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7/2008

조화로운 삶을 살기 위하여

<강산이를 태운 스쿨버스가 오면 빨리 나가기 위해 기다리는 곳이예요>

어제부터 강산이가 스쿨버스를 탑니다.
아침에 스쿨버스를 타는 시간이 6시15분으로 정해졌습니다.
조금 더 부지런을 떨어야 될 것 같습니다.
강산이는 스쿨버스를 탄다는 새로운 사실에 어제, 오늘 아침 시간을 잘 지켜주었습니다.

아직 어둑한 새벽에 소리 없는 사이렌 불빛 같은 것이 번쩍거리면서 길모퉁이를 돌아오는 스쿨버스가 보입니다.
버스 기사와 강산이의 약속이 지켜지는 순간입니다.
버스 기사 아줌마와 “Good morning" 인사하면 기분이 더욱 좋습니다.

일이 하나 하나 해결되어 나가니 또한 좋습니다.
필요한 것이 있으면 필요하다고 얘기해야 하고, 서류를 작성해야 하면 잘 써서 갖다 내야하고, 또 여기에 교우들의 도움이 보태질 때도 많이 있습니다.
많은 분들이 관심 가져주셔서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여태껏 그랬던 것처럼 도움을 주시는 분들의 그 사랑을 다 갚을 길이 없습니다.
목회자 가정이라는 것 때문에 큰 사랑을 받고 있는 것 같아 하나님께 그리고 같은 신앙의 길을 가는 교우들에게 감사할 뿐입니다.

얼마 전 아이들에게 한글을 가르치는 한국학교(우리 교회) 교사로서 이력서를 내야 했습니다.
이력서를 언제 써보았는지 기억이 가물가물 합니다.
저의 경력을 소개하면서 어떻게든 제 부족함을 메꾸어 보려고 이것저것 적어 넣었습니다.

삶을 수직적인 연대기로 살펴보는 이력서를 쓰면서 몇 년 전에 Hi Family의 가정사역 아카데미에 다닌 것도 적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문득 “성격 심리” 과목이 끝날 때 A4 한 장 반에 제출했던 짧은 글이 생각났습니다.
그 글대로 살지도 못하고 있고 그렇게 살아갈 자신도 점점 없어질 뿐 아니라 다분히 선언적인 느낌까지 나는데 왜 생각났는지....
상대적으로 제가 누리는 것이 많아졌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여기에 그대로 옮겨보겠습니다.

조화로운 삶
“성숙한 삶이란 무엇인가”라는 과제를 받고 내내 무엇일까, 무엇일까를 되뇌이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문득 ‘조화로운 삶이다’라는 생각에 이르렀습니다. 하나님과 사람과 자연과 조화로운 삶 말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조화롭게 살 수 있는지를 더듬기 시작했습니다.
아직 나 스스로가 성숙한 삶을 살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늘 가까이에 두고 빛으로 삼는 몇 사람이 있습니다. 그 분들의 삶은 많은 사람들이 닮고 싶어하며 모범으로 삼기도 하니 저 역시도 마찬가지 입니다. 헨리 나웬, 마더 테레사와 티벳의 라다크 사람들이 그들입니다. 그들의 살았던 흔적을 잠시 살펴보며 제가 생각하는 성숙한 삶을 정리해 보려고 합니다.

헨리 나웬 (1932-1996)

나웬의 인생은 화려한 경력들이 많습니다. 화란에서 심리학과 신학을 공부하고, 하버드에서 가르쳤으며, 평균 일년에 한 권 이상씩 책을 썼고, 전국을 순회하며 강연했습니다. 그러나 제 마음을 사로잡는 것은 그의 경력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나웬의 생애 마지막 10년 동안의 여정에 있습니다.
나웬은 명문대학의 종신 교수직을 버리고 캐나다 토론토에 있는 라쉬(L'Arche Community)의 상주 사제가 되었습니다. 그곳은 데이브레이크(Daybreak)라는 곳이었습니다. 정신지체인들의 공동체인 그곳에서 ‘그리스도를 위한 바보’로 살아갑니다. 나웬은 생애 처음으로 하나님께서 어떤 일을 위해 자신을 부른다고 느낍니다. 나웬은 우리가 보통 생각하듯이 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받기 위해서, 그리고 넘쳐서가 아니라 모자라서 그곳으로 간 것입니다.
데이브레이크에서 아담이라는 청년을 돌보는 임무를 맡게 됩니다. 아담은 혼자서 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는 20대의 중증장애인 이었습니다. 세상의 많은 명예를 가진 나웬은 모두가 식물인간, 쓸모없는 사람으로 여기는 한 젊은이를 위해 사역했습니다. 이 관계 속에서 대부분의 유익을 얻는 것은 아담이 아니라 나웬 자신이었음을 점차 깨달아 갔습니다. 그리고 아담을 통해서 진정으로 사랑하는 법을 배웠고, 그 과정에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심도 그와 같을 것이라고 고백합니다.

마더테레사 (1910-1997)

사람들은 마더 테레사를 ‘살아있는 성인’ ‘캘커타의 성인’ ‘사랑의 심장과 철의 의지를 가진 사람’ 이라고 합니다. 마더 테레사가 가난한 사람의 어머니로서 산 삶을 보면 노력해서 애써 베푸는 사랑이 아니라 흘러 넘치는 능동적인 사랑이기에 감동적입니다. 마데 테레사의 다음과 같은 말에서 그 사랑을 엿볼 수 있습니다.
“‘나에게 1백만 달러를 준다 할지라도 나병환자를 만지고 싶지 않다’고 어떤 사람이 내게 말했습니다. 나는 대답했습니다. 나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돈 때문이라면 2백만 달러를 준다 할지라도 지금의 일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에 대한 사랑 때문에 기쁘게 그 일을 합니다.”
한번은 마더 테레사가 일본에 가서 강연을 합니다. 큰 감동을 받은 자원봉사자가 캘커카에 가겠다고 하자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봉사하기 위해 일부러 캘커타까지 오시지 않아도 됩니다. 여러분들 이웃에 캘커타가 있으니 그 캘커타를 위해 일해 주십시오.”
마더 테레사는 종종 “가정 안의 캘커타”는 없는지 살펴보라고 일깨워 줍니다. 사랑은 가정에서 시작하고 가정에서 지속되며 가정에는 사랑할 영역이 항상 있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실천할 첫 번째 활동분야가 가정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라다크 사람들
‘작은 티베트’라 불리는 라다크는 서부 히말라야 고원의 황량하지만 아름다운 고장입니다. 천년 넘게 평화롭고 건강한 공동체를 유지해 왔는데, 그것이 깊은 생태적 지혜에서 나온 것이라는 사실이 제 마음을 잡고 있는 부분입니다. 라다크 사람들은 낭비란 없이 모든 것을 재순환 시킵니다. 다 낡아 바느질도 할 수 없는 옷은 진흙에 뭉쳐서 수로의 약한 부분에 끼워 넣어 물이 새지 않도록 합니다. 또 설거지 한 물도, 잡초들도 버리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공동체로 살면서 개인적 억압을 느끼기 보다는 깊은 안정감을 주는 곳, 풍족하지는 않지만 아무도 가난하다고 느끼지 않는 곳, 적은 자원으로 완전에 가까운 자립 생활 등입니다.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기 위해 영적인 깊이를 더하며, 만나는 모든 사람들을 소중히 여기고, 우리 아이들과 더불어 라쉬같은 장애우 마을 공동체 이루는 것을 올해 우리 가족의 사명으로 선언했습니다. 나웬과 함께 했던 아담과 같이 아름다운 영혼을 가진 우리 아이가 있는 한 오랜 동안 그 사명을 간직하게 될 것 같습니다. 지금은 부족하지만 헨리 나웬이나 마더 테레사나 라다크 사람들 마냥 그들을 흉내 내며 살다보면 지금 보다 성숙한 삶을 살게 될거라는 희망을 갖고 있습니다. (12월 2002년)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5:16-18)
“예수께서 앉으사 열두 제자를 불러서 이르시되 아무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사람의 끝이 되며 뭇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하시고”(막9:35)

8/20/2008

기억 속의 그 향기를 또 다시 맡다



새벽 5시 30분.
"Get Happy" 라는 휴대폰 리듬을 듣고 침대에서 내려옵니다.
자는 것인지 조는 것인지 기도하는 것인지 아무도 모르는 자세로 반시간을 보냅니다.

적어도 6시에는 강산이를 깨워야 합니다.
마음이 내키고 의미가 부여가 되어야 움직이는 강산이를 잘(!) 깨워야 합니다.
“오늘 점심에 강산이 뭐 먹을 거야?”
“이따 학교 갔다 와서 아빠랑 수영하러 가자!”
“엄마가 써준 편지 선생님 보여드려야지?”
“저녁 때 수요 예배 갈 거지?”
강산이가 좋아할만한 일들을 골라 슬쩍 던져 놓고 강산이 방을 나옵니다.

쉐이커에 먼저 우유를 따르고 다음에는 미숫가루를 넉넉하게 덜어 넣고 거기에 꿀을 달달한 맛이 나도록 넣어 흔들어 섞으면 강산이가 먹을 아침이 준비됩니다.
준비된 것을 가지고 강산이 방으로 올라가면 잠이 덜 깬 얼굴로 침대에 앉아있습니다.
이 정도면 강산이 등교시간에 맞추는데 성공입니다.
강산이 손에 미숫가루 탄 것을 쥐어주고 나오면 그 다음에는 강산이가 알아서 씻고 옷 입고 내려옵니다.

6시 35분쯤 집을 나서면 아주 적당하게 학교에 도착합니다.
아이들이 개학한 지난 주에는 남편이 새벽기도회를 인도하느라 제가 강산이 등하교를 도왔습니다.
이번 주에는 학교 가는 길은 남편이, 집에 돌아오는 길은 제가 맡았습니다.
강윤이는 이 시간에 자고 있습니다.
강윤이 말로는 형 깨우는 소리에 자기도 깬다고 합니다.
중학생이 된 강윤이가 스쿨 버스 타는 시간은 8시40분입니다.
초등학생이 7시20분쯤에 가니까 아침 시간은 중학생이 가장 여유롭습니다.
집에 돌아오는 순서도 학교에 간 차례대로 입니다.
이 등하교 시간은 카운티마다 조금씩 다릅니다.





스쿨 버스 타는 것과 시간이 결정되면 집 현관문 앞에서 타고 내릴 수 있습니다.
장애우 친구들을 위한 배려입니다.
다만 아침 시간이 너무 이르지 않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멀리 사는 친구들은 5시 45분에 스쿨 버스를 타기도 한답니다.
너무 이른 시간이라 스쿨 버스 타는 것을 포기하고 부모가 출근하면서 학교에 내려준다고 합니다.

그런데 사실 강산이를 데려다주는 것이 마음이 편한 면도 없지 않습니다.
강산이 기분에 따라 학교 갈 준비하는 시간이 많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제 시간에 오는 스쿨 버스를 타려면 꼭 시간을 맞추어야 되니 은근히 스트레스가 됩니다.
알아서 척척 하는 강윤이가 고마워질 때가 한 두 번이 아닙니다.
어쨌든 늦여름답게 서늘한 새벽 공기를 마시며 파랗게 밝아오는 새벽길을 달리는 기분도 그런대로 괜찮습니다.

지난 월요일 강산이가 다닐 고등학교에 처음 데려다주러 갔을 때입니다.
어디다 차를 세워야할지 몰라 앞 차를 따라가 세웠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주차할 사람이 정해져 있는 학생 주차장이었습니다.
이런 이런....
개학 첫 날부터 자기 자리가 아닌 다른 곳에 주차했어야 할 학생에게 미안하게 되었습니다.
학생 주차장에 주차하는 바람에 자기 차에서 내리는 아이들과 길게 늘어선 스쿨 버스에서 쏟아져 나오는 아이들 틈에 강산이와 저도 끼게 되었습니다.

새 학년을 시작하기 위해 학교 건물 쪽으로 걸어가는 아이들, 그들을 비추는 노란 가로등과 연이어 학교 안으로 들어오는 자동차 불빛은 어디선가 본 듯한 풍경입니다.
그리고 그 분위기가 품어내는 향기도 언젠가 맡아본 것입니다.
......


<샌프란시스코 공항에서>


새로운 시작에 대한 설레임, 기대, 긴장, 두려움, 낯설음.
바로 6개월 전 어둑해지는 초저녁 아틀란타 하츠필드 공항에 내렸을 때에 느꼈던 것과 똑같은 것들입니다.
샌프란시스코를 경유해서 왔기에 긴 시간 비행했음에도 긴장되어 피곤함을 느낄 겨를이 없던 남편과 저.
여행하러 온 것인지 살러 온 것인지 모르는 강산.
부모가 가야한다고 하니 묵묵히 따라나선 강윤.

많은 사람들 틈에서 여러 개의 살림살이 짐을 찾고, 얼굴도 모르지만 마중 나온 사람들을 찾기 위해 두리번거립니다.
그러다가 남편 이름을 알고 있는 목사님 한 분과 교우를 만났을 때 얼마나 고맙고 마음이 놓이던지요.
공항 건물을 비추고 있는 노란 불빛과 헤드라이트를 켜고 사람을 찾아 어디론가 달리고 있는 자동차들 틈에서 교회에서 내준 자동차에 오르기까지 길지 않은 시간 동안 보았던 풍경과 이전에 맡아보지 못했던 야릇한 그 향기는 오랜 동안 기억 속에 남아있을 것입니다.

아이들이 고등학교, 중학교에서 배움을 시작하는 첫 날, 더욱이 이른 아침 시간에 하츠필드 공항에서의 기억이 떠오른 것은 새로운 경험이었습니다.
그 긴장감도 나쁘지 않았습니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 / 그러므로 누구든지 우리 온전히 이룬 자들은 이렇게 생각할지니 만일 무슨 일에 너희가 달리 생각하면 하나님이 이것도 너희에게 나타내시리라 / 오직 우리가 어디까지 이르렀든지 그대로 행할 것이라”(빌3:12-16)

8/12/2008

어머님, 엄마, 어머니

<동생이 보내 준 사진-올 아버님 생신에 다시 뭉치신 어머니, 엄마, 어머님>


“엄마, 할머니한테 전화 안 해?”
“니가 좀 먼저 해 봐.”
“싫어. 엄마가 해.”

막상 할머니들과 통화할 때는 “네” “네” “아니요” 밖에 말하는 것이 없으면서도 전화 하는 것을 꼭 챙깁니다.
남편이 쉬는 월요일이면 저녁 먹고 나서 한국에 계신 부모님들께 문안 전화를 드리곤 합니다.

전화는 싸고 통화 품질이 좋아 많은 사람들이 이용하는 인터넷 폰으로 합니다.
아이들은 컴퓨터를 켜고 인터넷을 연결하고 통화 버튼을 누르고 연결음이 들리면 “엄마 빨리 와” 합니다.
제 목소리 보다 아이들이 “할머니, 할아버지” 불러드리면 더 좋아하실 텐데 아이들은 그런 할머니 마음을 헤아리기에는 아직 어린가 봅니다.

시댁 전화번호를 먼저 누릅니다.
통화가 될 확률은 절반 입니다.
농사를 지으시는 분들이기 때문에 한국 시간으로 이른 아침이 아니면 통화가 어렵습니다.

어렵게 연결이 되면 “어머님, 저예요.”
“응 그래. 모두 잘 지내지?”로 대화를 시작합니다.
어머님은 남편에게는 교회에서 목회를 잘 하고 있는 지를 물으시고 저를 꼭 바꾸라고 하십니다.
“야, 목사 교회에서 잘 하고 있냐? 많이 바뻐?”
“네. 일이 많은가 봐요. 잘 하고 있어요.” 그러면 아버님은
“바쁜 게 나아. 그럼 바쁘게 일 해야지” 하시고, 어머님은
“그렇지 뭐. 걱정할까봐 어려운 얘기 하겠냐, 니가? 그래도 바쁠수록 건강 조심해야 된다. 먹는 것 잘 챙겨 먹고” 하십니다.
“기도 밖에 없어. 우리가 뭘 의지 하겠냐? 하나님이 도와 주셔야 되잖아? 사모가 기도해야 된다. 니가 기도해야 돼. 우리도 기도하니까.” 이 말씀을 잊지 않고 하십니다.
제 기도는 어머님이 하시는 기도 분량만큼 되지 못하는 것을 알기에 조금은 자신 없는 대답을 “네” 합니다.

전화 내용은 늘 비슷합니다.
아이들 학교는 잘 다니는지, 많이 컸는지, 김치는 떨어지지 않고 담궈 먹는지, 음식은 제대로 해 먹는지....
아이들에 대해서는 이런 저런 할 이야기들이 그런대로 있습니다.
그런데 이곳에 한국 마트들이 많아서 먹는데 어려움이 없다고 늘 말씀드리지만 상상이 잘 되시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저도 미국에 와 보기 전에는 그리고 아틀란타에 오기 전에는 아무리 누가 무슨 말을 해도 이곳 사는 모습이 잘 그려지지 않았으니까요.

이번에는 엄마네 전화를 합니다.
“엄마, 나야.”
“호호호, 그래. 그렇지 않아도 전화 올 때가 됐는데 했지.”
엄마는 늘 하고 싶은 말이 많은데 전화가 오면 새까맣게 생각이 나질 않는다며 적어놓아야 한다고 하십니다.
처음부터 막힘이 없이 소식을 전할 때는 아마도 적어 놓은 것을 보고 말씀하시는 것은 아닐는지 모르겠습니다.ㅋㅋㅋ
엄마는 은행 갔던 얘기, 앞 동네 권사님이 파 캐서 주신 얘기, 오이지 보내면 어떻겠냐... 시시콜콜 하고는 아빠가 노인회 사무장을 맡으셔서 우리 가족 생각 덜 나게 되어 다행이라는 얘기와 함께 살고 있는 동생 얘기를 해주십니다.

깔깔 웃으면서 얘기하다가 며칠 전에는 강윤이와 똑같이 생긴 아이를 봤다며 울먹울먹 하십니다.
엄마한테는 딸네가 가까이서 살지 않는 것에 익숙해지려면 아직 시간이 더 필요한 것 같습니다.

저한테는 어머니가 또 한분 계십니다.
동생의 어머니입니다.
응~, 상식적으로 말하자면 동서의 어머니입니다.

미국에 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 동서한테 이메일을 받았습니다.
“사랑하는 언니에게” 라고 시작된 편지였습니다.
멀리 떨어지고 보니 마음으로는 더욱 가깝게 느껴진다는 따뜻한 편지였습니다.
한국에서도 형님으로서 동서를 제대로 챙겨주지도 못했는데 이곳에 와서도 저같이 무심한 사람을 언니 삼아 주겠다고 하니 그저 고마울 뿐입니다.
한국을 떠나올 때에 가장 오래 동안 힘있게 저를 안아준 사람도 그 동생이었습니다.

동생은 무남독녀로 어머니가 늦게 얻은 귀한 딸입니다.
이곳에 와서 어머니와 잠깐 통화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아이고마 큰 집은 잘됐어요.”
“감사합니다. 어머니는 건강하시죠?”
“내사마 늘 그렇죠, 뭐. 야야 전화 받아라.”

어머니는 특수교육 교사인 동생이 방학 중이라 시간의 여유가 있으니 무릎 관절 수술을 하셨답니다.
어머니 무릎이 더욱 든든해지는 기회가 되길 기도합니다.
어머니를 잘 보살피는 동생과 서방님-서방님은 그냥 서방님!-이신지라 걱정이 되진 않습니다.

세 어머니께서 돌아오는 겨울에 저희 사는 곳을 보러 오시겠다고 합니다.
미국 여행 주동자인 어머님은 농한기에 오시면서 엄마와 어머니도 꼭 같이 가셔야 된다고, 같이 어울려 가야 더 좋지 않겠냐며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고 계신 것 같습니다.
어머니들 볼 날이 기대가 됩니다.
형편이 되는대로 오시게 되겠지요.
모두 건강하고 밝은 얼굴로 뵙기를 기도합니다.

"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명한 대로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가 생명이 길고 복을 누리리라"(신5:16)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도다"(시19:8)

8/06/2008

나의 보안 장치(My Security)


다음 주 월요일이 되면 아이들이 개학을 해서 한 학년씩 올라가게 됩니다.
지난 주 후반부터는 “Back To School” 을 위한 학용품을 사러 다녔습니다.
학년마다 필요한 학용품 목록(School Supplies)에 따라 준비를 합니다.
강윤이가 갈 학교에서는 이 준비물을 꾸러미로 만들어 놓아 한꺼번에 살 수도 있답니다.
강윤이의 경우는 23가지 품목을 준비해야 하는데 학용품 이름도 낯설고 뭘 말하는지 모르기도 하여 학교에 신청할까도 생각해 봤지만 어떤 물건들인지 궁금증이 발동하는 바람에 가게에 가서 직접 사기로 했습니다.

아이들이 학교 생활에 필요한 물품에 대해 세금을 면제해 주는 "Tax Sale"이 4일 동안 있었습니다.
미국에서 다녀본 곳이 별로 없지만 이곳에는 곳곳에 대형 마트가 정말 많은 것 같습니다.
여러 마트에서 Tax Sale을 하는데 그 가운데 그래도 W 마트가 가장 싸게 구입할 수 있다고들 합니다.

그래서 Tax Sale 하는 첫 날 오전에 가 보았습니다.
아이와 부모가 함께 나와 학용품이 진열되어 있는 복도마다 가득 메우고 있었고 저와 우리 아이들도 그 틈에 끼어 한 시간쯤 시간을 보냅니다.
저는 학용품 목록이 인쇄된 종이를 들고 다니며 물건을 찾아내느라 정신이 없습니다.
아이들은 물건 싣는 수레를 사람이 적은 곳을 찾아다니며 몰고 다니느라 형제가 토닥거리며 말씨름을 합니다.

필요한 물건을 찾아 낼 때마다 보물찾기 하는 것 같습니다.
복도를 누비고 다니다가 권사님 한 분을 만났습니다.
권사님 손주들 학용품을 사러오셨다고 합니다.
권사님 안부를 묻고는 “그런데 권사님 이게 뭐예요?” 하며 잘 모르겠는 학용품 이름을 보여드립니다.
권사님은 “딸하고 같이 왔는데 걔가 잘 알거예요” 하시며 따님이 있는 곳을 가르쳐주십니다.
그 따님도 학용품을 고르고 있었는데 물어보는 것마다 물건이 있는 곳까지 데려다주고, 물건 찾아 다니다 또 만나서 물어보면 또 알려주어 그 따님 덕분에 쇼핑을 빨리 끝낼 수 있었습니다.

돌아오는 월요일 개학을 앞두고 이번 주에는 예비소집일 같은 "Open House"가 있습니다.
다른 엄마들과 얘기하다 보니 Open House 일정을 알려 주는 편지를 받았다고 합니다.
강산이에게는 아무 편지도 오지 않았습니다.
가야 할 고등학교에 전화해 보니 이름을 찾을 수 없다고 합니다.
강윤이는 "Reading" 재시험에서도 점수가 조금 모자라 진급할지 말지 논의하기 위해 학교를 방문해야 합니다.
영어가 제2 외국어인 학생들을 위한 ESOL반 아이들은 Reading 시험을 보지 않아도 된다는데 어떻게 된 일인지...

그런데 오늘 오전에 이 모든 일이 해결되었습니다.
강윤이가 다니던 초등학교에서 9시 10분에 회의가 약속되어 있었습니다.
강윤이는 조지아 주에서 해마다 1,2월에 치루는 영어 능력 시험이 끝난 뒤에 학교에 왔기 때문에 영어 능력을 가늠할 수 있는 자료가 없었고, 그래서 보통 아이들처럼 시험을 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초등학교에서 공부하는 짧은 시간 동안 뛰어난 능력을 보여주었다며 수학 선생님은 칭찬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담임 선생님도 강윤이가 했던 과제물을 가지고 와서는 공부하려는 의지가 있고 영어도 또박또박 잘 썼다며, 그러니까 문제없이 6학년으로 진급할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내일 중학교 Open House에 가서 등록을 하면 됩니다.

강윤이가 다녔던 학교를 나와 이번에는 강산이가 갈 고등학교에 갔습니다.
강산이를 맡게 될 선생님을 만나서 등록에 문제 없음을 확인하고 돌아왔습니다.
중학교에서 강산이에 대한 서류가 미처 오지 않은 것이 있어서 그렇답니다.
스쿨버스 일정도 정해지지 않아 개학하고 얼마 동안 통학시켜야 합니다.

학교 선생님들과 만나서 필요한 정보를 빠뜨리지 않고 다 얻을 수 있어서 다행입니다.
그것은 제가 영어로 말하고 들을 수가 있어서가 아니고 카운티 공립학교 안에 통역을 도와주시는 선생님이 계셨기 때문입니다.
제가 필요할 때 서로 연결되어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고마운지 모르겠습니다.

갑자기 ‘강산이와 강윤이가 없었다면 어떤 삶을 살았을까’ 라는 질문이 노트북 위에 올려져 있는 제 손을 멈추게 합니다.
......
아이들이 없다면 없는 대로 열심히 살았을 것 같습니다^^!

첫째 아이 강산이가 태어난 뒤로 지금까지 아이들 없이 된 일이 하나도 없어 보입니다.
먹고, 자고, 입고, 벌고, 번 것 쓰고, 배우고, 하는 온갖 것이 아이들과 이어져 있습니다.
이곳에서의 생활도 마찬가지구요.

뿐만 아니라 아이들은 하나님을 향한 제 믿음이 제자리에 멈추지 않도록 채근하는 역할도 끊임없이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어머니 같은 마음, 아버지 같은 마음을 느껴도 보고 경험도 하고, 그래서 한결같은 사랑으로 우리를 돕고 계심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게 합니다.
물건을 찾아 마트 안을 헤맬 때에도, 누군가 대신 듣고 말해주어야 할 때에도 말입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에게는 견고한 의뢰가 있나니 그 자녀들에게는 피난처가 있으리라”(잠14: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