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3/2015

산이 곁에 있는 소리


집에 돌아오기 전 애틀랜타에서 장보는 산이. ^^


남편은 자신이 부목사로 일하던 아틀란타한인교회로 설교를 하러 갔다. 장로님들의 은퇴를 찬하하는 예배라고 들었다. 남편은 애틀랜타에 가기 두 주 전쯤 아들 산이에게 같이 가겠느냐고 물어보았다. 먼 길 오고 가는데 동행이 있으면 덜 피곤하기도 하고, 집에만 있는 아들에게 나들이할 수 있는 기회를 한 번이라도 더 주고 싶어서 그런 것 같기도 하다. 물론 산이는 흔쾌히 가겠다는 표시로 고개를 힘차게 끄덕였다.

산이가 손꼽아 기다리는 애틀랜타에 가기 일 주일 전, 내가 감기에 걸리더니 며칠 뒤에 작은 아이 윤이에게도 옮겨갔다. 산이에게는 감기에 걸리면 애틀랜타도 못 간다고 내 근처에 오지 말라고 했다. 그래도 엄마와 눈이라도 마주치려고 포옹 대신에 엄마 등에 얼굴 한번 비비고, 하이 파이브 대신에 팔을 반으로 접어 팔꿈치라도 부딪친다. 팔꿈치끼리 부딪치는 것은 산이가 가르쳐준 방법이다. 그러면서 엄마를 바라보는 눈빛에는 안쓰러움이 가득 담겨 있다. 우리 가족 중에서 제일 연약할 것 같은 산이가 지독한 이번 감기를 요리조리 따돌리고 애틀랜타 가는데 성공했다.

산이가 집에 없으니 조용하다. 산이 곁에는 늘 소리가 있다. 지가 좋아하는 영화를 틀어놓은 소리, 레고를 조립하느라 조각들 만지작거리는 소리, 찬송가 부르는 소리, 성경 읽는 소리, 그리고 중얼중얼 누군가와 얘기하는 듯한 소리……

애틀랜타 갈까? . / 그래, 가자! / 감기, 절대 안 돼. 알겠지? / . 아빠하고 나하고. / 애틀랜타한인교회 좋아. 김정호 목사님 좋아. / 그래, 가자!”

자신의 일상적인 얘기를 누군가와 미주알고주알 소곤거린다. 표정도 마치 누군가를 바라보듯 다양하게 연출된다. 그만 하라고 지시하지 않으면 한참을 그러고 있기도 한다. 자기 말을 이해하고 들어주는 사람이 많지 않으니 혼자라도 떠드나 싶어 안쓰럽기도 하다가, 보통 사람의 모습은 아니니 그러지 말라고 퉁을 놓기도 한다. 이런 내 생각과는 달리 나의 엄마는 산이의 이런 모습을 보고 그냥 놔두라고 하신다. 말하는 것이 대견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산이를 지켜주는 천사가 있다고 믿고 계시며 천사와 얘기하는 것인지 어떻게 아느냐는 것이다.

그런데 윌리엄 폴 영이 쓴 소설 『갈림길』을 읽고 내 엄마의 말이 어느 정도 맞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은 읽는 동안 무엇을 선택하며 살고 있는지 내 마음은 어떤 상태일지 그려보게 해준다. 책을 삼분의 일쯤 읽었을 때 주인공 토니의 영이 다운증후군을 가지고 있는 캐비에게로 미끄러진다(윌리엄의 표현).

남부럽지 않은 사업가, 토니는 장애인을 사회라는 이름의 저수지에서 비생산적인 배수구 같은 존재, 오직 가족에게만 소중한 존재, 그들이 본질적으로 가치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사회가 포용하는 것이 아니라 진보적 논리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포용하는 것이라고 믿는 사람이었다. 이런 토니가 캐비에게 미끄러져 들어가게 되고 캐비의 눈으로 세상을 보게 된다. 캐비는 자신과 대화해주는 토니를 내 치!!”로 받아들인다. 친구도 없고 사랑할 줄도 모르는 이기적인 토니의 영을 따뜻하게 감싸준다.

사실 이 책은 읽을 책들이 많았다면 더 나중에 읽었을지 말지 할 정도로 내 주의를 그다지 끌지 못했다. 심심해서 읽어준다는 심정으로 이 책을 붙잡았다. 페이지를 꽤 여러 장 넘겼는데도 시큰둥했다. 그러다 캐비가 나오는 부분에 이르자 흥미가 생겼다. 산이와 같이 다운증후군 장애인을 등장시키다니! 다운인에 대한 표현들도 실감나게 되어 있었고, 산이가 혼자 떠드는 것과 아주 비슷한 상황이 그려진 걸 보고 웃음이 나왔다. 토니와 캐비의 이야기는 이 소설의 한 부분이지만 난 어느새 이 책의 구석구석을 세밀하게 살피고 있었다. 이기적인 산이 엄마!

아틀란타한인교회에서 예배를 마치고 하룻밤을 그곳에서 묵기로 한 산이가 전화로 마구 얘기를 쏟아 놓는다.

한국 사람이 많아! / 나중에 같이 올라 오자! / 감기 어때? / 오늘 약이 많이 먹어. , 괜찮을 거야! / 윤이는 뭐 해? / 게임 해. (내 대답) / 괜찮아. 그냥 놔 둬!”

산이의 기분이 좋은 것 같았다. 나도 잠깐 웃어 보았다. 산이의 엉뚱하고 제법 어른스러운 말들이 꽉 막힌 코를 시원하게 뚫어주는 치료제 같았다

2/09/2015

묻어 둔 숙제




조각 하나.

지역 도서관에 자유롭게 수다 떠는(free talking) 반이 있어서 다닌 적이 있었다. 저녁 식사 시간이 지난 오후라 그런지 참여하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오히려 영어가 모국어여서 각각의 그룹을 이끌어 가는 자원봉사자들이 더 많았다. 60대 초반의 백인 부부와 한 그룹이 되었다. 또 다른 참여자가 있기도 했는데 오다가 말다가 하여 내가 수다 떨 수 있는 시간이 더 길어져 좋았다.

대화 상대였던 백인 부부는 아주 꼼꼼해서 틀린 발음들을 잘 고쳐주었다. 특히 아내인 캐시 아줌마는 질문을 하면 간단히 답을 하지 않고 더 많이 가르쳐주려고 했다.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던 중 퀼트를 조금 해 본 적이 있고 관심이 있다고 했다. 캐시 아줌마는 자기가 다니는 교회에 퀼트 모임이 있는데 언제든지 와 보라고 했다. 모임 시간과 교회 위치를 자세히 알려주었다. 교회는 내가 살던 집에서 아주 가까운 곳에 있는 규모가 큰 장로교회였다. 퀼트도 배우고 영어도 더 얻어 들을 수 있는 좋은 기회라 여겨졌다.

퀼트 모임도 평일 오후 시간이었다. 퀼트 하는 방에 이르자 곧 캐시 아줌마가 도착을 했다. 산소 호흡기를 끼고 휠체어에 앉은 할머니로부터 젊은 새댁까지 연령대가 다양했다. 책상을 앞에 두고 넓고 크게 둘러 앉아 내 소개를 했다. 회원 몇 명이 그 즈음에 개인적으로 만들고 있는 작품들도 보여주었다. 그러고 나서는 모임이 끝날 때까지 서너 명씩 가까이 앉은 사람들과 소곤거릴뿐 모임을 주도하는 사람은 없었다.

캐시 아줌마는 그 모임에서 만들었던 작품들을 사진 찍어 모아 놓은 자료집을 보여주었다. 작품의 크기나 만드는 방법이 참으로 다양했다. 완성된 것은 부모 없는 아이들, 환자, 교회에 새로 부임한 부목사 등 사랑과 관심이 필요한 이들에게 전달된 사진도 볼 수 있었다. 모임에서는 완성된 퀼트를 누구에게 줄 것인지, 어떤 모양으로 만들 것인지를 정하면 각자가 블록(조각 천을 붙여 만든 하나의 단위)들을 만들어오고, 누군가 그 블록들을 연결하고, 솜을 넣어 누비고…… 이 모든 것이 자발적으로 이루어지는 것 같았다. 그러니까 이 모임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퀼트를 잘 하는 사람들이고, 모임 시간에 퀼트의 오밀조밀한 방법들을 배우기는 어려워 보였다.

조각 둘.

한 주가 지나 다시 캐시 아줌마와 그 남편을 도서관에서 만났다. 이 날은 이상하게도 캐시 아줌마의 남편과의 대화가 자꾸 막혔다. 시작은 exercise라는 단어였다. 나는 연습문제라는 뜻으로 그 단어를 사용했다(중학교 때부터 영어책에서 수도 없이 봐온 단어이기에). 그랬더니 아저씨는 그 단어의 뜻은 운동이라는 것이었다. 운동도 맞고 연습문제도 맞다고 했더니 어이없어 하는 눈치였다. 그도 그럴 것이 영어를 배우겠다고 온 사람이 아는 체하는 꼴이 된 것이다. 또 무슨 얘기 끝에 Systematic Theology(조직신학)라는 단어를 말하게 되었다. 아저씨는 그런 단어도 있냐며 설명해보라고 했다. 이걸 영어로 설명하다니, 얼마나 버벅거렸는지…… 그리고 퀼트 모임에는 가지 않겠다고 했더니 아저씨는 결국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이었다. 내가 비록 영어도, 퀼트도 서툴지만 아저씨가 나에게 뾰족하게 구는 태도는 영 맘에 들지 않았다.

난 다음 날부터 그 동안 퀼트 하면서 남아있던 자투리 천들을 모두 꺼내, 캐시 아줌마네 교회 퀼트 모임에서 최근에 진행중인 블록과 같은 모양으로 커다란 이불을 만들기 시작했다. 캐시 아줌마의 친절함은 변함이 없었다. 내가 이불 만드는 것을 알고는 이불 뒷감으로 쓸 수 있는, 앞면과 잘 어울릴만한 커다란 천을 주기도 하였다. 솜을 살 때는 퀼팅 도구들을 파는 가게 Joann에도 같이 가 주었다. 캐시 아줌마는 이불 앞면이 완성되는 것까지만 보았다.

5개월에 걸쳐 나의 퀼트 이야기라는 이름을 붙인 이불이 하나 만들어졌다. 천 조각 하나 하나마다 사연이 묻어 있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처럼 저마다 다른 천들의 고유한 재질과 무늬들을 보고 있자면, 그 다양성에 놀랍기도 하고 뭔가 만들어 보고 싶은 마음에 설레기도 한다. 조각들이 이어져 쓸모 있는 무엇이 된 것들은 하나같이 따뜻하고 아름답다. 이불을 만드는 동안 곱고 예쁜 조각천들 덕분에 캐시 아줌마 남편의 뾰로통한 인상도 많이 희미해졌다. 어떤 이유로 시작했건 커다란 이불 하나를 만들고 나니 뿌듯했다. 이것은 큰 아들에게 먼저 주기로 했다.






조각 셋, .

작은 아이는 자기 것도 만들어 달라고 했다. 이왕 천들을 손에 잡은 김에 하나 더 만들기로 했다. 작은 아이가 대학 가서도 엄마와 가족을 기억할 수 있도록 하자는 동기를 팍팍 부여하고 시작했다. 새로운 모양의 블록으로 열심히 만들었다. 하지만 대학가는 일이 코앞에 닥친 일도 아니고 다른 관심사가 생기는 바람에 그만둔 지 2년이 넘었다.

남편이 한국에 갔을 때 친구가 가진 천으로 만든 가방을 보고 부러워했다. 그 친구의 아내는 퀼트를 아주 잘 하는 이여서 자기 남편의 가방을 손수 만들어 준 것이었다. 친구의 아내와도 잘 아는 남편은 자기도 하나 만들어 달라고 염치없이 부탁했다. 그 아내는 내 남편의 빠듯한 출국 일정에 맞추어 엄청 멋진 가방을 선물해 주었다. 남편은 이 가방만 들고 다닌다. 작은 아이는 아빠의 퀼트 가방을 이른바 명품보다 더 가치 있는 것으로 여긴다. 관심과 사랑이 담긴, 세상에 하나뿐인 가방이기 때문이란다.

이젠 묻어둔 숙제를 꺼낼 때가 되었다. 작은 아이가 대학갈 날이 몇 개월 후면 다가오기 때문이다. 요즘 들어 자기 이불은 언제 만들거냐고 숙제를 자꾸 상기시킨다. 집을 떠나면서 엄마의 애정 어린 기도와 손길이 담긴 물건을 곁에 두고 싶어하는 아이의 갸륵한 마음을 생각해서라도 어서 서둘러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