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 찍어 놓은 고마운 사진입니다.>
엊그제 한인 장애우들과 관련된 사람들을 위한 Transition Workshop이 있었습니다.
과도기(Transition)에 대해 한, 두 사람이 관심을 드러내기 시작하면서 이 세미나가 준비되기 시작했습니다.
두 달이 넘게 세미나에 담길 내용, 강사 섭외, 날짜와 장소가 정해지고, 신문, 교회, 관련단체를 통해 홍보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지난 수요일 세미나가 진행되었습니다.
이 일에 몇 마디 말을 거들면서 처음부터 참여하게 되었는데, 잔잔하게 남는 그 무엇이 있습니다.
먼저는, 일을 진행하는 방법이 새로웠습니다.
일에 대한 자신의 생각과 새로운 정보는 거의 주로 이메일로 주고 받으며 진행되었습니다.
모두가 바쁘게 일을 하는 분들이라 시간을 내어 만나는 것이 쉽지 않으리라, 생각했습니다.
처음에는 조금 느슨하고 일이 진행되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일을 진행하는 사람들이 한 번도 모두 같이 만난 적이 없지만-다자간 전화 통화는 한 번 했습니다-, 오히려 자기가 할 일을 스스로 알아서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자기가 할 수 있는 만큼 적극적이고 자발적으로 말이죠.
새로운 경험이었습니다.
두 번째는, 한인 장애우들에게 관심 갖고 있는 이곳(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단체들이 여럿 있구나, 였습니다.
실제적인 관계를 맺는 것은 또 다른 문제일 테지만, 이번과 같은 세미나를 통해 또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게 되었으니 말입니다.
세 번째는, 장애를 가진 제 아이의 교육과 졸업 이후의 삶을 대하는 저의 태도를 또 한번 돌아보는 시간이었습니다.
이번 세미나의 주제는 전단지에 소개된 것처럼, 고등학교 재학중인 장애아의 졸업 후 서비스, 학업, 취업에 대한 궁금증을 풀며, 과도기 서비스(Transition Service)를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지, 과도기 서비스에서 학부모와 학교, 관련 기관의 역할에 대해 배워보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비슷한 세미나에 서너 번 참여했을 때처럼 주제와는 조금 거리가 있지만, 부모가 적극적이어야 한다는 결론이 남았습니다.
어떻게, 무엇에 대해 적극적이 될 것인가는 세미나를 참여할 때마다 조금씩 그 내용이 구체화 되는 것 같습니다.
아이의 강점이 무엇인지,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졸업 후에는 직업 훈련을 받을 것인지, 계속 교육을 받을 것인지, 어디에 살 것인지…를 정하고, 학교에 있는 동안이라면 IEP(개별교육프로그램)를 통해 교육 목표를 교사와 함께 세우며, IEP 대로 교육이 되는지 점검하고, 방과 후 활동을 지원하고, 장애우 관련 단체들이 가지고 있는 자원들을 활용하는 것….
이미 알고 있다고 여기는 내용일지라도 아는 것과 그렇게 사는 것은 다른 모습이겠지요.
또 언어와 문화가 다른 이민자로서 미국 사회 속으로 적극적으로 들어간다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어리바리한 짧은 미국 생활 속에서도 경험하지만, 그래도 할 수 있는 것을 최선을 다해 감당하며 지금 내 앞에 놓여 있는 길을 성실하게 가족과 교회와 지역사회와 함께 가야겠지요.
이것이 말처럼 쉽지 않아도, 그래도 모든 만남과 배움을 징검다리 삼아 천천히 정성껏, 쉬어가며, 겸손하게, 희망을 품고….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립보서4:4-7)
4/30/2010
4/23/2010
4/16/2010
아이가 커가고 덩달아 나도 커가고
<학교에서 가져온 LION OF THE WEEK와 상품으로 받은 학교 티셔츠입니다.> |
둘째 아들이 LION OF THE WEEK가 되어 카페테리아 앞 복도 쪽에 붙어 있던 것이라면서 코팅된 종이 하나를 내밀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봄방학 하기 전에 자기 사진이 학교 어디에 걸려 있다고 말하긴 했었습니다.
아이가 말하는 내용이 무엇인지 감이 잡히지도 않았고 해서 “왜?”라고만 물었습니다.
“이번 주 라이온으로 뽑힌 거래.”
아이의 대답이 시원치 않으면 더 물어보든가 했어야 하는데 저도, 아이도 거기서 더 이상 이야기를 이어가지 못했습니다.
봄방학이 끝나고 선생님께서 학교에 붙어 있던 것을 떼어주셨다며 가져온 것을 제 앞에 놔두고 갑니다.
이런저런 내용이 담긴 종이 한 장인데, 항목 하나하나를 읽을 때마다 생각도 여러 가지입니다.
무엇보다도 아이의 담임 선생님이 추천해주신 이유를 읽으면서는 기분이 점점 좋아졌습니다.
지속적으로 다른 친구들을 도와주었고 새로운 도전들이 있을 때 긍정적인 자세를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아, 정말 감사했습니다.
지난 학년까지만 해도 이곳 학교 분위기를 익히는 과정에서 작은 벌칙을 받기도 하고, 같은 반 어떤 친구가 하지도 않은 일을 했다고 선생님께 이르는 바람에 한국 학생 몇 명이 곤란을 겪기도 했었습니다.
투덜대며 그런 이야기를 집에 와서 할 때도 생각해보니 적극적으로 힘을 실어주지 못했습니다.
아이의 이야기만 듣고 판단해서 다른 사람을 쉽게 비난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 때문이기도 했고, 조금 더 지켜보자는 마음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들은 것은 있어서 사실이 어떠하든 아이의 속상한 마음이라도 알아주려고 했던 것 같기는 합니다.
그런데 이번에 갖고 온 LION OF THE WEEK에 써 있듯이 자기 자신을 돌볼 뿐 아니라 다른 친구들도 도와주었다니 대견한 마음이 마구 들면서, 아이가 하는 이야기에 더 마음을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
아이도 자라고 더불어 엄마도 커 갑니다.
오늘은 LION OF THE WEEK와 함께 상품으로 받은 학교 티셔츠인데, 가방 한 구석에 처박혀 있던 것을 오늘에서야 봤다며 내놓습니다.
털털한 것인지….
한편으로는 대단한 상 받은 것처럼 잘난 척하지 않는 모습인 것 같다고 제 마음대로 생각해봅니다.
요즘은 전에 사용하지 않던 말들도 툭툭 합니다.
“전에는 몰랐는데 엄마 쌩얼 하고 화장한 모습하고 차이가 많이 나.”
“엄마가 젊지는 않지!”
“그렇게 먹고 싶으면 금식하지 말고, 먹고 기도하면 되잖아. 그냥 먹어.”
이런 말을 들으면 엄마한테 관심갖고 있다는 것이 느껴지면서 웃기기도 하고, 함부로 행동하거나 말하면 안 되겠구나, 마음을 다잡는 기회도 됩니다.
커가는 아이들을 위해 제가 할 수 있는 많지 않은 것 가운데 하나, 아침마다 아이들 스쿨버스가 떠나는 뒷모습을 바라보며 읊조리는 기도를 더욱 놓치지 말아야 될 것 같습니다.
“Mr. B(스쿨버스 기사님)과 거기에 타고 있는 아이들, Mrs. E(담임 선생님)과 같은 반 친구들과 즐겁고 행복한 하루가 되게 해 주세요.
서로의 관계 맺음을 통해서 앞으로 사회생활에 필요한 관계들을 배워가게 해 주세요.
학교에서 배우는 모든 지식이 잘 이해되게 하시고 잘 쌓여서 아이들 삶에 유익하게 하시고, 무엇보다 하나님을 알아가는 지혜의 통로로 사용하게 해 주세요.
언제나 어디서나 하나님 자녀로서, 하나님 사랑을 드러내는 자녀들이 되게 해 주세요.”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 /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 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간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고린도후서 4:16-18)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 /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 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간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고린도후서 4:16-18)
4/09/2010
견신례에 참여했어요
<매주 인터넷으로 제 블로그를 방문하시는 인천 할머니에게 너희들 모습 보여드리자고 꼬셔서 찍은 사진이어요.>
부활주일을 시작으로, 아이들 봄 방학이었던 이 한 주간도 참 빠르게 지나갔습니다.
부활주일 예배 때 견신례(Confirmation)와 입교식이 있었습니다.
견신례는 부모의 신앙에 따라 유아 세례를 받은 사람이 7학년 이상(우리 교회 기준)이 되면, 다시 신앙 교육을 받고(8주),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 성령에 대해 자신의 믿음을 고백하는 예식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어서 연합감리교회의 회원이 되는 입교식도 함께 참여하게 됩니다.
견신례를 받을 때 부모와 멘토가 함께 강단에 올라가 아이들 어깨에 함께 손을 얹고 기도를 합니다.
지난해에 견신례를 지켜보았을 때, 새롭게 신앙을 다짐하는 이를 위해 그렇게 여럿이 함께 기도해주는 모습이 참 든든해 보여서 좋았습니다.
올해는 모두 20 여명의 학생들이 견신례에 참여했는데 그 가운데 강산이와 강윤이도 있었습니다.
깨끗하고 단정한 옷차림을 한 학생들이 다들 얼마나 예쁘고 멋져 보이던지요.
저희 아이들이 그 가운데 있어서 그랬는지 사랑스러운 느낌이 폴폴 풍겨 나왔습니다.
강단에 올라가 아이들을 축복하며 담임 목사님의 기도를 받았습니다.
부활주일 하루 전에 미리 연습한 대로 순서에 따라 예식에 참여하고 자리로 돌아와 앉았습니다.
자리에 앉아 다른 학생들과 부모님들이 예식에 참여하고 강단을 내려오는 얼굴 표정을 살피게 되었습니다.
조금은 긴장된 표정들입니다.
나도 그랬겠지. 이렇게 아이들이 자라서 자신의 신앙을 키워가는 의미 있는 시간을 좀 더 기쁜 얼굴로 맞이 했으면 좋았을 걸, 했습니다.
예배가 끝나고 교우들 몇 분이 축하한다는 인사를 나누어 주셨습니다.
미국 생활에 한 단계 한 단계 적응해가는 저희 아이들에게 관심 갖고 격려해주시고 축하해주셔서 감사했습니다.
그 분들의 세심하고 넉넉한 마음 씀씀이는 배워야할 것 같습니다.
집으로 돌아오기 위해 교회 주차장을 가로 질러 가다 보니, 나무에 돋은 새순이 마치 믿음의 새로운 여정을 시작하는 우리 아이들을 닮은 것 같아 보입니다.
**미국을 방문하신 인천 할머니가 강윤이를 위해 적어주신 성경 말씀입니다.
“훈계를 좋아하는 자는 지식을 좋아하거니와 징계를 싫어하는 자는 짐승과 같으니라”(잠언12:1)
“지혜로운 아들은 아비의 훈계를 들으나 거만한 자는 꾸지람을 즐겨 듣지 아니하느니라”(잠언13:1)
“훈계를 저버리는 자에게는 궁핍과 수욕이 이르거니와 경계를 받는 자는 존영을 받느니라”(잠언13:18)
부활주일을 시작으로, 아이들 봄 방학이었던 이 한 주간도 참 빠르게 지나갔습니다.
부활주일 예배 때 견신례(Confirmation)와 입교식이 있었습니다.
견신례는 부모의 신앙에 따라 유아 세례를 받은 사람이 7학년 이상(우리 교회 기준)이 되면, 다시 신앙 교육을 받고(8주),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 성령에 대해 자신의 믿음을 고백하는 예식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어서 연합감리교회의 회원이 되는 입교식도 함께 참여하게 됩니다.
견신례를 받을 때 부모와 멘토가 함께 강단에 올라가 아이들 어깨에 함께 손을 얹고 기도를 합니다.
지난해에 견신례를 지켜보았을 때, 새롭게 신앙을 다짐하는 이를 위해 그렇게 여럿이 함께 기도해주는 모습이 참 든든해 보여서 좋았습니다.
올해는 모두 20 여명의 학생들이 견신례에 참여했는데 그 가운데 강산이와 강윤이도 있었습니다.
깨끗하고 단정한 옷차림을 한 학생들이 다들 얼마나 예쁘고 멋져 보이던지요.
저희 아이들이 그 가운데 있어서 그랬는지 사랑스러운 느낌이 폴폴 풍겨 나왔습니다.
강단에 올라가 아이들을 축복하며 담임 목사님의 기도를 받았습니다.
부활주일 하루 전에 미리 연습한 대로 순서에 따라 예식에 참여하고 자리로 돌아와 앉았습니다.
자리에 앉아 다른 학생들과 부모님들이 예식에 참여하고 강단을 내려오는 얼굴 표정을 살피게 되었습니다.
조금은 긴장된 표정들입니다.
나도 그랬겠지. 이렇게 아이들이 자라서 자신의 신앙을 키워가는 의미 있는 시간을 좀 더 기쁜 얼굴로 맞이 했으면 좋았을 걸, 했습니다.
예배가 끝나고 교우들 몇 분이 축하한다는 인사를 나누어 주셨습니다.
미국 생활에 한 단계 한 단계 적응해가는 저희 아이들에게 관심 갖고 격려해주시고 축하해주셔서 감사했습니다.
그 분들의 세심하고 넉넉한 마음 씀씀이는 배워야할 것 같습니다.
집으로 돌아오기 위해 교회 주차장을 가로 질러 가다 보니, 나무에 돋은 새순이 마치 믿음의 새로운 여정을 시작하는 우리 아이들을 닮은 것 같아 보입니다.
**미국을 방문하신 인천 할머니가 강윤이를 위해 적어주신 성경 말씀입니다.
“훈계를 좋아하는 자는 지식을 좋아하거니와 징계를 싫어하는 자는 짐승과 같으니라”(잠언12:1)
“지혜로운 아들은 아비의 훈계를 들으나 거만한 자는 꾸지람을 즐겨 듣지 아니하느니라”(잠언13:1)
“훈계를 저버리는 자에게는 궁핍과 수욕이 이르거니와 경계를 받는 자는 존영을 받느니라”(잠언13:18)
4/02/2010
부활의 계절에 보고 싶은 분
<제가 첫돌 때 찍은 가족 사진입니다.>
제가 초등학교에 들어가 1학년 가을 학기가 되었을 때 아빠는 새로운 직장을 다니게 되셨습니다.
그때까지 우리 가족은 인천 시내에 살다가 아빠의 새 직장이 있는 인천 변두리로 이사를 가게 되었습니다.
우리 가족은 할머니와 함께 살고 있었는데, 이사 갈 집에 수리가 필요한 상태라서 할머니는 집이 고쳐진 다음에 이사 오시기로 했습니다.
어렴풋이 기억하기로는 할머니와 떨어져 살았던 시간이 그리 길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 기간 동안 할머니에 대해서 애틋한 감정을 가지게 되었고, 아주 긴 시간 떨어져 산 것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어느 날, 엄마가 할머니 집에 가보자고 하셨습니다.
시내에 계신 할머니가 어떻게 지내시는지 살펴보기도 하고, 엄마는 이런 저런 일을 보신 것 같습니다.
저는 할머니에게 갖다 드린다며, 두꺼운 종이 조각에다가 이불 꿰매는 하얀 면실과 검은 색 재봉실을 둘둘 얼마큼 감아서 챙겨두었습니다.
할머니에게 왜 실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는지 모르겠습니다. ^^
할머니 집에 도착해서 보니, 그 때 50대 중반이신 할머니는 일터에서 아직 돌아오시지 않으셨지만 집에는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엄마는 무슨 일인가 보러 나가시고 저 혼자 할머니 방에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번뜩 할머니가 일 갔다가 오시면 저녁 드실 밥이 있나 찾아보았습니다.
여기서 잠깐!
기억이 나질 않는 부분인데(나중에 엄마한테 여쭈어 봐야겠습니다), 엄마가 해 놓은 밥인지, 할머니가 우리가 올 줄 모르고 아침에 한 그릇 남겨놓고 일 가신 것인지, 뚜껑이 있는 밥그릇에 담긴 밥 한 그릇을 발견했습니다.
문득 할머니가 오셨을 때 따뜻한 밥을 드시면 더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아랫목 이불 밑으로 밥그릇을 가져다 놓았는데 이것 가지고는 밥이 따뜻해질 것 같지가 않아 밥그릇을 들고 부엌으로 다시 갔습니다.
연탄불 위에 올려진 솥에서 따끈하게 데워진 물을 퍼서 밥에 붓고, 뚜껑을 다시 덮어, 딱 밥 한 그릇 들어가게 만든 스티로폼 통에 밥그릇을 넣어 아랫목에 펴져 있는 이불로 잘 감싸두었습니다.
예닐곱 살짜리가 그런 생각을 해낸 것이 스스로 꽤 괜찮다고 여기며, 할머니께 들을 칭찬을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시간이 얼마가 지났는지 할머니가 집에 돌아오셨고 저를 보고 무척 기분 좋아하셨던 것 같습니다.
곧이어 할머니 드시라고 꽁꽁 묻어둔 스티로폼 통에서 밥그릇을 꺼내 내어드렸습니다.
밥그릇의 뚜껑을 여신 할머니는 물에 불어 있는 밥을 보시고, 밥이 왜 이러냐고 물으셨습니다.
저 또한 밥에 물(게다가 따뜻한 물)을 부어 놓으면 밥이 불어 오를지 몰랐기에 당황스러웠지만 이만저만 해서 할머니를 위해 따뜻한 물을 부어 놓았노라 말씀 드렸습니다.
할머니는 제 설명을 듣고 흐뭇해 하시면서, 퉁퉁 불은 밥을 마다하지 않으시고 드셨습니다.
게다가 한참 동안 친척들이나 친구 분들을 만나시면 이 어이 없는 밥 사건과 엉성하게 감긴 실 꾸러미에 대해 두고두고 애기하셨습니다.
아마도 어린 것이 할머니를 생각한답시고 한 짓이라 사랑스레 여기셨던 것 같습니다.
그 보다 더 어렸던, 둘째 동생이 태어나서 얼마 지나지 않았으니까 제가 서너 살쯤 되었을 때입니다.
할머니는 딸이지만 첫 손주인 저를 많이 위해주셨는데, 아빠가 장남이시고 남동생이 태어나자 그 동생을 정말 이뻐하셨습니다.
그래서 엄마가 동생에게 젖을 먹이고 나면 할머니는 그 동생을 업고, 저는 옆에 걸려서 마실 다니시곤 하셨습니다.
바로 옆집에 할머니는 우리 남매를 데리고 놀러 가셨다가, 집에 돌아오려고 동생을 업고 계셨습니다.
동생을 등에 올려 포대기로 감싸고, 끈으로 돌려 매듭을 짓기 전에 아이가 흘러내려 오지 않도록 한번 추켜 올려주는 순간이었던 것 같습니다.
월남 치마라고 했던가요?
허리는 고무줄로 되어 있고 길이가 발목까지 내려오던 치마요.
할머니가 동생을 추켜 올리면서 허리춤에 있던 치마의 천이 달려 올라갔습니다.
그 모습을 뒤에 지켜보고 있던 저는 “늙은 년이 치마도 하나 간수 못해” 하며 맹랑하기 짝이 없는 말을 했습니다.
예의 바르지 못한 말에 야단을 치실 만도 한데, 할머니와 친구 분들은 허리가 구부러져라 웃어주셨습니다.
지금에서야 변명 같지만 할머니들이 하시는 말투를 흉내낸 것이 아닐까요?
--;;
말도 잘 하고 기억력도 좋다는 이유로, 할머니의 손주들 자랑(?) 목록에 그 아이답지 않은 말투와 가요 제목만 대면 줄줄이 가사를 외워 노래하는 것이 늘 들어 있었습니다.
어렸을 때는 말도 똑 부러지게 잘 했다는데 지금은 영....
교외로 이사간 집에 방도 한 칸 더 들이고 하여 할머니도 다시 함께 살게 되었습니다.
저는 당연히 할머니와 한 방을 썼습니다.
잠 잘 때는 할머니가 꼬옥 끌어 안아주시곤 하셨는데, 겨울이면 차가운 저의 손을 끌어다가 할머니 몸에 얹어 녹여 주셨고 발은 끌어다가 할머니 다리 사이에 넣어 따뜻하게 데워주셨습니다.
그리고 잠 자리에서 무슨 주문 외듯이 날마다 저에게 속삭이셨습니다.
“손에 물 묻히지 말고 발에 흙 묻히지 말고 살아라. 비행기 타고 유학 가서 공부도 많이 해라.”
이렇게 사는 것이 여성으로서 최고로 행복하게 사는 것이라 여기셨던 것 같습니다.
또 할머니는 언제나 제 편이셨습니다.
속상하게 했던 일이나 친구들 얘기를 하면 상대방에게 얼마나 욕을 하시는지 속상했던 마음이 저절로 풀어지기도 하고, 상대가 그렇게 엄청난 욕 먹을 정도는 아니지 싶어 스르르 마음이 풀어지곤 했습니다.
어느 정도 제 기분이 괜찮아진 것 같으면 할머니는 사람이란 이런 거야, 사람 마음은 저런 거야 하시면서 말씀해주셨습니다.
정말 위로 받고 싶은 일은 온전히 제 편이 되어주셨던 할머니께 가져갔던 것 같습니다.
할머니는 늘 변함 없는 저의 지지자였는데 저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글쎄 할머니가 저 때문에 가출하신 적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고교 시절 사춘기를 보내고 있던 어느 때, 할머니가 작은 집에 가서 며칠 동안 머무르셨던 이유가 제가 너무 까칠하게 굴어서였다고, 스무 살이 넘어 좀 컸다고 여기셨는지 지나가는 말처럼 하셨습니다.
할머니는 손주 삼 남매가 곁에만 있어도 좋아하실 뿐 상처 받으실 수도 있다는 생각은 꿈에도 못했었습니다.
무척 죄송했는데 죄송하다는 말씀은 드리지 못했습니다.
그런 얘기를 들은 다음에도 할머니께 잘 해드리지 못했습니다.
돈 많이 벌면 옷 한 벌 맞춰드리겠다고 했는데, 돈 벌어 학비에 보태며 학교만 다니다 결혼을 해버렸습니다.
결혼해서는 자동차가 생기면 할머니 태우고 좋은 데 구경시켜드린다고 했는데, 약속을 하나도 지키지 못했습니다.
딸이 없어 딸 같이 여겨주시기도 하던 첫 손녀 결혼하는 거 보고 돌아가시려고 그러셨는지 제가 결혼하고 한 달쯤 지나 돌아가셨습니다.
….
할머니를 기억하며 몇 줄 글을 쓰고 보니 이야기의 주인공은 모두 저네요.
이렇게 이기적인 기억일 줄이야….
지금도 할머니를 떠올릴 때면 많이 많이 보고 싶고, 그 품에 안기어 살아 가는 이야기뿐 아니라 풀지 못한 마음의 숙제도 다 털어놓으면, 제 편이 되어 무슨 말씀을 해 주실지 궁금합니다.
할머니께 강산이도 강윤이도 보여드리고 싶은데….
할머니가 곁에 계시지는 않지만, 할머니의 한결 같은 사랑과 삶의 지혜를 나눠주시며 자주 하셨던 “사람은 줏대가 있어야 해” 라는 말씀은 삶을 만들어가는 제게 오늘도 여전히 영향을 주고 있습니다.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생명까지 내어주시며 그 사랑을 확증시켜주시고, 다시 살아나셔서 사랑으로 살도록 도우시는 우리 주님-“주님”이라 함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뿐 입니다-을 기억하는 부활의 계절이 되면, 왜 할머니가 자꾸 생각나고, 더 그리운지 모르겠습니다.
“보라 너희가 다 각각 제 곳으로 흩어지고 나를 혼자 둘 때가 오나니 벌써 왔도다 그러나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느니라 /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란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요한복음16:32-33)
제가 초등학교에 들어가 1학년 가을 학기가 되었을 때 아빠는 새로운 직장을 다니게 되셨습니다.
그때까지 우리 가족은 인천 시내에 살다가 아빠의 새 직장이 있는 인천 변두리로 이사를 가게 되었습니다.
우리 가족은 할머니와 함께 살고 있었는데, 이사 갈 집에 수리가 필요한 상태라서 할머니는 집이 고쳐진 다음에 이사 오시기로 했습니다.
어렴풋이 기억하기로는 할머니와 떨어져 살았던 시간이 그리 길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 기간 동안 할머니에 대해서 애틋한 감정을 가지게 되었고, 아주 긴 시간 떨어져 산 것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어느 날, 엄마가 할머니 집에 가보자고 하셨습니다.
시내에 계신 할머니가 어떻게 지내시는지 살펴보기도 하고, 엄마는 이런 저런 일을 보신 것 같습니다.
저는 할머니에게 갖다 드린다며, 두꺼운 종이 조각에다가 이불 꿰매는 하얀 면실과 검은 색 재봉실을 둘둘 얼마큼 감아서 챙겨두었습니다.
할머니에게 왜 실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는지 모르겠습니다. ^^
할머니 집에 도착해서 보니, 그 때 50대 중반이신 할머니는 일터에서 아직 돌아오시지 않으셨지만 집에는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엄마는 무슨 일인가 보러 나가시고 저 혼자 할머니 방에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번뜩 할머니가 일 갔다가 오시면 저녁 드실 밥이 있나 찾아보았습니다.
여기서 잠깐!
기억이 나질 않는 부분인데(나중에 엄마한테 여쭈어 봐야겠습니다), 엄마가 해 놓은 밥인지, 할머니가 우리가 올 줄 모르고 아침에 한 그릇 남겨놓고 일 가신 것인지, 뚜껑이 있는 밥그릇에 담긴 밥 한 그릇을 발견했습니다.
문득 할머니가 오셨을 때 따뜻한 밥을 드시면 더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아랫목 이불 밑으로 밥그릇을 가져다 놓았는데 이것 가지고는 밥이 따뜻해질 것 같지가 않아 밥그릇을 들고 부엌으로 다시 갔습니다.
연탄불 위에 올려진 솥에서 따끈하게 데워진 물을 퍼서 밥에 붓고, 뚜껑을 다시 덮어, 딱 밥 한 그릇 들어가게 만든 스티로폼 통에 밥그릇을 넣어 아랫목에 펴져 있는 이불로 잘 감싸두었습니다.
예닐곱 살짜리가 그런 생각을 해낸 것이 스스로 꽤 괜찮다고 여기며, 할머니께 들을 칭찬을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시간이 얼마가 지났는지 할머니가 집에 돌아오셨고 저를 보고 무척 기분 좋아하셨던 것 같습니다.
곧이어 할머니 드시라고 꽁꽁 묻어둔 스티로폼 통에서 밥그릇을 꺼내 내어드렸습니다.
밥그릇의 뚜껑을 여신 할머니는 물에 불어 있는 밥을 보시고, 밥이 왜 이러냐고 물으셨습니다.
저 또한 밥에 물(게다가 따뜻한 물)을 부어 놓으면 밥이 불어 오를지 몰랐기에 당황스러웠지만 이만저만 해서 할머니를 위해 따뜻한 물을 부어 놓았노라 말씀 드렸습니다.
할머니는 제 설명을 듣고 흐뭇해 하시면서, 퉁퉁 불은 밥을 마다하지 않으시고 드셨습니다.
게다가 한참 동안 친척들이나 친구 분들을 만나시면 이 어이 없는 밥 사건과 엉성하게 감긴 실 꾸러미에 대해 두고두고 애기하셨습니다.
아마도 어린 것이 할머니를 생각한답시고 한 짓이라 사랑스레 여기셨던 것 같습니다.
그 보다 더 어렸던, 둘째 동생이 태어나서 얼마 지나지 않았으니까 제가 서너 살쯤 되었을 때입니다.
할머니는 딸이지만 첫 손주인 저를 많이 위해주셨는데, 아빠가 장남이시고 남동생이 태어나자 그 동생을 정말 이뻐하셨습니다.
그래서 엄마가 동생에게 젖을 먹이고 나면 할머니는 그 동생을 업고, 저는 옆에 걸려서 마실 다니시곤 하셨습니다.
바로 옆집에 할머니는 우리 남매를 데리고 놀러 가셨다가, 집에 돌아오려고 동생을 업고 계셨습니다.
동생을 등에 올려 포대기로 감싸고, 끈으로 돌려 매듭을 짓기 전에 아이가 흘러내려 오지 않도록 한번 추켜 올려주는 순간이었던 것 같습니다.
월남 치마라고 했던가요?
허리는 고무줄로 되어 있고 길이가 발목까지 내려오던 치마요.
할머니가 동생을 추켜 올리면서 허리춤에 있던 치마의 천이 달려 올라갔습니다.
그 모습을 뒤에 지켜보고 있던 저는 “늙은 년이 치마도 하나 간수 못해” 하며 맹랑하기 짝이 없는 말을 했습니다.
예의 바르지 못한 말에 야단을 치실 만도 한데, 할머니와 친구 분들은 허리가 구부러져라 웃어주셨습니다.
지금에서야 변명 같지만 할머니들이 하시는 말투를 흉내낸 것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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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도 잘 하고 기억력도 좋다는 이유로, 할머니의 손주들 자랑(?) 목록에 그 아이답지 않은 말투와 가요 제목만 대면 줄줄이 가사를 외워 노래하는 것이 늘 들어 있었습니다.
어렸을 때는 말도 똑 부러지게 잘 했다는데 지금은 영....
교외로 이사간 집에 방도 한 칸 더 들이고 하여 할머니도 다시 함께 살게 되었습니다.
저는 당연히 할머니와 한 방을 썼습니다.
잠 잘 때는 할머니가 꼬옥 끌어 안아주시곤 하셨는데, 겨울이면 차가운 저의 손을 끌어다가 할머니 몸에 얹어 녹여 주셨고 발은 끌어다가 할머니 다리 사이에 넣어 따뜻하게 데워주셨습니다.
그리고 잠 자리에서 무슨 주문 외듯이 날마다 저에게 속삭이셨습니다.
“손에 물 묻히지 말고 발에 흙 묻히지 말고 살아라. 비행기 타고 유학 가서 공부도 많이 해라.”
이렇게 사는 것이 여성으로서 최고로 행복하게 사는 것이라 여기셨던 것 같습니다.
또 할머니는 언제나 제 편이셨습니다.
속상하게 했던 일이나 친구들 얘기를 하면 상대방에게 얼마나 욕을 하시는지 속상했던 마음이 저절로 풀어지기도 하고, 상대가 그렇게 엄청난 욕 먹을 정도는 아니지 싶어 스르르 마음이 풀어지곤 했습니다.
어느 정도 제 기분이 괜찮아진 것 같으면 할머니는 사람이란 이런 거야, 사람 마음은 저런 거야 하시면서 말씀해주셨습니다.
정말 위로 받고 싶은 일은 온전히 제 편이 되어주셨던 할머니께 가져갔던 것 같습니다.
할머니는 늘 변함 없는 저의 지지자였는데 저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글쎄 할머니가 저 때문에 가출하신 적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고교 시절 사춘기를 보내고 있던 어느 때, 할머니가 작은 집에 가서 며칠 동안 머무르셨던 이유가 제가 너무 까칠하게 굴어서였다고, 스무 살이 넘어 좀 컸다고 여기셨는지 지나가는 말처럼 하셨습니다.
할머니는 손주 삼 남매가 곁에만 있어도 좋아하실 뿐 상처 받으실 수도 있다는 생각은 꿈에도 못했었습니다.
무척 죄송했는데 죄송하다는 말씀은 드리지 못했습니다.
그런 얘기를 들은 다음에도 할머니께 잘 해드리지 못했습니다.
돈 많이 벌면 옷 한 벌 맞춰드리겠다고 했는데, 돈 벌어 학비에 보태며 학교만 다니다 결혼을 해버렸습니다.
결혼해서는 자동차가 생기면 할머니 태우고 좋은 데 구경시켜드린다고 했는데, 약속을 하나도 지키지 못했습니다.
딸이 없어 딸 같이 여겨주시기도 하던 첫 손녀 결혼하는 거 보고 돌아가시려고 그러셨는지 제가 결혼하고 한 달쯤 지나 돌아가셨습니다.
….
할머니를 기억하며 몇 줄 글을 쓰고 보니 이야기의 주인공은 모두 저네요.
이렇게 이기적인 기억일 줄이야….
지금도 할머니를 떠올릴 때면 많이 많이 보고 싶고, 그 품에 안기어 살아 가는 이야기뿐 아니라 풀지 못한 마음의 숙제도 다 털어놓으면, 제 편이 되어 무슨 말씀을 해 주실지 궁금합니다.
할머니께 강산이도 강윤이도 보여드리고 싶은데….
할머니가 곁에 계시지는 않지만, 할머니의 한결 같은 사랑과 삶의 지혜를 나눠주시며 자주 하셨던 “사람은 줏대가 있어야 해” 라는 말씀은 삶을 만들어가는 제게 오늘도 여전히 영향을 주고 있습니다.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생명까지 내어주시며 그 사랑을 확증시켜주시고, 다시 살아나셔서 사랑으로 살도록 도우시는 우리 주님-“주님”이라 함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뿐 입니다-을 기억하는 부활의 계절이 되면, 왜 할머니가 자꾸 생각나고, 더 그리운지 모르겠습니다.
“보라 너희가 다 각각 제 곳으로 흩어지고 나를 혼자 둘 때가 오나니 벌써 왔도다 그러나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느니라 /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란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요한복음16:3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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