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2/2024

이렇게라도




할머니는 손녀인 나를 무척 귀하게 여기시고 예뻐하셨다. 할머니에게 딸이 없어서 더욱 그러셨던 같다. 나는 어렸을 적부터 엄마보다 할머니 품에 많이 안겨 있었다. 할머니의 절대적인 사랑을 받으면서 집에서 살다가 결혼을 하면서 할머니와 헤어지게 되었다. 나는 너무 철이 없어서 나의 결혼에만 집중했고 할머니의 마음이 어떨지 헤아려 기억이 없다. 할머니는 내가 결혼하고 두어 달이 지나 갑자기 돌아가셨다. 11월에. 할머니가 돌아가신 어느덧 30년이 훌쩍 넘었다.

할머니의 삶을 깊이 들여다보거나 할머니의 감정을 헤아려 생각을 못한 나의 부족함이 내내 아쉽고 죄송하다. 내가 사춘기였다고 변명을 해보지만 할머니에게 퉁명을 떨었던 것도 너무 미안하다. 결혼하면서는 할머니에게 양장점에서 옷을 맞춰드리고 자가용을 타고 세상 유람 다니자고 했는데 공수표가 되고 말았다.

할머니는 입바른 소리를 하셨다. 나를 비롯하여 다른 사람들이 예의 없게 굴면 참지 않으셨다. 그럴 할머니는 표정도 근엄하게 바뀌고 목소리도 무거워졌다. 일상 예절부터 걷는 모습까지 내가 얌전하길 바라셨다. 나한테는 그렇다 쳐도, 일면식도 없는 사람에게도 할머니는 예의를 가르치셨다. 나는 할머니가 그러지 마셨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할머니도 그립다.

내가 자주 만나는 이웃들은 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의 연세와 비슷한 분들이 많다. 나도 나이가 들어가니 이웃들이 자매 많은 집의 큰언니 같은 느낌이다. 동시에 나의 할머니 같기도 하다. 이웃들과 사귀면서 나의 할머니를 섬기지 못한 죄송함을 만회할 기회가 종종 생긴다.

나의 이웃, J 70세가 넘어 처음으로 대장내시경을 하게 되었다. 수면 내시경으로 진행될 예정이었음으로 마취가 필요했고 보호자가 반드시 동행해야 했다. J 나에게 보호자가 되어 있는 물었다. 나는 기꺼이 그러겠다고 대답했다. 대장내시경을 차례 받은 나는 보호자가 주는 안정감을 경험한 바가 있었다. 병원 검사실이 주는 긴장감 속에서 안전하게 마취에서 깨어 보호자를 만날 번째 안도감을 느낀다. 그리고 내시경을 진행한 의사로부터 검사 결과가 좋다는 소견을 보호자와 함께 들을 번째 안도감을 느낀다. J 모르겠지만 나는 이렇게라도 나의 할머니에게 못다한 섬김을 갚고 싶었다.

번은 이웃, A 이곳저곳 다닐 일이 생겼다. 70 후반의 A 체구가 아주 작고 머리카락이 하얗게 세어 아주 연약해 보였다. 그가 짐을 들고 오는 모습이 보였다. 그의 손에 들린 어떤 물건도 그의 힘에 부칠 같았다. 나는 짐을 받아 들기 위해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A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괜찮아요, 라고 말하며 손을 물리쳤다. 조금 어색했지만 티를 내지 않고 얼른 자동차 문을 열어 드렸다. 그랬더니 A 우아하게 자동차에 올라타서 가만히 앉아 있었다. 자동차 닫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나는 소리 나지 않게 문을 닫았고, 자동차가 서고 때마다 여닫기를 반복했다. 나의 할머니라면 당연히 이렇게 모셨을 테니 이렇게라도

연세 많으신 이웃들에게 할머니로부터 받은 사랑의 빚을 갚는 것은 좋은데, 한국에 계신 부모님에게는 다른 아쉬움이 쌓이고 있다. 멀리 떨어져 살면서 자녀의 도리를 하지 못하니 죄송할 뿐이다. 부모님 얼굴을 지도 6년이 넘었다.

어쩌다 영상으로 통화하며 부모님 모습을 뵈면 , 하고 놀라기도 한다. 부모님 얼굴에 나타난 세월의 흔적이 너무 낯설어 마음이 먹먹해진다. 지난 추석에는 어머니께서 명절이 되면 우리 가족의 빈자리 때문에 허전하다는 마음을 내비치셨다. 다음 명절에는 가까이서 봤으면 좋겠다는 바람과 함께

어머니는 이런 말씀을 하시지 않는 분이다. 어머니는 자녀가 멀리 떨어져 사는 이유를 누구보다 이해하시면서도 점점 커져가는 그리움을 숨길 없으셨나 보다. 다음 명절에는 식구들이 둘러 앉아 음식을 만들며 그동안 지내온 얘기를 수런수런 나누고픈 어머니의 소박한 소원을 들어드리고 싶다. 이렇게라도 해서 부모님에게 그리움으로 남았던 시간들을 따뜻한 기억으로 채워 드려야겠다.

*이 글은 애틀랜타 중앙일보에도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