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8/2014

Sweet Music Man





쌀쌀하면서도 신선한 바람이 불었다. 하늘은 옅은 파란색이었고, 햇볕은 서해의 탁한 바닷물 위로 맑게 내리비추고 있었다. 설레는 하루가 시작되기에 괜찮은 날씨였다.

바다 쪽을 바라보고 길게 자리잡은 횟집과 카페들도 장사를 시작하려고 준비하고 있었다. 아침 시간이라 손님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그날은 요즘처럼 화려한 월미도가 되기 훨씬 전이었다. 1980년대 초반이었나……

H와 만났다. 알게 된지 얼마 되지 않아 어색했다. 서로 별 말 없이 잔잔하게 밀려오는 파도만 힐끔거리며 걷고 있었다. 카페들이 많은 거리의 중간쯤에 이르러 H는 발걸음을 멈추었다. 무슨 말인가 몇 마디 주고 받은 것 같다.

어디선가 음악이 흘러 나왔다. 우리가 서 있는 바로 앞의 카페에서 음악을 거리 쪽으로 틀어놓은 모양이었다.

“sing a song sweet music man~”
, 이 곡은……”

H는 그냥 웃었다.

H는 팝송을 많이 알고 있었다. H는 팝송 중에서 10 여 곡을 선정하여 녹음 테이프에 담아 나에게 선물을 했었다. 지금 들어도 멋지고 낭만적인 옛 팝송들이다. 그 중 첫 번째 곡이 Kenny Rogers“Sweet Music Man”이었다. 그런데 그 노래가 우리가 우연히 멈춰선 그 곳에서 시작되고 있었다.

고등학교 시절, 참으로 오묘하고 풋풋해서 잊을 수 없는 기억들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H와는 가끔 만났어도 오랫동안 편안한 친구로 지냈다. 만나면서 알게 된 것이 여럿 있다. H는 인천 출신 밴드 들국화의 사무실을 들락거리며 밴드 형님들과 알고 지냈다. 자신의 꿈은 배를 직접 만들어 세계여행 하는 것이라고 하더니 대학도 조선공학과에 입학했다. 어느 날 송도 어디로 초대를 해서 가보았더니 요트 클럽을 오픈 하는 자리였다. 그 클럽은 각자 소유의 요트가 있는 사람이 회원이었을 것이다. 배를 만들면 나도 태워달라고 했는데, 나와는 다른 세상에 살던 H는 요즘 어떻게 지내는지 문득 궁금하다.

월미도 카페에도 아는 형님이 있다고 했던가? 그럼 월미도에서의  “Sweet Music Man”은 요즘 말로 H의이벤트였나, 재미있는 상상을 해본다.

우리 교회와 사귄 지 꽉 찬 삼 년이다.  우리는 서로를 향해 성큼성큼 다가가기 보다는  마음의 자리를 아주 조심스럽게 조금씩 내어주고 있다. 우린 둘 다 참으로 소심한가 보다. 사람 관계에서 겪었던 상처가 많아서 그런가...... 그래도 정성껏, 천천히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 우리의 만남 속에 오래도록 기분 좋게 기억될 이야기들이 많기를 바란다. 두고 두고 얘기해도 빛바래지 않는 신기하고 아름다운 이야기들 말이다

2/21/2014

힘이 되는 사이




친구들을 만나기 위해 버지니아 주를 향하여 내달렸다. 지난 주에 내린 눈 때문에 도로 사정이 좋지 않으면 어쩌나 했는데, 이곳에서 버지니아 주 북쪽에 이를 때까지 고속도로에는 아무 문제가 없었다. 친구네 집 가까이 가서야 길가로 밀어내어 쌓아놓은 두꺼운 눈 더미를 볼 수 있었다.

자동차로 장거리 여행을 나서면 운전은 거의 남편이 맡는다. 조수석에 앉은 나는 남편에게 말도 걸어주고, 먹을 거리도 챙겨주고, 피곤해진 남편의 등도 두드려준다. 그리고 졸릴 때는 별 수 없이 잔다. 운전하고 있는 사람에게 미안한 마음이지만 눈꺼풀을 내리누르는 잠을 이겨낼 재간이 없다. 남편을 두고 편안한 마음은 아니더라도, 어쨌든 잠을 콜콜 자는 나를 남편은 때론 얄미워하기도 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남편의 태도가 달라졌다.

피곤하면 먼저 자. 의자도 뒤로 더 젖히고.”

남편이 부드러워지고 상냥해졌다. 중년 남성의 호르몬 변화 때문이든 책이나 드라마 따위를 통해 여성을 이해하는 폭이 넓어진 까닭이든 괜찮은 변화다. 남편은 다음 말을 잇는다.

그리고 운전 교대하자.”
“……”

오랜 시간 여행을 하자면 으레 번갈아 가며 운전을 해야 덜 피곤하리라. 그런 당연하면서도 친절한 말을 듣고 더 푹 잘 수 있을 텐데 이상하게도 잠이 달아나고 만다. 운전하랴 아내 챙기랴 바쁜 남편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어서 그런지, 자고 나서 운전을 교대하기 싫어서 그런지 모르겠다(난 운전하는 것을 즐기는 편이 아니다. 그저 필요에 따라 한다). 사실 둘이 번갈아 운전을 한 적은 몇 번 되지 않는다. 휴게소에서 잠시 쉬고 나면 남편이 다시 운전대를 잡는다. 난 그저 웃음 한 번으로 미안함을 때우고 만다.

이번 여행에서 남편은 7시간을 혼자 운전했다. 나에게 운전을 부탁하지도 않았다. 휴게소에서도 짧게 쉬었다. 저녁도 간단한 음식으로 달리는 자동차 안에서 해결했다. 나도 왠지 잠이 오지 않았다. 우리는 친구들을 만나러 가는 내내 수다도 엄청 떨었다. 친구들에게 점점 가까워질수록 정신은 맑아지고 피곤한 기색을 찾을 수가 없었다. 친구들을 조금이라도 빨리 만나고 싶은 마음 때문이었을까?

친구들은 대학교 다닐 때부터 사귐이 있던 이들이다. 서로 이름을 부르기도 하고, 언니나 오빠로 부르기도 한다. 어느 날 나보다 선배인 오빠가 내 이름을 불렀다. 옆에 계시던 한참 선배이신 분이 이젠 다른 사람의 아내인데 이름을 부르는 것은 좀 그렇잖아!” 하셨다. 그때는 딱히 틀린 말씀도 아닌 것 같아 어찌 불러야 할지 몰라 어색해졌다. 하지만 우리는 다시 자연스럽게 이름을 부르는 사이가 되었다. 어르신들 앞에서는 조심하면 될 터이고. 그래서 우리 아이들도 촌수에는 맞지 않지만 이모나 삼촌으로 부른다. 아이들도 버지니아 주에 사는 삼촌네 가는 걸 좋아한다.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것 같지는 않다. 그냥 편한가 보다(이것이 정말 특별한 이유다).

첫째 아이는 이 삼촌네가 좋은 이유가 하나 더 있기는 하다. 삼촌 집에 놀러 갔을 때 두어 번 방문했던 워싱턴 D.C. 때문이다. TV나 영화에서 워싱턴 D.C.가 나오면 첫째 아이는 꼭 이 도시 이름을 외치며 즐거워한다. 언젠가 아이가 나에게 말했다.

엄마, 버스 드라이버 있잖아~ 이름이 뭔지 알아?”
엄마는 모르지. 이름이 뭔데?”
워싱턴 D.C.”

요즘엔 아이들이 학교 버스를 타지 않기에 운전하는 분의 이름을 모른다. 그리고 아이를 데리러 학교에 가면 특수학급 학생들을 위한 버스 운전 기사도 여러 분이 계시고, 아이들이 버스에 타는지 부모의 차에 타는지 확인하는 분도 계신다. 아마도 그 분들 가운데 워싱턴이라는 이름을 가진 분이 있는가 보다. 첫째 아이에게 워싱턴이라는 단어는 워싱턴 D.C.”여야 맞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워싱턴 D.C.에 대한 남다른 기억을 갖고 있는 아이들을 위해 이번 여행에서도 그 곳을 방문했다.

친구들을 만나 밥을 같이 먹으며 그 동안 지내온 이야기들을 풀어 놓는다. 누군가 얘기하면 거기에 자신의 생각을 덧붙이기도 하지만 대부분 들어주고 인정해준다. 서로 잘 되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으로 말이다. 또 한국과 미국을 오고 가며 나라를 사랑하는 뜨거운 마음을, 또는 안타까운 마음을 쏟아 놓는다. 서로 사귀어 온 30년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우리들의 이야기는 해도 해도 끝이 없다. 그나마 이야기를 마무리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은 시간이다. 각자의 삶의 자리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 정해져 있기 때문이다.

우리 가족은 친구들과 아쉬운 인사를 나누고 집으로 돌아오기 위해 길을 나섰다. 친구들이 사는 동네는 한인들이 많이 거주하는 곳이다. 큰 한인 사회가 있는 도시의 극장에서는 한국 영화를 상영하기도 한다. 친구들이 사는 동네를 벗어나기 전에 친구들은 이미 보았다던 한국 영화 변호인을 보았다. 친구들은 눈물이 났다고 했던가, 가슴이 먹먹하다고 했던가…… 

       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만날 사람도 없건만 굳이 눈 화장을 했다. 울음이 나면 눈에 화장한 것이 번지는 것을 핑계로 참아 보려고 말이다. 안타까움에 울기보다는 연약한 사람을 사랑하고 바르게 살려는 마음을 더 굳건히 하고 싶었다.

친구들에게서 받은 공감과 위로와 격려를 잔뜩 안고, 친구들에게 달려갔던 길을 되짚어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2/14/2014

영화 "올 이즈 로스트(All is lost)"를 보고





얼마 전 눈이 거의 안 오는 이곳에 눈이 내려 좋아라 했었다. 그런데 이번 주에 더 많은 눈이 내렸다. 눈이 많이 쌓인 곳은 거의 20 cm(거의 8 인치)쯤 된다. 아이들도 눈이 내리기 시작한 날은 수업을 절반만 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다음 주 프레지던츠 데이(Presidents’ Day) 공휴일까지 합쳐 일 주일을 집에서 쉬는 방학 아닌 방학을 맞았다.

사르르 쌓이는 눈과 우박처럼 생긴 얼음 눈이 마구 섞여서 내렸다. 기상정보를 알려주는 텔레비전 방송에서는 교통사고, 정전, 학교나 공공기관 폐쇄와 같은 소란스러운 뉴스들이 마구 쏟아져 나왔다. 눈 폭풍은 이 세상의 당황스러움과 시끄러움을 알지만 자신도 어쩔 수 없다는 듯 엄청난 눈과 비를 우리에게 다시 돌려주고 있다. 지구의 기후 변화뿐 아니라 뭔가 변화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우주, 지구, 내가 사는 곳……

! 정말 엄청난 일이 벌어졌다. 뒤뜰에 눈 내리는 모습을 넋 놓고 바라보다가 갑자기 나가서 눈 속에 서 있어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뒤뜰로 나가는 문을 밀었다. 문이 열리지 않는다. 눈이 쌓이는가 싶더니 눈 깜짝할 사이에 문을 열 수 없을 만큼 눈을 쌓아 놓았다. 일기예보와 지난번 눈에 대한 경험에 의하면 이렇게 눈이 쌓여도, 눈이 그치고 하늘이 맑아지면 이 정도의 눈은 어느새 녹아버릴 것이다. 그걸 알면서도 뒤뜰로 나가는 문이 열리지 않으니(현관문을 여는 데는 아무 문제가 없다. ^^) 집안에 갇힌 느낌이 살짝 들면서 고립무원(孤立無援)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그 뜻을 찾아보니 고립되어 구원받을 데가 없다이다. 내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단어라는 생각에 힘없는 웃음이 풋, 하고 나왔다

꼬박 이틀이 지나 눈이 그쳤다. 먹이를 찾아 나온 새들도 보인다. 담 넘어 도로에 오고 가는 자동차의 모습도 드문드문 보인다. 요즘 달달한 음식이 땡긴다는 둘째 아이의 말도 생각나고 하여 도넛을 먹고 싶다고 남편을 꼬드겼다. 도로 위에는 눈이 얼마나 녹았는지 살펴볼 겸 나갔다 오라고. 남편은 또 첫째 아이를 달래어 함께 나갈 채비를 했다. 두 사람이 나간 지 얼마 되지 않아 돌아왔다. 도넛 가게가 문을 열지 않았다고 했다. 그리고 손에 들려 있는 것은 DVD 두 장. DVD 자판기에서 빌려온 것이다.

그 중 하나가 로버트 레드포드 주연의 올 이즈 로스트(All is lost)” 였다. 눈 때문에 집 안에만 머물러야 하는 약간의 갑갑함을 해소할 요량으로 영화에 집중했다. 주인공의 나이든 모습을 보니 오래 전에 찍은 영화는 아닌 듯 했다. 레드포드가 타고 있던 요트가 바다에 떠다니던 컨테이너에 부딪히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이 영화는 특이하게 대사가 거의 없다. 영화 초반에 고장난 무전기가 잠시 작동을 하면서 구조 요청 하는 몇 마디 말을 들을 수 있다. 후반부에서는 마실 물이 담긴 통에 바닷물이 들어가 섞인 것을 보고 God / Fuck 라는 대사를 들을 수 있다. 그리고 다른 배를 만났을 때 거의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Help를 몇 번 외치는 것을 빼고는 대사가 없다. 내 기억으로는 배경음악 조차도 영화가 거의 끝날 때쯤 들을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도 영화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주인공의 몇 마디 말이 이 영화에 필요한 모든 대사를 담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다.

주인공은 바다와 배에 대하여 풍부한 경험과 지식이 많은 사람인가 보다. 자기가 타고 있던 배 옆구리에 구멍이 났을 때도, 폭풍이 몰아칠 때도, 배가 침몰할 때도, 심지어 구명보트가 다 타버릴 때도 그는 침착하다. 무엇인가를 계속해서 잃어버리는 절망의 연속이다. 주인공은 이런 고립무원(이럴 때 딱 맞는 단어였다!)의 상황에서 맞서지 않고 능숙한 솜씨로 주어진 상황에 담담하면서도 부지런히 대처한다. 하지만 마지막에는 그가 타고 있던 구명보트까지 다 잃어버린다. 그리고 그는 모든 의지를 놓은 채 자신의 생명을 바다에 맡기려 한다.

안돼!”

영화를 보던 첫째 아이의 외침이다.

왜 여태껏 잘 해 놓고……”

나도 너무 아쉬웠다. 영화는 그 뒤에 한 장면이 더 남아 있다.

올해 78 세가 된 로버트 레드포드의 더 함도 덜 함도 없는 깊이 있는 연기를 감상할 수 있었다. 알고 보니 지난 해에 상영된 얼마 안 된 영화였다.

영화가 끝나고 그 이야기 속에 우리네 인생의 단면이 들어 있는 것 같아 가슴이 먹먹했다. 한 발을 겨우 빼고 나면 다른 한 발이 이미 깊이 빠져들고 있는 수렁 같은 상황을 만났을 때 나는 어떤 모습이었나. 폭풍우가 치는 바다 한 가운데에서 구멍난 배를 타고 있는 것 같은 현실을 만나면, 난 얼마나 의연하고 능숙하게 헤쳐나갈 수 있을까.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 그나마 위안이 된다.

그 많던 눈들도 한 나절 만에 절반 넘게 녹아 내렸다


2/06/2014

아픈데, 즐겁다


달달한 마카롱~
(출처  http://en.wikipedia.org/wiki/Macaron)


새벽기도에 가려고 일어났는데 읍! 말이 나오지 않는다. 목이 몹시 따갑고 아프다. 어젯밤에 먹은 감기약 기운이 남아 있는지 정신도 몽롱하다. 약을 찾아보니 종합감기약 밖에 없었다. 종합감기약을 사용하는 용도에 목 아픈 것도 있어서 그걸 먹고 잤다. 몸이 쳐지는 기분이 드는데, 다행히 목 아래쪽 몸은 괜찮은 듯하다. 새벽기도를 조용히 갔다 와서 그대로 쓰려져 다시 잤다. 아이들 학교 갈 준비는 남편에게 맡기고.

목이 아프기 시작한 때는 지난 토요일 오후부터다. 토요일에 콜럼비아 한국학교에 일일 교사로 갔었다. 한국학교 선생님 한 분이 개인적인 사정으로 자리를 비우게 되었기 때문이다. 나를 일일 교사로 추천한 사람은 한 동네에서 살면서 알게 된 지인이다. 그이는 오래 전부터 한국학교 교사로 일해 왔다. 아이들 학교 보내고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던 중 아틀란타한인교회에 속해 있는 한국학교에서 가르친 경험을 얘기했던 적이 있다. , 삼 년 전 일이다. 요즘 그 지인과 만나서 다시 한국학교 얘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는데, 곧바로 일일 교사 요청을 한 것이다. 나는 흔쾌히 그 요청을 받아들였다. 이곳 한국학교의 모습도 궁금하고, 기분전환도 될 것 같았다.

한국학교에서는 설 행사가 있었다. 전체 인원이 35명쯤 된다고 했다. 이날에는 추위 탓인지 여러 명이 결석한 것 같았다. 아이들은 한복을 입고 와서 설에 대해 배우고, 세배하는 법도 배웠다. 각방으로 나눠져서 딱지 만들기, 콩주머니 만들기, 댕기머리 만들기, 영상으로 설 배우기, 윷놀이 따위를 했다. 나는 윷놀이를 맡았다. 윷을 가지고 노는 방법을 설명하니 아이들이 어려워했다. 그래서 직접 윷을 두면서 놀이 방법을 익혔다. 놀이 규칙을 설명하랴 아이들이 던져서 나온 윷에 환호하랴 바빴다.

교실마다 설 행사가 마무리 되고 있을 때 미리 끝난 아이들을 모아 동동 동대문을 열어라우리 집에 왜 왔니를 했다. 아이들이 하나 둘씩 모여들더니 흥미 있어 했다. 이 놀이는 지인인 선생님이 제안한 것이다. 그 선생님은 열정적으로 아이들을 가르쳤다. 동네 아주머니로 만났을 때는 볼 수 없었던 모습이었다. 그날 모든 일정이 끝나고 교장선생님은 다음에 이런 행사가 있으면 또 와달라고 하셨다. 일일 교사로서 쓸만했다는 평가를 들은 듯 하여 좋았다.

오랜만에 귀여운 아이들과 즐거운 시간이었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아이들이 예쁘고 사랑스럽다. 그런데 안 하던 일을 해서 그런지 집에 돌아와 점심을 먹고 나니 피곤함이 슬금슬금 몰려왔다. 정신 없이 낮잠을 잤다. 자고 일어나니 목이 칼칼했다. 그게 말을 못할 정도(?)의 목 아프기 시작이었다.

그로부터 사흘이 지나 비가 꽤 많이 내리는 날, 어느 친구를 만났다. 이 친구도 한 동안 뜸하다 만난 것이다. 점심 식사를 마치고 괜찮은 커피집이 있다며 가자고 했다. 비가 오는 날인데도, 아니 비가 와서 그런지 커피집에는 손님이 가득 차 있었다. 그런데 친구 말에 의하면 그 가게는 올 때마다 사람들이 많고, 때로는 줄을 서서 기다리기도 한다고 했다. 실내장식이 특이하기는 했다. 마카롱 세 개, 애플 턴오버와, 복숭아 파이(점심을 먹은 사람들 치고는 너무 많은 간식!), 그리고 하우스 커피를 한 잔씩 들고 자리를 잡기 위해 커피집을 한 바퀴 돌았다. 빈 자리가 없다. 건물 밖으로 나가니 같이 연결된 건물이긴 한데 히터가 들어오지 않는 넓은 공간이 있었다. 잠깐 앉아 있어보니 그다지 춥지도 않고 괜찮은 듯 했다. 거기서 수다를 한참 떨었다.

, ! 커피가 정말 맛있다. 내 입맛은 정말 단순해서 먹을 수 있는 것은 다 맛있게 느낀다. 커피 맛도 다 거기서 거기다. 그런데 이 집 커피를 한 모금 두 모금 마시는 사이에 맛있다는 느낌이 팍 왔다. 한국에 스타벅스가 들어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스타벅스 커피를 마시고는 뒷맛이 깔끔한 것에 놀랐던 기억이 있다. 그 이후로 친구 덕분에 향도 좋고 맛도 좋은 커피를 만났다.

커피집을 나와 그 친구와 함께 집안 장식품이나 생활 필수품을 사러 다니기도 했다. 친구는 가는 가게마다 일하는 사람들과 안부를 주고 받았다. 모두 미국 사람들이었는데 안부의 내용이 그저 인사치레 정도가 아니었다. 서로를 잘 알고 지내는 사이 같았다. 친구는 마음이 아픈 사람들에 대한 연민이 많은 사람이다. 그런 사람들을 보면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얘기 상대가 되어 주기도 하고, 저녁 식사에 초청 하기도 한다는 것을 새롭게 알게 되었다. 한 동네에 오래 살면서 사람들과 따뜻하고 깊은 사귐을 갖고 있는 친구가 다시 보였다.

그 다음 날 아침, 목이 더욱 잠겼다. 비 오는 날 히터가 없는, 실내도 아니고 야외도 아닌 특이한 곳에서 맛있는 커피를 마신 대가인가…… 그 다음 다음 날은 드디어 말이 잘 나오지 않는다. 이렇게 심하게 목이 아퍼 보기는 정말 오랜만이다.

동네 지인과의 만남과 한국학교도, 어느 친구와의 만남과 맛있는 커피도, 그리고 목이 많이 아픈 것도 모두 오랜만이다. 결과적으로 아픈데, 즐겁다. 일상 속에 늘 있는 사람들인데 그들의 진가를 발견할 때 기쁘다. 그들이 있음으로 내 삶도 풍요로워지고 뭔가 꿈틀대는 생동감도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