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2014의 게시물 표시

작은 화분 속의 기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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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뜰 쪽으로 난 창문 아래에 좁고 길쭉한 꽃밭이 있다. 꽃 몇 뿌리만 심으면 꽉 차는 조그마한 공간이다. 그래도 아침에 블라인드를 열었을 때 고운 빛깔로 웃음을 건네는 몇 송이 꽃들을 보면 기분이 좋아진다.
꽃밭의 한쪽은 백합이 심겨져 있다. 부활주일 강단을 장식했던 백합 화분들에서 나의 꽃밭으로 이사온 녀석들이다. 백합의 알뿌리는 번식력이 좋은지 해가 지날수록 봄이면 올라오는 꽃줄기가 늘어나고 있다. 나머지 공간에는 메리골드, 빈카 따위를 심었었다. 이런 한해살이 꽃은 해마다 내가 원하는 대로 여러 종류의 꽃들을 심어볼 수 있는 장점이 있다. 그러다가 올해는 여러해살이 식물에 마음이 더 가길래 제라늄과 데이릴리를 두 뿌리씩 심어보았다.
물만 줄뿐인데 제라늄은 빨간색 꽃을 연이어 피우고 있다. 키우기 쉬운 식물이지 싶다.  제라늄에 대한 자료를 찾아보니 생각 밖으로 이 꽃을 키우는 사람들이 많았다. 종류도 색깔도 다양했다. 잎에 독특한 향이 있어서 모기가 오는 것을 막아주기도 한단다. 또 가지를 잘라 심어놓으면 어느새 한 그루의 제라늄으로 성장한다고 한다. 꽃이 많이 피는 제라늄과는 달리 데이릴리는 서너 주가 지나도 처음 심어놓았을 때와 별다른 차이 없이 가느다란 초록 잎만 보여주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물을 주러 나갔는데 데이릴리에 민달팽이들이 여러 마리가 달라붙어 있었다. 제라늄이나 백합 쪽에서는 민달팽이를 찾아볼 수 없는데 바로 옆에 있는 데이릴리의 이파리에서는 꿈틀대고 있었다. 민달팽이를 키우는 사람들은 어떨지 몰라도 난 그것들이 징그럽고 싫었다. 하루 이틀 두고 보니 이파리들을 갉아먹을 뿐 아니라 고놈들이 지나간 자리마다 이파리가 노랗게 죽어갔다. 괘씸하기 짝이 없었다.
벌레나 곤충들을 별로 안 좋아하기에 남편에게 민달팽이를 처리해 달라고 했다. 그랬더니 걔네들도 먹고 살자고 하는 짓인데 그냥 두라는 것이다. 점점 그 숫자가 늘어나서 집 벽에도 덕지덕지 붙어 기어 다녔다. 두고 볼 일이 아니었다. 퇴치법을 찾아보니 맥주에 담배 가루를 뿌려…

지나친 슬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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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텔레비전에서 성탄 특집으로 샴쌍둥이를 분리하는 수술 과정을 다큐멘터리로 방송한 적이 있다. 그 방송을 보면서 어느 순간부터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기 시작했다. 두 아이가 각자의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수술이면서도 생명이 위협받을 수 있는 위험한 수술이었다. 수술이 진행되는 것을 지켜보는 동안 조용한 울음도 계속되었다. 해맑은 아이들이 수술 후에 힘들어 하는 모습을 보면서 안타까운 감정은 점점 짙어졌다.
수술 후 3일이 지나 쌍둥이 가운데 한 아이는 짧은 생을 마감했다. 그쯤에서는 내 목구멍이 조여오는 아픔을 느꼈고 숨을 쉴 수 없었다. 숨을 쉬려고 해도 몸이 맘처럼 따라 주지 않았다. 목줄이 끊어지는 듯한 고통을 얼마간 견디다가 다시 숨이 돌아와 살았다. 울다가 죽을 수도 있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때는 첫째 아이를 임신 중이었다. 다음 해에 아이가 태어났고 장애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방송을 볼 때는 내 아이가 장애아일줄 꿈에도 몰랐는데 뭐가 그렇게도 슬펐는지 죽을 만큼 울었었다.
아이가 태어나고 몇 달 뒤, 극장에서 영화 “서편제”를 보게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본 이 영화의 줄거리를 짧게 정리해 보면 이렇다. 소리꾼인 유봉은 금산댁을 만나 새로운 생활을 시작한다. 유봉에게는 양딸인 송화가 있고, 금산댁에게는 아들 동호가 있다. 금산댁이 유봉의 아이를 낳다가 죽게 된다. 유봉은 송화에게는 소리를 가르치고 동호에게는 북 치는 것을 배우게 한다. 소리가 사람들로부터 멸시를 받던 시절이라 세 사람의 삶은 퍽퍽하기만 하다. 동호는 이러한 생활을 견디다 못해 유봉과 송화의 곁을 떠난다.
유봉은 소리란 한(恨)에 사무쳐야 제대로 나온다고 여기고 송화에게 약을 먹여 눈을 멀게 한다. 앞을 보지 못하는 송화를 남겨두고 유봉은 세상을 뜬다. 그렇게 송화와 동호는 각자의 삶을 살다가 어느 주막에서 다시 만나게 된다. 송화는 소리를 하고 동호는 북을 치게 되는데, 앞을 못 보는 송화는 북소리만으로 동호임을 짐작한다.
이 오누…

전문가와 비전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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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한국 여행 갔을 때 지난 해 돌아가신 아버님께서 타시던 자동차가 아직 있어서 편안하게 다닐 수가 있었다. 집에서 먼 곳으로 외출할 경우는 버스와 지하철을 주로 이용하고 집에서 한 시간 이내의 거리에 있는 곳은 자가용으로 이동했다.
그날도 친구를 만나기 위해 고속도로 위를 달리고 있었다. 새로 생긴 고속도로라 교통량도 많지 않고, 무엇보다 복잡한 시내를 거치지 않고 갈 수 있는 길이라 한국에 머무르는 동안 자주 이용하곤 했다. 터널이 여러 개 연속해서 나오는 구간을 지나가고 있었다. 같은 차선에서 빠르게 저만치 앞서 달리던 자동차의 빨간 브레이크 등이 선명하게 보였다. 무슨 일인가 싶어 내 차의 속도도 줄이면서 옆 차선을 보니 다른 자동차들은 쌩쌩 달리고 있었다.
뭐지? 차선을 잘못 선택했나 보군, 생각하는 순간 자동차 범퍼 보다는 작은 크기의 디귿 자 모양을 가진 물체가 내 차 앞에 뚝 떨어졌다. 내가 탄 자동차의 왼쪽은 터널 벽이고 옆 차선에는 자동차들이 빠르게 달리고 있었으므로 그 물체를 밟고 지나갈 수 밖에 없다고 순간적으로 판단했다. 오른쪽 앞 바퀴가 그 물체를 타고 넘는 것을 느끼면서 앞으로 나아갔다. 찜찜한 기분이 들었고 운전하는 내내 계기판 어딘가에 주황색의 경고 등이 혹시라도 들어오는 지 신경을 써야 했다.
다행히도 친구를 만나고 돌아오는 동안 자동차에는 아무 문제가 없었다. 그런데 이 소심한 인간은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 문제가 있다가 자동차가 달리는 도중에 탈이 날까 봐 은근히 걱정이 되었다. 그래서 운전이나 조심스럽게 할 줄 알았지 자동차 구조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하나도 없으면서 쪼그리고 앉아 자동차 밑면을 들여다 보았다. 헉! 자동차 아래로 액체가 똑똑 떨어지고 있었다. 에어컨디션을 사용했으니 물이 떨어질 수도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겁이 덜컥 났다.
자동차 수리나 검사를 하는 카센터를 운영하는 P 집사한테 득달같이 전화를 했다(미국에서라면 남편에게 전화 했어야만 했을 것이다. 그런데 친분이 있는 전문가에게 문제 상황에 …

청년 시절과는 다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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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적에는 내가 노래를 꽤 잘 부르는 줄 알았다. 이미 다섯 살 즈음에 대중가요의 제목만 대면 노래를 줄줄이 불러댔다고 친지 어르신들은 두고두고 얘기해 주셨다. 또 내 세상의 삼분의 일-가정, 학교, 교회가 내 세상의 전부였다-을 차지하는 교회에서 찬송 부르기 대회를 하면 상을 제법 받곤 하였다. 중, 고등부 시절에는 이웃 교회와 연합으로 찬송 부르기 대회를 해도 상 받는 자리에 한번씩 불려 나가곤 했다. 교회에 나오는 아이들을 격려하는 차원에서 상을 두루두루 나눠 주었다 해도, 스스로 노래를 잘 하는 줄 착각할 만큼 격려를 많이 받았다. 
그러다 좀 더 넓은 세상을 경험할 수 있는 대학에 들어가서는 누가 보아도 노래 잘하는 사람들을 많이 보게 되면서 내 노래 실력도 가늠할 수 있게 되었다. 음역도 엄청 좁고, 음정과 가락을 익히는 데도 많은 시간이 걸리고, 무엇보다도 노래 부르는 것을 즐기는 편이 아닌 사람이란 걸 발견하게 되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노래 부르는 실력이 별로 없다는 걸 알아갈 청년 시절에 교회 성가대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노래는 좀 못 불러도 주일 예배에 빠지지 않는 청년이었기에 성가대 자리라도 채우라고 성가대원을 시켜준 것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 후로 성가대에 참여하지 못하다가 지금 다니는 교회의 성가대를 4 년째 하고 있다. 와우! 지금도 여전히 노래를 잘 부르지 못하나 성가대에 참여하는 태도는 청년 시절과 달라진 것이 몇 가지 있다.
첫째는 노력을 조금 더 한다는 것이다. 다같이 연습하는 시간에 음정을 다 익히지 못하니 집에 악보를 가져와서 한두 번이라도 연습을 더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음정이 불안한 곳에서는 붕어 같이 입만 벙긋거려야 하기 때문이다(지휘자나 성가대를 바라보는 교인들도 이 사실을 눈치채고 있는 지 늘 궁금하다. 그래도 물어볼 수는 없다. 만일 그들이 알고 있다고 대답한다면 난 더 이상 성가대에 설 수 없을 것 같다).
두 번째, 가사를 음미할 수 있는 마음이 생겼다는 것이 청년 때와는 달라진 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