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는 아이슬란드의 수도 레이캬비크에서 한 시간 거리에 있는 블루라군을 찾아가는 길이었다. 들판에 유난히 까만 아스팔트를 울퉁불퉁 아무렇게나 부어놓은 것 같은 곳을 지나게 되었다. 길가에 주황색 깃발이 달린 띠를 둘러놓은 것을 보고 아스팔트같이 보이는 것이 용암임을 눈치챘다. 아이슬란드로 여행가기 한 달 전쯤에 화산이 터져서 블루라군 근처까지 용암이 흘렀다는 뉴스가 생각났기 때문이다.
용암은 식어서 뾰족뾰족한 검은색 덩어리로 굳어 있었다. 붉은 용암이 흘러 가로등을 쓰러뜨리고 도로를 덮쳤을 것을 상상하니 무시무시했다. 차가운 용암 덩어리를 들어보니 생각보다 가벼웠지만 얼마 전까지 뜨겁게 끓어올랐을 에너지가 전해지는 듯하여 두려움이 묵직하게 찾아왔다. 한편, 막 굳은 용암 덩어리의 까만색이 참 깨끗해 보였다. 세상에 새로 태어난 것들에서는 이런 느낌이 드나 싶었다.
역사적인 현장을 벗어나자 곧 블루라군이 나왔다. 블루라군 근처에는 오래된 화산암이 쌓여 있었다. 이 화산암들은 길가에서 본 용암과는 다르게 동글동글하면서 검은색도 흐려져 있었다. 검은색 길을 벗어나자 우윳빛이 섞인 파란색 온천수가 환하게 우리를 반겼다. 와! 탄성이 저절로 나왔다. 부드러운 파란색 온천은 여행자의 걸음을 멈추게 하고 피로를 풀어주기에 충분했다.
아이슬란드에는 다양한 파란색이 참 많다. 맑고 깨끗한 하늘빛은 물론이고 원색에 가까운 파란 지붕이 정겹다. 빙하와 얼음동굴에는 신비한 파란색으로 가득하다. 유럽에서 제일 큰 빙하인 바트나요쿨에 있는 얼음동굴 투어는 먼 과거로부터 미래까지 그려보는 체험이다.
얼음동굴 안에는 오래전 쌓인 눈이 저마다 다른 패턴을 보여준다. 물결무늬, 요철무늬, 별 표면 같은 무늬 등. 빛이 얼음에 닿는 정도에 따라 검은색, 투명한 파란색, 하늘색, 남보라색 등으로 보인다. 환상적인 얼음동굴 투어를 마치고 빙하를 내려오는데 한 지인이 자신의 감상을 들려주었다. “슬프네요, 빙하가 녹고 있어서. 지구의 멸망을 보는 것 같아요.”
얼음동굴을 투어하기 위해 모이는 장소에는 빙하가 녹아 호수를 이룬 요쿨살론이 있다. 그리고 길 건너에는 다이아몬드 비치가 있어서 검은 해변에서 빙하 조각들이 반짝이는 아름다운 모습을 볼 수 있다. 빙하가 녹아서 보게 되는 아름다움이라니 아이러니하다.
골든써클로 알려진 싱벨리어 국립공원, 굴포스와 게이시르에서도 대자연이 살아 숨 쉬는 모습을 목격한다. 싱벨리어 국립공원에 있는 협곡은 오래전 북아메리카판과 유라시아판이 갈라진 흔적이다. 보이지도 느껴지지도 않지만, 대륙판이 지금도 조금씩 벌어지고 있는 어마어마한 에너지가 있는 곳이다. 그런 영향으로 지면 아래에는 용암이 꿈틀거리고 화산 활동도 활발하다. 굴포스에 있는 폭포수의 우렁찬 흐름도, 게이시르의 뜨거운 온도와 하늘 높이 치솟는 간헐천도 경이롭다.
우리는 아이슬란드의 남쪽을 주로 여행하면서 넓디넓은 들판을 덮고 있는 이끼를 보았다. 화산암을 덮은 이끼는 아주 조금씩 자라서 그 지역의 나이를 가늠하는 지표다. 모스그린(moss green)이라고 부르는 황록색이 딱 아이슬란드 이끼 색깔이다. 이 온화한 색의 이끼는 거칠고 뾰족한 화산암을 덮어 몽글몽글 귀엽게 바꾸어 놓았다. 이끼는 돌과 돌을 연결하여 덮혀 있는데 그 모습이 마치 누워있는 생명체처럼 보인다. 그것들이 언젠가 부스스 일어나서 걸어 다닐 것만 같다.
3월의 아이슬란드는 화산의 검은색과 만년설의 하얀색 대비가 분명했다. 그 자태가 위엄있어 보이면서 동시에 여행자를 긴장하게 했다. 반면 깨끗한 빙하가 만든 다채로운 파란색과 화산암을 뒤덮은 황록색 이끼는 신비로웠다. 압도적이면서도 차분한 아이슬란드는 생명이 충만하고 참 아름답다. 집에 돌아온 나는 또 다른 아름다운 여행을 꿈꾸기 시작했다.
*이 글은 애틀랜타 중앙일보에도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