엄마의 아들이다.

병문안 오기 읽기를 끝낸 소설 <빛과 멜로디> 문득 떠올랐다. 주인공 권은은 다큐멘터리 사진 작가이다. 나는 권은과 H 아들 이야기가 섞이면서 어느 이야기가 허구이고 실제인지 잠시 헷갈렸다. <빛과 멜로디> 2024 발간되었고, 지금도 전쟁 중인 시리아, 우크라이나, 그리고 가자 지구를 배경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권은은 어둡고 살기 가득한 전쟁터를 다니며 사진을 찍는다. 전쟁터에서 살아 있는 사람들을 드러내고 생명을 사진으로 보듬는다. 그에게 사진찍기는 연민 같은 감성팔이가 아니라 삶을 이어가도록 구체적인 희망을 주는 일이다. 이런 희망을 일찍이 열두 살의 권은은 경험했다. 부모가 떠나고 홀로 남아 어둡고 차가운 방에서 죽기를 바라던 때였다. 그런 권은에게 같은 승준은 필름 카메라를 건넨다. 권은은 카메라로 사진을 찍으면서 자신을 살게 하는 빛을 발견한다. 시간이 흘러 권은 자신도 사진 작가가 되어 사람을 살리는 가장 위대한 일을 하겠다고 먹는다.

<빛과 멜로디> 난민이 겪는 고난을 다시 한번 느끼게 해주었다. 책을 조해진 작가의 원작 <로기완을 보았다(2011)> 작년에 영화 로기완으로 공개되었다. 영화는 탈북민 로기완이 벨기에에서 난민 지위를 얻기 위해 사투를 벌이는 내용이다. 처절하고 안타까운 마음을 내려놓을 없는 영화라서 기억에 남아 있었다. 원작이 있는 영화인줄 <빛과 멜로디> 만나고 알게 되었다.

책은 차갑고 어두운 곳에 놓인 사람에게 공감하고 실질적인 필요를 채우도록 돕는 일이 얼마나 소중한지 기억하게 만든다. 권은에게는 카메라가 사랑이었고 빛이었다. 권은은  카메라로 사진을 찍으며 실의에 빠진 어느 난민을 살아가도록 빛으로 이끈다. 난민은 다른 난민과 빛을 나눈다. 오늘 나는 미미, H 그의 아들에게서 빛의 조각들을 본다. 빛의 조각들은 어우러져 멜로디가 되고 다시 사람들 속으로 퍼져 나간다.


*이 글은 애틀랜타 중앙일보에도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