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1/2024

소망은 힘이 세다




주름치마처럼 잡힌 잔주름으로 모양을 유리 접시를 받아 들었다. 그것은 크고 묵직했다. 접시에는 하얀 거품을 세제가 묻어 있어서 손에서 미끄러지지 않게 힘을 주어 잡았다. 수돗물이 흐르고 있었고 손은 빠르게 접시의 거품을 걷어내고 싶어했다. ! 검지 손가락에서 베인 느낌이 들었다. 접시 둘레 어딘가 깨진 모양이다. 조심스럽게 접시의 가장자리를 더듬어 보았지만 불편하게 느껴지는 곳은 없었다. 남은 설거지를 마치고 손에서 물을 거두자 손가락 마디 접힌 곳에 빠알간 액체가 올라왔다. 유리 접시의 각진 모서리가 살을 스치고 지나갔나 보다.

추수감사절을 앞두고 한국에 계신 어머니한테서 남편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그는 옆에 있는 나를 전혀 의식하지 않고 통화를 이어갔다. 나에게 바꿔줄 전화는 아닌 같았다. 남편에게서 눈길을 거두고 나니 뒤뜰에 있는 식물들이 보였다. 기온이 내려가기 전에 그것들을 실내로 들여놓을 좋은 때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뒤뜰에 나서자 바람의 흐름에 따라 나뭇잎끼리 부대끼는 소리만 들렸다.

화분 안에 눈에 띄지 않는 벌레가 살고 있을 몰라 유기농 해충제인 님오일을 식물 주변에 뿌려두었다. 벌레에게 다른 곳으로 이사할 시간을 주기 위해서다. 물에 씻어 놓은 화분이 햇빛에 마를 시간도 필요했다. 내게도 잠시 틈이 생긴 어떻게 알았는지 마침 남편이 나를 불렀다. 그를 바라보자 집안으로 들어와 보란다. 보기 드문 남편의 특별한 요구였다. 남편은 나의 엄마에게 전화를 드려보라고 말했다. 그는 어머니한테서 엄마에게 위암이 발견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고 전해주었다. 엄마는 멀리 사는 나에게 굳이 걱정스러운 소식을 전하고 싶지 않았고, 평소에 자주 통화하는 어머니한테만 알리셨다고 남편은 설명했다.

마음을 차분하게 정돈하고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엄마의 목소리는 여전히 낭랑했다. 엄마, 아프다며?에둘러 말하고 싶지 않았다. 너네 어머니한테 들었구나? 하나도 아파. 엄마는 건강검진을 정기적으로 받다가 지난 5년간은 건너뛰었는데 기간에 암이 생겼나 보다고 추측했다. 지금은 전혀 아프지 않고 수술할 병원도 정했다고 알려주었다. 엄마는 무엇보다 아무 걱정 말라고 말한 집도의의 소견을 강조했다.

아픈 사람은 엄마인데, 입안이 쓴맛으로 가득 차더니 속까지 메스꺼웠다. 가족 중에 누가 아프거나 좋은 일이 생기면 이런 증상이 나타나곤 했다. 며칠 전부터는 접시에 손이 베이고, 없는 불안으로 일상에 집중하기가 어려웠다. 그러더니 엄마에게 수술 심장 검사가 필요하고 수술이 넘게 연기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게다가 한국의 12.3 내란 뉴스까지. 타국에 사는 나는 오랜만에 밤잠을 설치며 한국으로부터 좋은 소식이 들리길 간절히 바랐다.

엄마 생각을 많이 하다가 어릴 , 인천 변두리에서 때의 기억이 떠올랐다. 우리 근처엔 소나무가 빽빽한 야트막한 동산들이 있었다. 비가 흠뻑 내린 다음날, 엄마는 버섯을 따러 가자고 했다. 동산들 중에는 어느 대기업이 소유한 산도 있었다. 엄마는 그곳에서 버섯을 엄청 찾아냈다.

우리는 신이 나서 숲속을 헤매며 버섯을 찾아다녔다. 그런데 갑자기 정전이 것처럼 주변이 어두워졌다. 곧이어 비가 억수같이 쏟아졌다. 나무들이 빗줄기를 조금 가려주긴 했지만 옷이 순식간에 젖어버렸다. 우리는 오던 길로 몸을 돌이켰다. 하지만 길이 보이지 않았다.

엄마는 걸음을 떼지 못하고 가만히 서서 비를 맞았다. 그러다 엄마는 무릎을 꿇고 기도하기 시작했다. 낯선 상황이었지만 나는 엄마가 있어서 아무 두려움이 없었다. 엄마는 기도를 마치고 눈을 떴다. 잠시 , 여기가 길이네하며 엄마가 웃었다. 엄마가 무릎 꿇었던 자리가 바로 위였다. 그제야 눈에도 길이 선명하게 보였다.

이야기가 떠오른 이유는 엄마가 신을 신뢰하고 긍정적인 소망을 놓지 않기 때문이다. 소망은 단순한 바람이 아니라 걸음을 내딛게 하고 결국 새로운 길을 발견하게 하는 힘이 있다. 이번에도 엄마의 암이 깨끗이 제거되어 여생이 평안하고 함박웃음이 가득하길 기대한다. 더불어 나의 모국, 한국에도 평화가 속히 이루어지길 바란다.


*이 글은 애틀랜타 중앙일보에도 실렸습니다.

11/22/2024

이렇게라도




할머니는 손녀인 나를 무척 귀하게 여기시고 예뻐하셨다. 할머니에게 딸이 없어서 더욱 그러셨던 같다. 나는 어렸을 적부터 엄마보다 할머니 품에 많이 안겨 있었다. 할머니의 절대적인 사랑을 받으면서 집에서 살다가 결혼을 하면서 할머니와 헤어지게 되었다. 나는 너무 철이 없어서 나의 결혼에만 집중했고 할머니의 마음이 어떨지 헤아려 기억이 없다. 할머니는 내가 결혼하고 두어 달이 지나 갑자기 돌아가셨다. 11월에. 할머니가 돌아가신 어느덧 30년이 훌쩍 넘었다.

할머니의 삶을 깊이 들여다보거나 할머니의 감정을 헤아려 생각을 못한 나의 부족함이 내내 아쉽고 죄송하다. 내가 사춘기였다고 변명을 해보지만 할머니에게 퉁명을 떨었던 것도 너무 미안하다. 결혼하면서는 할머니에게 양장점에서 옷을 맞춰드리고 자가용을 타고 세상 유람 다니자고 했는데 공수표가 되고 말았다.

할머니는 입바른 소리를 하셨다. 나를 비롯하여 다른 사람들이 예의 없게 굴면 참지 않으셨다. 그럴 할머니는 표정도 근엄하게 바뀌고 목소리도 무거워졌다. 일상 예절부터 걷는 모습까지 내가 얌전하길 바라셨다. 나한테는 그렇다 쳐도, 일면식도 없는 사람에게도 할머니는 예의를 가르치셨다. 나는 할머니가 그러지 마셨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할머니도 그립다.

내가 자주 만나는 이웃들은 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의 연세와 비슷한 분들이 많다. 나도 나이가 들어가니 이웃들이 자매 많은 집의 큰언니 같은 느낌이다. 동시에 나의 할머니 같기도 하다. 이웃들과 사귀면서 나의 할머니를 섬기지 못한 죄송함을 만회할 기회가 종종 생긴다.

나의 이웃, J 70세가 넘어 처음으로 대장내시경을 하게 되었다. 수면 내시경으로 진행될 예정이었음으로 마취가 필요했고 보호자가 반드시 동행해야 했다. J 나에게 보호자가 되어 있는 물었다. 나는 기꺼이 그러겠다고 대답했다. 대장내시경을 차례 받은 나는 보호자가 주는 안정감을 경험한 바가 있었다. 병원 검사실이 주는 긴장감 속에서 안전하게 마취에서 깨어 보호자를 만날 번째 안도감을 느낀다. 그리고 내시경을 진행한 의사로부터 검사 결과가 좋다는 소견을 보호자와 함께 들을 번째 안도감을 느낀다. J 모르겠지만 나는 이렇게라도 나의 할머니에게 못다한 섬김을 갚고 싶었다.

번은 이웃, A 이곳저곳 다닐 일이 생겼다. 70 후반의 A 체구가 아주 작고 머리카락이 하얗게 세어 아주 연약해 보였다. 그가 짐을 들고 오는 모습이 보였다. 그의 손에 들린 어떤 물건도 그의 힘에 부칠 같았다. 나는 짐을 받아 들기 위해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A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괜찮아요, 라고 말하며 손을 물리쳤다. 조금 어색했지만 티를 내지 않고 얼른 자동차 문을 열어 드렸다. 그랬더니 A 우아하게 자동차에 올라타서 가만히 앉아 있었다. 자동차 닫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나는 소리 나지 않게 문을 닫았고, 자동차가 서고 때마다 여닫기를 반복했다. 나의 할머니라면 당연히 이렇게 모셨을 테니 이렇게라도

연세 많으신 이웃들에게 할머니로부터 받은 사랑의 빚을 갚는 것은 좋은데, 한국에 계신 부모님에게는 다른 아쉬움이 쌓이고 있다. 멀리 떨어져 살면서 자녀의 도리를 하지 못하니 죄송할 뿐이다. 부모님 얼굴을 지도 6년이 넘었다.

어쩌다 영상으로 통화하며 부모님 모습을 뵈면 , 하고 놀라기도 한다. 부모님 얼굴에 나타난 세월의 흔적이 너무 낯설어 마음이 먹먹해진다. 지난 추석에는 어머니께서 명절이 되면 우리 가족의 빈자리 때문에 허전하다는 마음을 내비치셨다. 다음 명절에는 가까이서 봤으면 좋겠다는 바람과 함께

어머니는 이런 말씀을 하시지 않는 분이다. 어머니는 자녀가 멀리 떨어져 사는 이유를 누구보다 이해하시면서도 점점 커져가는 그리움을 숨길 없으셨나 보다. 다음 명절에는 식구들이 둘러 앉아 음식을 만들며 그동안 지내온 얘기를 수런수런 나누고픈 어머니의 소박한 소원을 들어드리고 싶다. 이렇게라도 해서 부모님에게 그리움으로 남았던 시간들을 따뜻한 기억으로 채워 드려야겠다.

*이 글은 애틀랜타 중앙일보에도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