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8/2023

예감




식물에게 물 주려고 그 집에 들렀다. 부부가 사는 그 집에는 일 년 전부터 키우는 식물이 한 그루 있다. 그 아내에게 부탁을 받고 물 주러 간 첫날, 집주인이 잘 보살폈다는 걸 금방 알아챘다. 커다란 잎사귀는 연둣빛이 선명하고 길게 자라 늘어진 줄기는 튼실했다.

그들이 집을 비운 지 두어 달이 지났다. 그 남편이 매우 아파서 치료하러 다른 도시로 갔기 때문이다. 그는 병을 극복하려고 애쓰는 중이고 그의 아내는 남편을 가엾이 여기며 정성을 다해 간호 중이다. 아내는 자기가 키우던 식물도 내내 살아있길 바랐다. 아내는 식물에게 일주일에 한 번쯤은 물을 주어야 한다며 나에게 조심스럽게 부탁했다. 그게 뭐 그리 어려운 일이라고. 그 부부가 건강하게 몽고메리로 돌아오길 바랄 뿐이다.

 물을 화분에 골고루 뿌려주고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 길. 블라운트 문화 공원에 있는 자동차 도로로 가면 시간은 비슷하게 걸려도 가로질러 가는 느낌이고 탁 트인 공원을 잠시나마 느껴볼 수 있어 그 길을 선택했다. 사실 얼마 전에 알게 된 셰익스피어 정원에 다시 가 보고 싶어서 그런 거였다. 그런데 자동차가 먼저 가닿은 곳은 몽고메리 미술관 옆에 있는 조각 정원이었다. 여길 오려고 했던 것은 아닌데 이쪽으로 들어서 버렸다. 

조각 정원은 어떻게 꾸며 놓았을까 전부터 궁금했었는데 내친김에 둘러보았다. 미국 남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나무들과 곳곳에 있는 조형물들을 감상하며 천천히 걸어도 15분 정도면 충분한 아담한 정원이다. 햇빛에 고스란히 노출된 정원은 한적하면서도 경쾌한 느낌이었다. 나는 마음에 둔 다른 정원으로 얼른 가고파서 서둘러 나왔다. 그곳 조형물 가운데 4점은 그곳에 늘 있는 작품이고 나머지 5점은 현재 전시하다가 바뀔 작품이라는 것을 나중에 웹사이트에서 알게 되었다. 아주 가끔 온라인으로 확인해서 작품이 바뀌면 다시 들려볼 만하겠다.

원래 가려고 했던 셰익스피어 정원은 다른 날도 얼마든지 가볼 수 있으련만 첫인상이 이국적이어서 그냥 지나치고 싶지 않았다. 얼마 전 동네 친구들의 제안으로 이 정원에서 그들을 만났다. 앨라배마 셰익스피어 페스티벌 극장 옆에 이런 정원이 있는 줄 몰랐다. 운동 삼아 공원에서 걸을 때 극장 앞을 지나가면서도 보지 못했었다. 정원에 처음 들어서는데 마치 비밀의 정원 혹은 비밀의 원형 극장에 온 것 같았다. 목적을 가지고 만나는 친구들이라 정원을 둘러볼 짬 없이 모임만 하고 헤어지는 바람에 그 정원에 미련이 남았다. 무슨 꽃이 피었나 살펴보고 나무 아래 벤치에도 앉아보고 싶었다.

찬찬히 둘러보니 키가 큰 나무들이 줄지어 사방을 둘러싸고 있어서 더 비밀스러운 공간처럼 보인다. 짚으로 지붕을 인 쉘터는 잘 가꾼 꽃밭이 둘러싸고 있다. 꽃밭에는 허니서클, 메리골드, 노란 나리꽃, 이름 모르는 보라색 작은 꽃, 로즈메리가 자연스럽게 어울려 있다. 나무 그늘을 좋아하는 양치류와 헬레보루스도 눈에 많이 띄었다. 팬데믹 초기, 집 밖을 나가기 두려울 때 유튜브에서 정원 가꾸는 영상을 어찌나 보았던지 새로 알게 된 꽃을 실제 정원에서 발견하고 이름을 기억해내면 기분이 좋아지곤 한다. 정원 한쪽 출입구 앞에 있는 화장실마저도 초가지붕을 얹은 시골 부잣집 창고 같았다. 일보러 들어가서 너무 침침하여 어리둥절하다가, 이게 영국식 화장실인가 생각하다가, 너무 의미 부여를 하는 머릿속에서 웃음이 터져버렸다.

 동네 친구들은 이 정원을 이미 사용하고 있었고 나만 뒤늦게 알게 된 곳이니 호들갑스럽게 얘기할 거리도 아니다. 그렇다 해도 나는 가끔 이 정원에 올 것 같은 예감이 든다. 2016년 보스턴 여행을 하고 내려오면서 필라델피아 독립기념관을 관람한 적이 있다. 그 주변 건물들이 역사적인 이야기를 가지고 있기에 한참을 걸어서 다녀보았는데, 건물들 사이로 여러 형태의 자그만 정원(공원)들이 참 많아서 흥미로웠다. 몽고메리 셰익스피어 정원이 필라델피아에서 보았던 정원의 분위기와 겹치면서 어디 멀리 여행 온 기분이 들었던 걸까. 

되돌아 나오는데 벤치에 앉아 혼자서 뭔가를 먹는 사람들이 보였다. 점심시간인가 보다.


*이 글은 애틀랜타 중앙일보에도 실렸습니다.

5/08/2023

이상한 나라에서 온 손님




뉴욕주에서 온 손님을 남편은 몽고메리 공항에서 맞이하여 우리집으로 데리고 왔다. 나는 저녁을 준비하고 있는데 그들은 집 안으로 들어서며 먼저 안녕하세요, 인사를 건넸다. 얼굴을 마주 보기도 전에 들려오는 그들의 목소리에는 반가움과 기대가 담겨 있는 듯했다. 나는 그들에게서 느끼는 반가움과 기대에 조금 더 보태 어서 오세요, 달려가며 답하였다. 남편은 그 부부를 평화 콘퍼런스가 열린 뉴욕에서 만난 적이 있으나 나는 그들과 첫 만남이었다. 그들은 소박하면서도 당차 보였다.

우리 두 부부는 참으로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대체로 남편은 묻고 그들은 답하고 나는 들었다. 그들은 남편의 질문에 막힘없이 이야기를 풀어냈다. 그 이야기는 내 주변에서 볼 수 없는 이상한 내용이었으나 그들이 그렇게 살고 있으니 진솔하게 들렸다. 

그들이 사는 마을은 서로를 돌보는 모습이 다양했다. 식사 준비하는 사람, 옷 만드는 사람, 빨래하고 개어 주기까지 하는 사람이 따로따로 있다는 얘기가 많고 많은 이야깃거리 중에 흥미롭게 남았다. 한편, 그들이 동네 얘기를 하는 동안 이쯤에선 불평이나 험담이 나올 수도 있겠다는 나의 지레짐작은 모두 틀렸다. 그럴 것 같은 순간에 그들은 말을 아꼈다. 오히려 내가 못 참고 험담 바가지를 깨트리곤 했다. 그들과 얘기를 나눌수록 내 영혼의 바닥이 드러나는 걸 어쩌면 좋단 말인가.

남편은 그들에게 민권운동의 성지인 몽고메리를 보여주길 원했다. 하루는 아프리카계-미국인 투표권을 얻기 위해 도보 투쟁을 시작한 셀마에 다녀왔다. 손님들은 이 행진에 참여한 사람들이 몽고메리로 가기 위해 건너야만 했던 에드먼드 페터스 다리를 걸어보길 원했다. 그들에게 사진을 찍어주겠다고 하니 결연한 표정으로 주먹을 불끈 쥐는 몸짓을 보여주었다.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도록 가로막는 공권력에 맞서야 했지만 끝내 투표권을 획득한 역사 속 사람들의 심정을 표현한 것 같았다. 셀마로 가는 길가에 있는 현대 자동차 공장의 겉모습이나마 보여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오후에는 로사 파크스 박물관에 갔다. 로사 파크스는 그가 앉은 자리를 백인에게 내주라는 버스 운전사의 요구에 당당하게 저항했고, 그의 용기있는 행동이 미국 민권운동의 시작이었음을 소개했다. 민권운동의 어머니로 불리는 로사 파크스 여사는 덱스터 애비뉴 침례교회에서 첫 목회를 하던 마틴 루터 킹 주니어 목사와 만나 몽고메리 버스 보이콧을 벌인다. 이러한 역사를 간직한 그 교회에 들러서는 아쉽게도 교회 겉모습만 사진으로 남겼다. 코비드19 이후로 교회 안을 둘러 보기 위해서는 예약이 필요한데 그것까지는 챙기지 못했다.

또 다른 하루는 레거시 박물관과 국립 평화와 정의를 위한 기념관을 찬찬히 둘러보았다. 아프리카계-미국인이 겪은 노예의 삶에서 시작하여 오늘날까지 사라지지 않은 린치(Lynch)의 역사에 그들은 내내 마음 아파했다. 미국에 살면서 꼭 알아야 할 역사를 보게 해주어 고맙다는 인사를 거듭했다. 그리고 그들이 사는 마을 사람들에게 꼭 몽고메리를 방문하도록 권유해야겠단다. 사회적 약자에게 벌어지는 불의한 일을 안타까워하는 그들의 진심이 무뎌진 내 마음에도 깊숙이 다가왔다.

남편은 2000년 끄트머리에 책「브루더호프의 아이들」을 서점에서 발견했다. 책에 담긴 유익한 교육 철학은 우리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출판사에 대한 정보를 찾아보다가 쉴터교회에서 운영하는 걸 알았고, 그곳에 예배드리러 가기도 했었다. 

그로부터 20년을 훌쩍 넘긴 지난해, 이번에도 남편이 「이상한 나라 하나님 나라-브루더호프 이야기」책을 찾아내고는 저자 박성훈 님에게 연락했나 보다. 연락한 이유를 나누던 중 「브루더호프의 아이들」은 그가 출판한 책이라는 사실을 알고 깜짝 놀랐다. 그때는 한국에서 서로를 모른체 만났을 수도 있겠다. 지금은 미국에서 한 가정은 브루더호프 안에, 한 가정은 브루더호프를 바라보며 이루어진 이 만남이 참 재미있다.

가족도 친구도 아닌 사람들과 3일을 같이 보냈으면 피곤하고 불편할 법도 한데 나는 그냥 여전하다. 이상한 일이다. 말이 아닌 삶으로 들려준 그들의 이야기는 첫인상처럼 소박하고 당찼다. 자유롭고 평화로운 그들의 삶을 담은 다큐멘터리 1부를 본 것처럼 그다음 이야기가 자못 궁금하다. 언젠가는 그들이 사는 이상한 나라를 방문하고 싶은 마음이 한가득하다.

*이 글은 애틀랜타 중앙일보에도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