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0/2024

깊고 긴 호흡


@구글 이미지


이웃집 결혼식 잔치에 가야 해서 머리를 깎기로 했다. 뉴올리언스에 있는 미용실 방문은 처음이었다. 주변 사람들에게서 얻은 정보에 의하면 한인 미용사가 있고, 한인들이 즐겨 찾는 베트남 미용사가 있다. 나는 한인 미용사에게 먼저 가보기로 했다.

한인 미용사, J 카톡으로 연락이 되었다. 나는 카톡에서 J 프로필 사진을 열었다. 굵은 물결 무늬의 머리카락과 윤이 나는 머릿결은 헤어 디자이너답다고 생각했다. 짧은 머리 커트할 약속 시간을 정하고 미용실의 이름도 알아 두었다.

오전 10 예약시간에서 15 전쯤 미용실에 도착했다. 월요일 아침이라 손님이 많지 않을 거라는 예상과는 달랐다. 이미 머리를 깎고 있는 사람들과 대기 중인 사람들. 보행보조기를 의지한 할머니와 목발을 짚은 할머니가 들어오셨다. 연세 많으신 할머니들과 푸석한 얼굴을 아저씨들이 애용하는 오래된 동네 미용실 느낌이 들었다.

넓은 공간에서 명의 미용사가 머리를 깎고 있었다. 카톡에서 J 보이지 않았다. 미용사들이 나를 흘깃흘깃 보더니 아무도 아는 척을 해주지 않아 대기석에 자리를 잡았다. 미용실 안에 한인은 나뿐이고, 분위기가 어색했지만 최대한 자연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마치 단골손님인 것처럼.

미용사가 자기 손님을 보내고는 눈짓으로 나의 주의를 끌더니 이름을 물었다. 나는 이름을 알려주고 그가 묻지도 않은 말도 덧붙였다. J에게 예약을 했다고 말이다. 나의 상황을 이해해 달라는 마음이었나 보다. 그는 아무 대꾸도 없이 컴퓨터만 두드리고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나는 J 아직 출근을 했거나 미용실 어딘가에서 다른 일을 하고 있을 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예약 시간이 살짝 지났다. 내가 미용실에 있다는 것을 카톡으로 알리는 것이 좋을 같았다. 안녕하세요. 미용실에 까지 글자를 입력하다가 그만 두었다. 급한 일도 없는데 만남에서 인내심 없는 사람으로 보이고 싶지 않았다. 셀폰 화면을 끄고 대신에 깊고 호흡을 반복했다.

마음이 차분해지자 미용사들 아시안으로 보이는 사람이 혹시 J인가, 의아했다. 나는 J 카톡 프로필 사진을 다시 펼쳤다. 사진 , 미용사 얼굴 , 찬찬히 살펴보아도 J 아니었다. 미용사의 분위기로 보아 베트남 사람 같았다.

1975 베트남 전쟁이 끝나고 남베트남이 패망하면서 거기에 살던 사람들이 미국으로도 이주했다. 뉴올리언스는 베트남과 기후가 비슷하고 바다와 인접한 곳이라 그들이 정착할 만한 곳이 되었단다. 그들 커뮤니티가 점점 커져서 지역 사회에서 그들을 찾아보는 것이 어렵지 않다. 뉴올리언스에 베트남인이 많다는 이유가 아시안 미용사를 그들 사람으로 짐작하게 했다.

아시안 미용사도 그의 손님을 보내고는 컴퓨터 화면을 바라보며 이름을 불렀다. 나는 그에게 인사를 건네고 J 기다리고 있다고 다시 덧붙였다. 그는 담담한 얼굴로 자기가 J라고 말했다. 미용실에 J 둘인가? 아주 잠깐 헷갈렸다. 그래서 나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혹시 한국인이세요? 그는 , 라고 대답했다. 우리는 그때까지 영어로 말하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목소리에 공손함을 담아 한국말로 인사를 건넸다. J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내가 앉을 자리로 안내했다. 앞에 있는 커다란 거울로 J 얼굴을 다시 살펴보았다. 사진에서 얼굴이 찾아지지 않았다.

, 카톡 사진과 달라 보여요 말이 처음 만난 사람에게 실례인 알면서도 물어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실수의 정도를 줄이기 위해 호흡을 길게 하며 말끝을 흐렸다. 나의 질문이 재미있다는 J 곡선이 부드러워졌다. 사진 십몇 사진이라 그래요. 그리고 남편이 베트남 사람이라 한국말을 많이 잊었어요. 묻지도 않은 말을 덧붙이는 J 나와 비슷했다.

머리 깎는 내내 우리는 자신을 소개했다. 그는 오래전 뉴올리언스로 이민와서 처음 다녔던 교회가 지금 내가 다니는 교회라고 알려주었다. 이야기를 나눌수록 우리의 연결점이 많아졌다. J 영어 억양은 그대로라도 한국말로 점점 길게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이 글은 애틀랜타 중앙일보에도 실렸습니다.

8/31/2024

멀어도 가까운





모처럼 아들이 사는 조지아 동쪽으로 길을 나섰다. 루이지애나 주에서 시작하여 다섯 주를 거쳐가는 여정이었다.

우리가 지나던 고속도로는 온통 베인 풀의 신선함으로 가득했다. 고속도로 갓길과 중앙 분리대 잔디 위에는 잔디 깎는 기계를 장착한 트랙터가 엄청 많았다. 어느 곳에는 여덟 대가 대씩 나란히 움직이며 풀을 깎았다

어디는 대가, 어디는 대에 개의 잔디 깎는 기계를 매달고 작업하고 있었다. 풀은 깎여 나가면서도 이렇게까지 싱그러운 향기를 뿜어내다니, 가는 나로서는 풀과 그것을 다듬는 일을 하는 분들에게 고마울 뿐이었다.

아들이 사는 도시에 가까워지자 해는 서서히 저물어가고 있었다. 주변은 온통 달큰한 꿀색으로 물들었다. 마치 하루 일과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여유로운 기운이 가득한 듯했다.

드디어 고속도로를 벗어났고 아들 집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 출구 주변에서 흔히 있는 주유소가 나타났다. 친숙한 풍경이 우리를 맞이하는 같아 그것 마저도 반가웠다.

날씨는 화창하고 도로는 막힘이 없어 힘들이지 않고 아들네 도착했다. 자동차로 10 시간 걸리는 거리가 전혀 지루하지 않았다.

아들이 집밖으로 나와 포옹으로 아빠와 , 그리고 엄마를 맞이했다.  아들 얼굴을 보니 그냥 좋았다. 밤이 깊어져 자리에 들었는데, 낯선 자리가 주는 선잠을 피할 없었다. 하지만 정도 피로감은 아들을 만난 기쁨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아들네 가면서 뭔가 선물을 하고 싶어 아들에게 물었다. 아들은 실내 식물을 달라고 대답했다. 의외였다.

아들이 우리 집에서 이사 나갈 내가 키우던 식물을 준다고 했더니 질색하였다. 자신이 그것을 가져가면 죽일 것이 뻔하다며 극구 사양했다

나는 집안에 초록빛 생명이 있으면 보기에도 좋고 공기 정화도 해주어서 좋다는 이유로 아들을 설득했다. 아들은 못이기는 척했고, 나는 지지플랜트 화분 하나를 아들에게 안겨주는데 성공했다.

아들은 꼼꼼하고 책임감이 있어서 식물을 맡겨도 걱정은 되었다. 자신이 식물을 보살피는데 서툴다는 것을 아니까 나름 키워보려고 이렇게 저렇게 애쓸 터이다

아니나 다를까 아들은 화분을 세심하게 관찰하며 관리하고 있었다. 새싹이 나와서 줄기가 커다랗게 뻗었는데 어떻게 세워줘야 하느냐, 화분 공간이 빽빽한데 괜찮냐며 식물 소식을 가끔 전해주었다.

아들네 도착한 다음 , 실내 식물을 사러 농원에 갔다. 아들은 나에게서 받은 지지플랜트를 분갈이하고 싶다고 했다. 다른 화분에 뿌리를 나누어 심고 싶은데, 엄마가 도와줬으면 좋겠다고 부탁했다

나는 그래 그러자, 담백하게 대답했다. 아들의 변화를 기특하게 여기는 나의 마음은 실내 식물과 화분 갈이에 필요한 물품을 선물하는 것으로 표현했다.

나는 실내 식물을 보기에 좋은 중간 크기로 사려고 했더니 아들은 작은 것을 선택했다. 작은 것부터 키워보고 싶다며. 초보자가 키우기 쉬운 피스 릴리와 골든 포토스를 골라주었다.

하나 화분, 아프리칸 바이올렛도 선물했다. 이것은 전에 지인에게서 받은 것을 번식시킨 것이다

지인에게 받았을 때는 손톱만한 이파리가 있었는데 어느 순간이 되니까 잎이 진초록이 되면서 넓어졌다. 그리고 보라색과 흰색이 섞인 꽃이 한참 동안 피어 기쁨을 주었다. 나는 화사한 기쁨을 아들에게도 맛보게 하고 싶었다.

우리는 분갈이를 뒤뜰에 그늘 지는 시간을 골라 시작했다. 겨우 화분 몇개를 다루는 일이고 단순한 과정의 분갈이인데도 아들은 일에 관심있게 참여하였다. 자신의 화분이라 그런지 시켜도 투덜대지 않고 자발적으로 움직였다. 녀석의 변화에 흐뭇한 웃음이 새어 나왔다.

아들과 함께 흙을 만지며 식물을 다루는 놀이가 아주 즐거웠다. 아들도 식물을 돌보는 내내 즐겁기를 바란다. 실내 식물을 키우는 일이 비록 작은 규모일지라도 지구 환경을 해치는 이산화탄소를 줄이는 실천임을 기억했으면 좋겠다.

우리는 가볍게 헤어지는 인사를 나누었다. 아들은 아침 일찍 출근해야 했고 남은 식구들은 뒷정리를 하고 길을 떠나기로 했다. 다음번에는 아들이 우리 집에 방문하기로 약속했다.


*이 글은 애틀랜타 중앙일보에도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