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초, 책장을 한바탕 정리했다. 정리 기준은 최근 3년 안에 펼쳐보지 않은 책들이었다. 미련을 두지 않으려 마음을 단단히 먹고 정리하고 보니 그동안 애착을 가졌던 책들 중 절반이 사라져 있었다. 책들이 사라진 자리를 바라보며 책에서 얻은 배움의 조각들이 내 삶 어디인가에 남아 있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이 깊어졌다. 동시에 위안이 되었던 것은 배움을 얻는 수단이 책에만 한정되지 않고 여러 갈래로 존재한다는 사실이었다.
그로부터 다시 일 년이 흘러 또 다른 새해를
맞이했다.
작년 이맘때 있었던 책 정리의 기억이 떠올라서였을까. 남은 책들 가운데 올해 처음으로 내 마음이 가닿는 책은 어떤 것일까, 궁금했다. 그런데 낱권의 책 보다 책장의 풍경이 먼저 보였다. 앞니 빠진 중강새 같았던 책장의 빈자리에는 가족 사진을 넣은 액자들이 죽 늘어서 있다. 책들 사이사이는 널널해서 새로운 책들이 얼마든지 끼어들 여지가 많다. 살짝 어수선해 보이지만 책들이 들고 날 수 있는 변화의 가능성이 보여 그런대로 괜찮다. 예전에는 책장이 빼곡해야 보기 좋다고 여겼는데 이제는 그런 생각에서 조금은 자유로워진 듯하다.
책 제목들을
천천히 훑다가, 최은영 작가의 “쇼코의 미소”에서 시선이 멈췄다. 6년 전쯤 애틀랜타에 사는 지인, N이 우편으로 보내준 책이었다. 그때 N은 모두 4권을 보냈는데 지난해 책 버리기 사건에서 3권이 살아남았음을 알게 되었다. 나머지 한 권도 N이 보낸 책이라는 인식이 있었다면 쓰레기봉투로 들어가지 않았을 텐데,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쇼코의 미소,
책
배에 꽂힌 빨간색 인덱스들이 나를 향해 빠끔히 눈인사를 건넸다. 이미 읽었던 책이지만 내용이 선명하지 않았다. 그래서 새해 첫 독서로 쇼코의 미소를 선택했다. 이 책에는 7편의 단편소설이 들어 있어 한 편씩 읽기에 부담이 없었고 다시 읽으면 어떤 느낌일지 기대가 생겼다.
이 소설은
화자인 ‘나’, 소유의 고등학교
시절부터 청년기까지의 이야기를 다룬다. 그 시기에 누구나 겪을 법한 우정, 사랑, 가족, 꿈, 그리고 질병 같은 소재들이 짜임새 있게 어우러져 있다. 한편, 다른 등장인물들이 여러 세대를 보여주기 때문에 짧은 소설임에도 독자에게 생각할 거리를 꽤 던져준다.
이번에 가장 도드라지게
다가온 소재는 언어와 미소였다. 소유는 고등학교 1학년 때 자매학교 교환학생으로 한국을 방문한 일본인 쇼코를 만난다. 쇼코는 소유의 집에 일주일간 머물며 소유 가족과 교류한다. 두 사람은 서툰 영어로 소통하고, 소유의 할아버지는 예전에 배운 일본어로 쇼코와 자유롭게 대화를 나눈다.
소유와 쇼코가
영어로는 뜻이 통하지 않는 부분이 많았던 반면, 일본어로 대화하는 할아버지와 쇼코는 언어의 장벽 없이 편안히 소통한다. 모국어가 아닌 영어를 통해 원주민과 원활히 소통하고 싶은 나로서는 소유와 쇼코가 느끼는 언어의 한계를 그대로 공감할 수 있었다. 공통언어를 가진 사람들끼리 문화를 공유하고 감정을 섬세하게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지 알기에.
그렇다면 쇼코의
‘미소’를 통해 작가는
관계에서 작동하는 비언어적 요소를 보여주는 것은 아닐까. 이 질문을 품고 읽다 보니 미소나 웃음으로 감정을 표현하는 문장들이 눈에 띄었다. 친절하고 예의 바르지만 차가운 쇼코의 미소나 쇼코와 친구로 지내길 원하는 소유의 할아버지의 커다란 웃음소리 등은 그들 사이에 전개되는 이야기들을 함축적으로 보여주는 장치라는 생각이 든다.
더 나아가,
등장인물들은 힘들어서 웃고, 병들어 속상해서 안간힘을 쓰면서 웃고, 설핏 웃고, 어색하게 웃고, 도저히 웃지 못하기도 한다. 긍정적일 것만 같은 미소와 웃음 속에 질투, 애정, 미움, 질병 등 희로애락을 담아낸다. 웃음이 타인을 이해하는 다양한 감정의 표현 도구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독서를 통해 얄팍하더라도
생각의 지평을 넓히고 글쓰기에도 도움을 받고 싶다. 나의 “쇼코의 미소” 같이 책 자체에도
정이 가고, 여러 번 읽을 때 다른 각도로 글을 보게 되는 오묘함도 경험하고 싶다. 더불어 유난히 올해는 관심 가는 책들의 목록이 점점 길어진다. 책장이 새로운 책으로 다시 채워질지도 모르겠다.
*이 글은 애틀랜타 중앙일보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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