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 돌아오기 전 애틀랜타에서 장보는 산이. ^^ |
남편은 자신이 부목사로 일하던 아틀란타한인교회로 설교를 하러 갔다. 장로님들의 은퇴를
찬하하는 예배라고 들었다. 남편은 애틀랜타에 가기 두 주 전쯤 아들 산이에게 같이 가겠느냐고 물어보았다. 먼 길 오고 가는데 동행이 있으면 덜 피곤하기도 하고, 집에만 있는
아들에게 나들이할 수 있는 기회를 한 번이라도 더 주고 싶어서 그런 것 같기도 하다. 물론 산이는 흔쾌히
가겠다는 표시로 고개를 힘차게 끄덕였다.
산이가 손꼽아 기다리는 애틀랜타에 가기 일 주일 전, 내가 감기에 걸리더니 며칠 뒤에
작은 아이 윤이에게도 옮겨갔다. 산이에게는 감기에 걸리면 애틀랜타도 못 간다고 내 근처에 오지 말라고
했다. 그래도 엄마와 눈이라도 마주치려고 포옹 대신에 엄마 등에 얼굴 한번 비비고, 하이 파이브 대신에 팔을 반으로 접어 팔꿈치라도 부딪친다. 팔꿈치끼리
부딪치는 것은 산이가 가르쳐준 방법이다. 그러면서 엄마를 바라보는 눈빛에는 안쓰러움이 가득 담겨 있다. 우리 가족 중에서 제일 연약할 것 같은 산이가 지독한 이번 감기를 요리조리 따돌리고 애틀랜타 가는데 성공했다.
산이가 집에 없으니 조용하다. 산이 곁에는 늘 소리가 있다. 지가 좋아하는 영화를 틀어놓은 소리, 레고를 조립하느라 조각들 만지작거리는
소리, 찬송가 부르는 소리, 성경 읽는 소리, 그리고 중얼중얼 누군가와 얘기하는 듯한 소리……
“애틀랜타 갈까? 음. / 그래, 가자! / 감기, 절대 안 돼. 알겠지? / 음. 아빠하고 나하고. / 애틀랜타한인교회 좋아. 김정호 목사님 좋아. / 그래, 가자!”
자신의 일상적인 얘기를 누군가와 미주알고주알 소곤거린다. 표정도 마치 누군가를 바라보듯
다양하게 연출된다. 그만 하라고 지시하지 않으면 한참을 그러고 있기도 한다. 자기 말을 이해하고 들어주는 사람이 많지 않으니 혼자라도 떠드나 싶어 안쓰럽기도 하다가, 보통 사람의 모습은 아니니 그러지 말라고 퉁을 놓기도 한다. 이런
내 생각과는 달리 나의 엄마는 산이의 이런 모습을 보고 그냥 놔두라고 하신다. 말하는 것이 대견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산이를 지켜주는 천사가 있다고 믿고 계시며 천사와 얘기하는 것인지 어떻게 아느냐는 것이다.
그런데 윌리엄 폴 영이 쓴 소설 『갈림길』을 읽고 내 엄마의 말이 어느 정도 맞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은 읽는 동안 무엇을 선택하며 살고 있는지 내 마음은 어떤 상태일지 그려보게 해준다. 책을 삼분의 일쯤 읽었을 때 주인공 토니의 영이 다운증후군을 가지고 있는 캐비에게로 미끄러진다(윌리엄의 표현).
남부럽지 않은 사업가, 토니는 장애인을 “사회라는
이름의 저수지에서 비생산적인 배수구 같은 존재, 오직 가족에게만 소중한 존재, 그들이 본질적으로 가치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사회가 포용하는 것이 아니라 진보적 논리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포용하는 것”이라고 믿는 사람이었다. 이런 토니가 캐비에게
미끄러져 들어가게 되고 캐비의 눈으로 세상을 보게 된다. 캐비는 자신과 대화해주는 토니를 “내 치!구!”로 받아들인다. 친구도 없고 사랑할 줄도 모르는 이기적인 토니의 영을 따뜻하게 감싸준다.
사실 이 책은 읽을 책들이 많았다면 더 나중에 읽었을지 말지 할 정도로 내 주의를 그다지 끌지 못했다. 심심해서 읽어준다는 심정으로 이 책을 붙잡았다. 페이지를 꽤 여러
장 넘겼는데도 시큰둥했다. 그러다 캐비가 나오는 부분에 이르자 흥미가 생겼다. 산이와 같이 다운증후군 장애인을 등장시키다니! 다운인에 대한 표현들도
실감나게 되어 있었고, 산이가 혼자 떠드는 것과 아주 비슷한 상황이 그려진 걸 보고 웃음이 나왔다. 토니와 캐비의 이야기는 이 소설의 한 부분이지만 난 어느새 이 책의 구석구석을 세밀하게 살피고 있었다. 이기적인 산이 엄마!
아틀란타한인교회에서 예배를 마치고 하룻밤을 그곳에서 묵기로 한 산이가 전화로 마구 얘기를 쏟아 놓는다.
“한국 사람이 많아! / 나중에 같이 올라
오자! / 감기 어때? / 오늘 약이 많이 먹어. 아, 괜찮을 거야! / 윤이는
뭐 해? / 게임 해. (내 대답) / 괜찮아. 그냥 놔 둬!”
산이의 기분이 좋은 것 같았다. 나도 잠깐 웃어 보았다.
산이의 엉뚱하고 제법 어른스러운 말들이 꽉 막힌 코를 시원하게 뚫어주는 치료제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