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화장품을 놀잇감 삼아 놀았던(으~~~) 산과 윤이. |
둘째 아들 윤이가 싸놓은 도시락을 챙겨 학교에 가기 위해 주방 쪽으로 온다. 그러면 나는 가방 앞 쪽에 도시락을 편안하게 자리잡아 넣는 아이를 옆에 서서 지켜본다. 아이는 가방의 지퍼를 밀어 잠그고 나를 향해 돌아선다.
“엄마,
나 갔다 올게.”
“그래,
잘 갔다 와~.”
우리는 서로 꼭 끌어안는다. 그리고 이어서
나 보다 키가 훨씬 큰 윤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거나 뺨을 어루만져 주며 한 마디 빼놓지 않고 덧붙인다.
“축복합니다.”
나는 엄마로서 윤이에게 아주 미안한 몇 가지 잊지 못할 일들을 가지고 있다. 첫 번째는 윤이가 새로운 생명으로 우리에게 찾아왔을 때이다. 첫째
아이 강산이를 얻은 이후로 임신이 되었을 때 마냥 기뻐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다. 강산이의 다운증후군
장애를 검사했던 병원에서 다음 아이를 갖게 되어도 검사를 받는 것이 좋다고 했기 때문이다. 우리 부부는
아이를 임신한 사실을 주변 사람들은 물론 가족에게조차 알리지 않고 조용히 검사를 받았다(왜 하나님을
믿는 신앙인이 이런 태도로 새로운 생명을 맞이했는지 제발 묻지 말아달라. 겨우 감추고 사는, 그래도 잘 감추어지지 않지만, 나의 어리석음과 부족함을 적나라하게
드러낼 용기가 아직은 없다). 검사 결과, 정말 정말 감사하게도
건강한 아이였다. 하지만 검사 결과가 나오기 까지 임신 기간의 절반은 걱정 속에서 보내야만 했다. 태아가 가장 잘 느끼는 감정이 두려움이라는데 윤이가 의식하지 못한다 해도 두려움 속에서 그의 삶을 시작한 것이다. 무엇으로도 갚을 길이 없는 미안함이다.
두 번째는 아이들을 더욱 안전하게 지켜주지 못한 것이다. 서울에서 살 때의 일이다. 한 전셋집에서 다른 전셋집으로 이사를
가기 위해 짐을 싸고 있었다. 이사 비용을 아끼기 위해 이삿짐 센터에 맡기지 않고 남편과 둘이서 살림살이를
정리하고 있었다. 미리미리 조금씩 짐을 싸두었다 해도 이사 전 날에 싸야 할 짐이 제일 많았다. 우리 부부는 짐 싸는데 온통 정신을 쏟고 있었고, 아이들은 현관
앞에 있는 정말 손바닥만한 화단에서 흙 장난을 하고 있었다. 그 화단은 창고 건물 지붕에 꾸며져 있던
것인데, 우리가 살던 2층집 현관과 창고 지붕이 연결되어
생긴 아주 조그만 공간이었다. 아무런 안전 장치도 없는 그 좁은 공간에서 아이들이 놀도록 방치한 것이다.
짐을 싸다가 뭔가 싸한 느낌이 들었다. 밖에
나가보니 윤이는 계단 10 개 정도의 높이인 창고 지붕에서 아래로 떨어져 있었다(십 몇 년 전 일인데 여기에 사실을 밝혔다고 경찰에 잡혀가지는 않겠지?). 두
살 반 밖에 되지 않은 작은 아이가 콘크리트 바닥에 누워 있는 것이 보였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고
모든 것이 정지되어 있는 것 같은 그 때의 적막한 느낌이란…… 다시는 느껴보고 싶지 않은 분위기다. 한 쪽 팔꿈치 아래에서부터 손목까지 깁스하고 몇 개월 치료하는 것으로 그 사건은 지나갔다. 하지만 지금도 윤이가 몸 어디가 불편하다고 하면 지붕에서 떨어진 일과 자꾸 연결시켜 생각하게 된다. 미안한 마음이 언제나 가실 지 모르겠다.
엄마 노릇을 제대로 못한 것이 이 밖에도 많으나 마지막으로 미안한 마음이 큰 일은
윤이가 어릴 적에 너무 엄하게 대한 것이다. 예절까지는 아니더라도 내가 아는 상식에 어긋나는 행동은
늘 지적당하고 바로 잡아져야 했다. 목회자 가정이다 보니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자리에 가는 경우도 많았고
공동육아 하면서 친구들과도 어울릴 때가 많았는데, 사람이 많은 곳에서건 그렇지 않은 곳에서건 어리광이나
칭얼거림을 잘 받아주지 못했고 단호했다. 교육에 일관성이 있어야 된다는 명분 아래 상이든 벌이든 “~하면 ~ 한다” 고 말했으면
그대로 지키려고 애썼다. 고지식하여 융통성 없는 나의 성향 대로 아이를 키운 것이다.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넓은 공간에서
옷을 비롯하여 여러 가지 생활용품을 일정 기간 동안만 팔고 없어지는 세일 행사장이 빈번히 열리던 때였다. 집에서
자동차로 10 여분 떨어진 곳에 그런 행사장이 열렸다는 소식을 듣고 젊은 교인들과 그들의 아이들과 함께
쇼핑을 갔다. 장난과 호기심도 많아지고 이리저리 잘 뛰어다니던 6 살쯤
된 윤이도 함께 있었다. 행사장이 복잡하고 사람도 많았기 때문에 그 입구에서 윤이에게 주의를 주었다. 주의의 내용은 “엄마를 잘 따라 다녀라, 딴 짓 하다가 엄마 놓치면 그냥 두고 간다”, 정도 되었던 것 같다. 이것은 엄포를 놓으려고 흔히 말하는 관용어구 같은 것이었다.
행사장 안으로 들어가 둘러보길 잠깐의 시간이 흘렀는데 윤이가 보이지 않았다. 온 길을 되짚어 행사장 밖에 까지 나왔으나 윤이는 보이지 않았다. 같이
간 교인들도 이리저리 흩어져 찾아 다녔다. 행사장 안 있던 곳까지 다시 들어갔다가 또 밖으로 나왔다. 그런데 하얀색 승용차가 그 복잡한 틈으로 들어오더니 윤이를 내려놓는 것이었다.
윤이는 편안한 얼굴이었다. 운전석에 앉아 있는 사람은 중년의 여성이었는데 자동차 뒷좌석에
백화점 쇼핑 가방이 여러 개 있었고 옷 차림새로 보아 잘 사는 사람처럼 보였다.
“아이의 말을 들어보니 여기 계실 것 같아
다시 데리고 왔습니다.”
난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잘 알지도 못하면서 고맙습니다, 만 여러 번 말하고 있었고, 그 여성은 휭하니 그 자리를 떠났다. 쇼핑이고 뭐고 다 집어치우고 윤이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왔다.
윤이는 행사장에 들어서자 마자 잠깐 한눈파는 사이에 엄마와 일행을 잃어버린 것이다. 엄마를 놓치면 두고 간다고 했으니 엄마는 저를 두고 가버렸다고 생각한 것이다.
윤이는 밖으로 나와 주차장에서 울고 있는데 어느 아주머니가 울고 있는 이유를 물었다고 한다. 윤이는
엄마가 자기를 두고 집에 갔다라고 설명을 했고, 우리 교회 있는데 까지 데려다 주시면 집을 찾아갈 수
있다고 했단다. 아주머니는 기꺼이 윤이를 승용차에 태워주었고, 윤이는
차 안에서 아주머니의 핸드폰으로 나와 지 아빠와 교회에 전화를 했으나 통화가 안 되었다. 교회 십자가
탑이 보이는 곳에 다다랐는데 그제서야 엄마인 나와 아주머니가 통화가 되었고, 아주머니는 다시 세일 행사장으로
돌아온 것이다(이것은 윤이의 증언(!)에 따른 것이다. 그 아주머니와 통화한 기억이 사실은 없다. 정신이 없긴 했나 보다). 가슴 철렁하고 어이없고 황당한 이 일을 윤이는 대단한 일을 해낸 모험담처럼 떠들었다. 윤이가 엄마를 원망하지 않고 그 정도로 기억해주어 고맙다. 정말
아찔하고 미안한 일이다.
이런 일들은 잊혀지지 않고 종종 윤이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게 했다. 무엇이 계기가 되었는지 기억은 나지 않는데, 어느 날 아침 잠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윤이를 더욱 따뜻하게 보듬어야겠다는 마음이 진하게 들었다. 오늘 실행하지 않으면 안 될 같은
절박한 마음도 들었다. 그 날부터 등교하는 윤이와 포옹이 시작되었다.
일 년이 조금 넘은 것 같다.
“윤아,
오늘부터 엄마랑 허그 하고 학교에 가자.”
윤이는 선뜻 그러자, 고 하고 꼬옥 안았으나
서로 어색했다. 윤이는 나를 껴안는 팔의 힘 조절을 어떻게 할 지 몰라 했다. 팔을 내 등에 얹는 듯 마는 듯 하길래 성의 없이 이게 뭐야, 했다. 그랬더니 다음 날은 어찌나 세게 껴안는지 내 가슴이 터지는 줄 알았다. 나는
또 피드백을 해 주었다. 그것도 반복되는 훈련 같아서 익숙해지고 자연스러워졌다. 그리고 이제는 엄마와 포옹하고 나서 학교 가려고 윤이는 나를 기다리기도 한다.
축복의 말도 꼭 듣고 싶어하는 것 같다.
“윤아,
엄마는 네게 줄 복을 갖고 있지 않아. 엄마가 축복합니다~,
라고 말하는 것은 그 말 앞에 예수님의 이름으로, 가 생략된 거야.”
“나도 알아!”
알고 있다니 고마운 일이다. 포옹하고
나서 자동차에 오르고, 차고의 문이 열리고, 자동차가 차고를
빠져 나가고, 다시 차고 문이 닫히기 까지 윤이를 바라보며 기도한다.
축복합니다~, 뒤에 생략된 기도도 이 기회에 윤에게 들려주고 싶다.
“주님,
윤이가 만나는 선생님과 친구들의 관계 속에 늘 함께 있어주세요. 학교에서 배우는 모든 지식이
하나님을 알아가는 지혜가 되게 해 주세요. 세상과 사람을 위해 사랑으로 헌신하여 하나님 나라를 위해
일하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게 해 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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