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2014

서설(瑞雪)





아이들이 이틀 동안 집에서 쉬다가 학교에 갔다. 등교도 보통 때보다 두 시간이나 늦게 했다. 휴일도 아닌데 아이들이 학교를 안 간 것은 그제 밤에 내린 눈과 낮은 기온 때문이다.

그저께 일기예보에서는 오후 늦게나 눈이 올 것이라고 했지만, 교육구에서는 아예 수업이 없는 것으로 전날 저녁에 이미 알려주었다. 교육구나 학교에서는 공지사항이 있으면 학부모에게 안내 전화를 한다. 궂은 날씨나 비상상황 때문에 학교가 문을 닫을 경우는 학부모 전화, 교육구 홈페이지, 그리고 지역 TV나 라디오 방송 채널에서도 안내해준다.

그날 볼일은 오전 중에 마치고 오후가 되어서는 하늘을 살피며 눈이 오기만 기다렸다. 정말 이제나저제나 하는 마음으로 창 밖을 살폈다.

곧 올 텐데, 뭘 그래?”

남편은 눈 오길 간절히 기다리는 내 모습을 보고 픽 웃는다. 나도 우습다. 한국에 있을 때는 겨울마다 보던 눈인데, 살아가는 환경이 바뀌니 눈 오는 걸 보는 것마저 귀하고 그립다.

저녁 8시쯤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집 앞에 서있는 가로등 불빛을 휘감으며 힘차게 내렸다. 눈발이 굵어지고 잔디 위에 조금씩 쌓이기까지 한참을 지켜보았다. 눈을 기다리던 마음 같아서는 뒤뜰에 쌓이는 눈을 밤새 감상할 것 같았는데, 몸은 벌써 잠 자리에 들어가 있었다. 내일 아침에도 눈을 볼 수 있다는 생각으로, 늘 청춘이라고 착각하게 만드는 낭만적인 감성을 위로하며 잠을 청했다. 사우스캐롤라이나주의 주도인 콜럼비아로 이사온 지 4년차에 이렇게 많은 눈을 보게 되다니 기분 좋은 밤이었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얼추 2인치(5cm)쯤 쌓여있다. 학교를 쉴 정도의 눈은 5년 전쯤에도 왔었나 보다. 우리 교회 어느 권사님은 이렇게 많은 눈은 20년 만이라고 하셨다. 이 지역에서 흔히 볼 수 없는 눈 내린 풍경을 경험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새롭고 흥분된다. 여느 아침과는 달리 바깥이 더욱 환하다. 눈에서 나오는 하얀 색 때문이다. 구름 사이 사이로 비추이는 햇살에 반사된 눈빛이 반짝거린다. 화사하다.

온화한 기후를 가지고 있는 미국 남동부에 눈 폭풍이 온 것은 뉴스에 나올만하다. 눈이 잘 오지 않으니 제설장비가 제대로 있을 리 없다. 부족한 제설장비와 재해에 발빠르게 대처하지 못한 주지사나 시장을 향한 질책은 예상할 수 있는 뉴스거리들이다. 애틀랜타에서 처음 겨울을 맞이할 때부터 들었던 이야기들이다. 애틀랜타에서는 이번에 내린 눈이 미북부 지역에 비하면 많지도 않은 양인데, 그에 대한 행정조치가 제대로 되지 않아 정치 지도자들에 대한 실망이 큰가 보다.

이곳, 콜럼비아는 안전하게 학교도 일찍 문을 닫았고, 교우들끼리도 안부를 물으며 서로 챙겨주었다. 하루, 이틀 먹을 물과 식료품은 준비되어 있는지 물어오는 교우도 있었다. 모두 감사한 일이다.

한국은 설날을 보내고 있을 것이다. 음력으로 새해를 다시 한번 시작하는 날이다. 미국에서는 음력 설을 쇠지는 않지만, 한국인인 나와 우리 가족, 교우들에게 이번에 온 눈은 새해에 복되고 좋은 일이 많으리라,고 알려주는 서설(瑞雪) 같다


때마침 무리지어 날아가는 기러기 떼를 만났어요.
잘 안보이나요???  ^^

1/23/2014

빛바래지 않는 손길




우리 교회에서는 날마다 말씀을 읽기 위하여 말씀묵상집 『기쁨의 언덕으로』를 사용하고 있다. 『기쁨의 언덕으로』는 한인연합감리교회에서 발행되는 말씀묵상집이다. 사순절이나 대강절 같이 절기의 의미를 되새기는 말씀을 보게 되는 때를 제외하고는 새벽기도 시간에도 『기쁨의 언덕으로』에 나와 있는 말씀을 나눈다.

올해는 온 교우가 더 적극적으로 성경을 읽기 위하여 매주 성경문제지를 만들어 성경공부를 한다. 교우들은 그 문제지를 집으로 가져가 일주일 동안 성경을 읽고 문제에 답을 달아 온다. 그 성경 문제지의 내용도 『기쁨의 언덕으로』에서 제시되는 말씀을 따라가고 있다.

이번 주에 읽은 출애굽기 17장에는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 한 후 아말렉과 싸운 이야기가 나온다. 모세가 손을 들면 이스라엘이 이기고 손을 내리면 아말렉이 이긴다. 그래서 모세의 손이 내려오지 않도록 아론과 훌이 붙들고 있었고, 여호수아는 용감히 싸워 아말렉을 무찌른다. 이 이야기를 읽다가 고등학교 체력장 때의 일이 생각이 났다

고등학교 3학년 가을쯤 대학 진학을 위한 체력장 평가가 있었다. 체력장 점수는 20점이 만점이었고 대입 시험인 학력고사에 반영되었다. 보통 체력을 가진 학생은 어려움 없이 만점을 얻을 수 있었기에, 학력고사에서 20점을 거저 얻을 수 있는 기회였다. 대입 체력장 종목에는 윗몸 일으키기, 오래 매달리기, 멀리뛰기, 멀리 던지기, 100M 달리기, 그리고 800M(?) 오래 달리기가 있었던 것 같다.

다른 종목들이 다 치러지고 오래 달리기가 체력장 평가의 마지막 종목이었다. 학급에서 사용하는 번호 순서대로 운동장 트랙을 따라 달렸다. 체육 선생님뿐 아니라 고 3 담임 선생님들도 나오셔서 체력장 결과를 기록하셨다. 대입 시험에서는 1, 2점이 당락을 결정할 수도 있기 때문에, 선생님들은 적어도 체력장 점수에서는 인정을 넉넉히 베푸셨다.

내 순서가 되어 오래 달리기를 시작했다. 얼마큼 달렸을까? 숨이 잘 쉬어지지 않고, 다리는 몸에 붙어있기는 한 것인지 느껴지지 않고, 얼굴은 달아올라 불덩이를 올려놓은 것 같았다(30대에 건강검진을 받고 나서 나의 폐활량이 보통에 못 미친다는 것을 그제야 알았다). 다른 친구들은 이미 한참을 앞서갔다. 뒤쳐져서 창피하다거나 20점을 받지 못할까 걱정된다거나, 뛰고 있는지 걷고 있는지, 아무 생각이 없었다. 그때였다.

가자!”

친구 두 명이 달려와 내 양쪽에서 팔짱을 끼었다(친구 한 명은 얼굴이 기억나는데 다른 한 친구는 기억에 없다. 아쉽다). 친구들이 날 붙잡고 함께 달려주어서 남은 거리를 마저 달릴 수 있었다. 그렇게 겨우겨우 800M 달리기를 마무리했다. 그리고 나서 운동장 한가운데 놓여 있던 하얀 매트리스에 난 한참을 누워있었다. ET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던 국사 선생님이 죽었나 살았나 내려다 보셨다(실제로 1994년 체력장 평가 때 학생이 사망한 뒤로 이 제도는 폐지되었다).

내 인생에 얼마나 어마어마한 영향(?!?!)을 끼쳤을지 모를 체력장 점수 20점을 그렇게 얻었다. 그리고 오랜 시간이 흘러도 빛바래지 않을 친구들의 도움도 받았다. 얼굴을 아는 친구 Y는 운동장에서 헤매고 있는 날 보고 도와주고자 나섰을 것이다. Y는 그런 의리와 용기가 있는 사람이니 충분히 그럴만하다. 그 친구가 지금은 어디서 어떻게 살고 있는지 관계가 끊어진 지 오래되었다. 그래도 Y와 가까이 지내던 그 시절을 돌이켜보면 행복하다.

민족과 민족 간의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하여 아론과 훌이 모세를 돕는 이야기와 체력장에서 친구들의 도움을 받은 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를 견주어 보고자 함이 아니다. 이스라엘 민족을 애굽으로부터 이끌고 나온 위대한 지도자나 평범한 나나 혼자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일을 겪게 된다. 그럴 때 만나는 가족, 친구, 교우들의 관심과 도움을 생각하면 가슴이 벅차다. 지치고 힘들 때 가자!” 하며 붙들어주는 이들의 손길을 생각하면 눈물이 왈칵 솟기도 한다. 그런 따뜻한 마음을 나눠주는 사람들과의 관계가 깊든 얕든, 도움을 주고 받는 그 순간만큼은 감동이다. 거기에 주님의 이름으로 빌어주는 기도가 보태어지면 은총이다

1/16/2014

발을 따뜻하게 하려면




대한(大寒)이 소한(小寒) 집에 놀러 왔다가 얼어 죽는다, 고 하더니 올해도 소한이었던 지난 주 초부터 많이 춥다. 이상기온 때문에 세계 곳곳이 예년보다 더 많이 춥기도 하고 덥기도 한가 보다. 한겨울이라고 해도 한국의 초겨울 기온 정도를 유지하는 이곳도 기온이 영하로 자꾸 내려간다. 입동부터 소설, 대설, 동지, 소한, 그리고 대한이 24 절기 가운데 겨울에 해당하는 절기다. 겨울의 끄트머리 절기인 대한도 이제 며칠 남지 않았다. 그러고 나면 집 바깥을 산책하기에 부담이 없는 날씨가 되었으면 좋겠다.

난 제일 추운 절기인 소한에 태어나서 그런지 여름보다 겨울이 더 좋다. 더운 것보다 추운 것을 더 잘 견디기도 한다. 다만, 추워지면 발이 유난히 차가워져서 그건 별로 안 좋다. 몸이 활동하는 시간에는 발 시린 것을 잊어버리기도 하고 참을 만도 하다. 그런데 제일 참기 힘든 시간은 자려고 누웠을 때이다. 의식이 잠잠해지고 몸의 활동이 줄어드는 잠 자리에 들면 얼음장처럼 차가운 발에 신경이 온통 집중된다. 이불을 덮고 있어도 소용이 없다. 발바닥으로 한기가 몰려드는 느낌을 사라지게 못한다. 발에서 시작된 찬 기운은 점점 온몸으로 퍼져서 잠이 들 수 없는 지경에 이른다.

발을 손으로 비벼서 열을 내보기도 한다. 괜찮으려나 싶어 누워보면 여전히 발이 차다. 다시 일어나기 싫어 발끼리 부대껴보아도 한기가 가시지 않는다. 이쯤 되면 별 수 없다. 옆 사람의 체온을 이용해야 한다.

발이 너~무 시려서 잠을 잘 수가 없어, !”

인정을 구하는듯한 음색으로 신호를 먼저 보낸다. 그리고 싫다, 좋다 반응하기 전에 얼른 차가운 발을 옆에 누운 사람의 다리 밑으로 쏙 집어넣는다. 남편은 머리가 베개에만 닿으면 잠드는 사람이다. 그러니 나보다 먼저 잠들 때가 많다. 어렴풋이 잠든 남편은 번번이 당하는 일인데도 화들짝 놀란다. 나의 불쌍하고(!) 차가운 발을 차마 밀쳐내지는 못한다. 그렇게 조금만 시간이 지나면 발은 어느새 따뜻해진다. 잠결에도 차가운 발을 참아주는 것이 고마워서 나도 그리 오래 남편의 잠을 방해하지는 않는다.

요즘에는 발을 따뜻하게 하는 또 다른 한 가지 방법을 사용한다. 족욕이다. 양동이에 물을 3분의 2쯤 받는다. 물에 발을 담갔을 때 좀 참아야 할 정도로 따끈한 온도면 좋다. 10분에서 15분 정도 있으면 발도 따뜻해지고 몸도 따뜻해진다. 그동안 물 받고 어쩌고 하는 것이 귀찮아서 그냥 견디든가 남편의 체온을 이용하든가 했다. 다시 족욕을 해보니 발뿐만 아니라 온몸이 이완되는 듯하여 좋다.

그럼, 오늘 밤에는 어떤 방법으로 발을 따뜻하게 할까? 나에게 물었다.
A.    남편의 체온을 이용한다.
B.     족욕을 한다.

대답은 A+B이다. 전에는 이런 질문을 받으면 A가 좋을까, B가 좋을까, 만 생각했다. 그 둘을 동시에 선택할 수도 있다는 발상이 잘 안 되었다. 앞으로 A나 B, 혹은 A+B를 선택해서 밤마다 따뜻한 몸으로 잠들 것이다. 또 다른 좋은 방법을 알게 되면 더욱 다양한 선택을 할 수 있을 테니 재미있을 것 같다.

내 몸의 건강을 위한 사소한 질문에 대한 선택은 쉽고 다양하다. 그런데 반드시 둘 중에 하나만을 선택해야 하는 경우도 많이 있다. 진실과 거짓, 하나님 말씀과 사탄의 교묘한 왜곡, 백성을 살리는 정치와 백성을 죽이는 정치…… 이런 질문에는 적절한 타협과 두루뭉술한 선택을 할 수 없다. 예와 아니오가 분명해진다.

에구구, 생각의 흐름이 뜬금없이 옆길로 샜다. 발을 따뜻하게 하려는 노력이 심장도 덥혔나 보다

1/09/2014

이것이 성도의 교제인가


우리 교회 십자가 탑입니다. 하늘, 구름과 잘 어울려 있어서...


지난해 12월 마지막 주일에는 처음 뵙는 몇 분과 함께 예배를 드렸다. 그 중 한 부부는 우리 교회 권사님 부부와 아주 오래 전에 이웃으로 사시던 분들이라고 했다. 다른 나라와 주에서 한참을 사시다가 콜럼비아로 다시 이사 오셨단다. 권사님과 나누던 정이 그리워서인지 우리 교회 주일 예배에 참석하셨다. 미국 남편 분(다문화 가정을 소개할 때 이해하기 좋게 모국을 붙여 설명하는 것을 자주 듣는다. 나도 따라 해 본다)은 산소 호흡기를 착용하고 계셨다. 그래도 몸이 불편하시다고 느껴지지 않을 만큼 밝고 쾌활하셨다. 한국에서 만났던, 지금은 하늘 나라에 있는 은비가 생각이 났다. 근육과 관련된 질병으로 누워만 있던 예쁜 아기, 그 아이도 산소 호흡기를 끼고 예배에 빠지지 않았었다. 몸은 아파도 예배를 지키려는 사람들…… 가슴 뭉클한 깨달음이 새로 오신 분들로부터 전해졌다.

또 다른 한 분도 타주에 사시던 집사님인데 미국 남편분의 직장을 따라 이곳으로 이사오신 분이다. 다문화 가정을 갖고 있는 집사님은 가족이 한 교회에서 신앙 생활하기를 원하셨다. 얼마 전 한국 음식점에서 우리 교회 어느 권사님을 만나게 되었는데, 우리 교회에서 예배 드릴 때 동시통역이 가능하다는 정보를 귀담아 들으셨던 것 같다. 집사님의 남편은 평일에 우리 교회를 방문하여 외관을 둘러보고 놀이터가 잘 꾸며져 있어 맘에 드셨다고 한다. 아이들을 위하는 교회는 따뜻한 교회라고 판단하신 것 같다. 놀이기구가 작고 오래 되어 2 년 전인가 십시일반 헌금하여 새것으로 바꾸었다. 그것이 누군가의 마음을 끌어 교회를 선택하는데 도움이 되다니 신기했다. 놀이터에 우리 교회 아이들에 대한 교우들의 애정이 묻어 있었나……

이런저런 사연으로 처음 만나게 된 분들과 예배를 함께 드린 날은 한 해를 돌아보는 마지막 주일이기도 하고 한편, 새해를 새해답게 맞이하고자 하는 새로운 다짐을 하는 주일이기도 했다. 이런 마음가짐으로 예배를 드려서 그런지 목사님의 설교도 다른 때보다 더욱 힘차고 다부지게 들렸다. 창세기에 나오는 롯의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나약하고 부족한 죄인이었던 롯을 위해 기도하는 삼촌 아브라함의 기도를 들으시며, 천사들을 보내어, 죄악의 구렁텅이인 소돔과 고모라에서 그의 가족을 구출해내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절절히 느껴지는 설교 시간이었다. 게다가 우리 교회 예배에 처음 참석하신 집사님은 설교 시간 내내 아멘으로 어찌나 힘차게 화답하시는지, 정신이 번쩍번쩍 나고 설교에 더욱 집중하게 되었다. 예배가 끝나고 교우들이 그 집사님과 인사 나누는 것을 들어보니 나만 그런 것이 아니었나 보다. 지난해 마지막 주일, 그 낯선 분들은 나와 우리 교우들에게 그렇게 깊은 인상을 남기고 헤어졌다.

이틀 뒤, 저녁 때가 되면 교회에서 모여 떡국도 먹고, 윷놀이도 하고, 송구영신 예배를 드리려고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아멘집사님으로부터 당황스러운 소식이 날아들었다. 함께 예배 드린 다음 날, 그러니까 월요일에 집사님네 이삿짐이 도착했다고 한다. 온 가족이 이삿짐을 풀고 있었고 집사님의 남편은 세탁기를 연결하고 계셨다. 그러다 남편 분께서 쓰러지셨고 응급실로 가던 중 돌아가셨다는 것이다. 50 대 후반이셨는데 지병이 있으셨나 보다. 왕래가 거의 없던 결혼한 큰 딸이 노스캐롤라이나에 살고 있으나 콜럼비아에는 아는 이가 하나도 없는 집사님이셨다.

고인이 되신 집사님의 남편은 은퇴한 군인이셨는데, 장례 절차를 간소하게 하고 화장을 하여 군인묘지에 안장해 달라고 평소에 유언하셨다고 한다. 집사님은 콜럼비아에 있는 군인국립묘지 측과 상의하여 화장 절차를 진행할 것이고, 유족들과는 교회에서 추모 예배 드리기를 원하셨다. 이러한 집사님의 사정은 우리 교회 온 교우들에게 빠르게 전해졌다. 교우들은 한 번도 뵙지 못한 분의 추모 예배를 준비하는 것에 대해 예 혹은 아니오, 로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우리가 해야 될 일로 받아들였다. 여선교회에서는 음식 그리고 남선교회에서는 꽃을, 유족들이 준비하는 것 외에 필요한 것을 예측하여 마련했다. 교우들은 차분하게, 정성을 다해 고인과 유족을 위한 예배에 마음을 썼다. 우리 교회 교우들이 한마음 되어 동참하는 모습이 따스하게 다가왔다.

그리고 또 감동적인 것은 그 집사님이 다른 주에서 다니던 교회의 교우들이 자동차로 22시간 운전하여 먼 길을 달려오신 것이다. 같은 목장에 속해 있던 회원들이신데 집사님네 소식을 듣고 세 분이 바로 출발하셨다고 한다. 집사님과 오랜 친분이 있는 그 세 분은 남편과 아버지를 여의고 낯선 곳에서 살아가야 할 유족을 위로할 뿐 아니라 며칠 동안 추모 예배에 오실 손님들을 위해 음식을 푸짐하게 만드셨다.

지난 토요일에 추모예배를 드렸다. 예배가 소홀해지지 않도록 사회, 설교, 기도 등 모든 것이 이중언어로 진행되었다. 애달픈 조가도 불려졌다. 조문객이 너무 적어 쓸쓸하면 어쩌나 했는데 아주 적지도 않았다. 집사님 큰 딸의 미국 시아버지가 노스캐롤라이나에 있는 어느 미연합감리교회 목사님이시라고 들었다. 그 목사님 부부가 예배에 참석하셨다. 내가 다 감사했다. 고인의 화장 일정을 담당할 군인들도 참석했다. 추모예배와 교제는 모자라지도 넘치지도 않게 진행되었다. 멀리서 오신 집사님의 옛 교우들은 주일 예배에 참석해야 한다며 점심식사를 마치고 바로 떠나셨다.

단 한 번 예배를 같이 드림이 인연이 되어 누군가의 아주 슬픈 일에 함께 울어주고 위로해줄 수 있는 마음은 무엇인가? 함께 신앙 생활했으므로 갑작스런 사고에 슬퍼하고 있는 누군가를 위해 멀고 먼 길을 달려오는 그 마음은 또 무엇인가? 이것이 성도의 교제인가......

1/02/2014

두려움을 이기기 위하여


이 사진은 http://blog.daum.net/nchwang15 에서 가져왔어요.

강원도 동해시에 있는 무릉계곡으로 여행 갔을 때의 일이다. 단짝친구와 둘만의 여행이었다. 대학교에서 만난 우리는 방학이 시작되면 바로 여행을 다녀오곤 했다. 둘 다 신학생이어서 각자 다니는 교회에서 주로 교육부를 맡아 일하고 있었으므로 여름성경학교나 수련회 또는 성탄절 준비로 바빠지기 전에 짧은 여행을 했다. 대학교 3학년인지, 한 학년을 마친 겨울방학이 되었고 우리는 강원도 쪽으로 여행을 하기로 했다. 지금처럼 여행 정보가 넘쳐나는 시절이 아니어서 아마도 미용실에 머리 하러 가서 보게 되는 여성 잡지의 어느 한 구석에서 무릉계곡이라는 곳을 발견하지 않았을까 싶다(친구야, 맞니?).

내 친구 E는 깡마른 체구에 가무잡잡한 피부와 작지만 깊이 있는 눈을 가지고 있다. 새파랗게 젊던 그 시절, E는 이러한 자신의 외모를 맘에 들어 하지 않았다. 요즘 한국에서는 마른 사람이 미인이 되는 분위기다. 지난해 한국에서 여러 친구들을 만났을 때 우선, 겉모습에서 느껴지는 대로 서로 안부를 묻던 중 어느 친구가 E를 바라보았다.

“E, 넌 여전하구나. 하나도 안 변했다.”
시대를 잘 만나서 어깨 펴고 산다.”

다들 공감하는 E의 대답에 한바탕 까르르 웃었던 기억이 난다. E는 대학 생활이 해를 더할수록 학교 안에서 인기가 많은 사람이 되었다. 착한 심성을 가진 데다가 친구들의 얘기를 잘 들어주는 사람이었다. 게다가 연극, 그림, 노래에 뛰어난 재능을 보여 대학이라는 공동체 생활에서 꼭 필요한 사람이 되었다.

E와 절친이었던 나는 강의실과 도서관만 오고 가는 샌님 같았다고 할까.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지만 친구들은 날 범생이(모범생을 낮춰 부르는 말)라고 불렀던 것 같다.

말라깽이와 범생이는 한 인격체로서 성숙해가는 과정 중이었고, 제한적이나마 세상에 대한 탐구와 모험심이 가득했다. 그래서 여행지에 대한 상세한 정보나 별다른 준비물 없이 작은 배낭 하나만 짊어지고 둘만이 떠나는 어설픈 여행이 가능했다.

동해시에 도착해서 저녁을 먹고 나자 한겨울 짧은 해는 이미 저문 상태였다. 기차역 근처였는지(! 그때를 자세히 기억하기에는 시간이 꽤 흘렀나 보다) 여관을 정해 들어갔다. 낯설고 침침한 여관에서 두 여대생이 하룻밤을 묵는 장면은 지금 생각해도 편안하지가 않다. 겁이 많은 나는 헐렁한 여관방 문고리가 마음에 걸려 밤새 뒤척였다. 잠이 많은 E는 잠 못 드는 날 신경도 안 쓰고 무심하게 잘도 잤다. 이제나저제나 기다리던 아침은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밝아왔다.

뻑뻑하고 충혈된 눈으로 세수만 겨우 마치고 여관 문을 나섰을 때 깜짝 놀랐다. 온 세상이 하얬다. 밤새 눈이 온 모양이었다. 무릉계곡이 있는 산에 올라갈 수가 있으려나 아니, 거기까지 가는 버스가 다니기는 하는 걸까 궁금해하면서 동시에 물어 물어 버스를 타고 무릉계곡 입구에 이르렀다

매표소 앞에 다가가 작은 창문을 두드렸다. 아저씨 한 분이 계셨다. 아저씨는 이렇게 눈이 많이 온 날 무슨 일이냐는 표정으로 바라보셨다. 산에 올라가려고 한다니까 아저씨는 매표소 안으로 들어오라고 하셨다. 아저씨는 우리들을 아래 위로 훑어보셨다.

운동화는 신었네. 아직 산에 올라간 사람이 한 사람도 없어. 짐은 여기에 맡기고 가도 돼.”

다른 주의 사항이 있었는지 모르겠다. 아무런 등산 장비 없이 운동화 신은 것만으로 등산이 허락되었다. 그 시절은 그랬던 것 같다.

길이 어디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눈이 쌓여 있었다. 우리가 그날 아침 처음 등산객이니 앞서 간 사람의 발자국도 없었다. 매표소 아저씨가 허락해주어 들어가긴 했지만 참으로 무모한 산행이었다. 의심 많고 두려움이 많은 나는 도저히 발걸음을 뗄 수가 없었다. E가 앞장 섰다. E가 두 걸음 앞서 가면 난 한 걸음을 내디뎠다.

등산길 옆으로는 계곡이었는데 얼음이 얼었는지 물이 흐르고 있는지 보이지 않을 정도로 눈이 쌓여 있었다. 온통 눈으로 덮인 크고 하얀 산에 처음 손님이 되어 찾아 들었으니 흠집 없는 그대로의 설산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그곳을 찾아간 보람이 있었으련만 온 몸이 긴장되어 있어 주변 경관에 눈 돌릴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얼마 걷지 않았는데 발걸음이 점점 무거워졌다. 다리에 힘을 엄청 주며 걸은 탓이었다.

내 기억으로는 입구에서 얼마 멀지 않은 곳에 수백 명이 올라갈 수 있다는 무릉반석이 나온다. 아주 넓은 바위인 무릉반석 위에 서보려면 길에서 내려서서 계곡 쪽으로 걸어가야 한다. 그곳에 이르러 E는 무릉반석 위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내딛는 곳이 바위 위일지 계곡물이 흐르고 있을지 모르는데 말이다. 나는 그냥 그 자리에 서 있었다. E는 무릉반석의 평평한 눈 위에 누워 좋아라 했다. 그래도 난 제자리에서 꼼짝하지 않고 바라보고만 있었다. 이래가지고는 무릉계곡에서 유명한 용추폭포까지 갈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그런데 어디선가 말소리가 들려 돌아보니 아저씨들 몇 명이 보였다. 그들도 겨울산행에 나선 이들 같았다. 아저씨들은 우리와 가벼운 인사를 나누고 앞으로 쭉쭉 나아가셨다. 아저씨들은 길 위에 발자국을 쿡쿡 찍어 놓으셨다. 우리들은 뜻밖에 나타난 아저씨들의 고마운 발자국을 따라 올라갔다. 기대하지 않았던 도움이 우리의 산행을 수월하게 했다.

그래도 눈 쌓인 산길에 대한 두려움은 여전히 나와 동행하고 있었다. 그 두려움을 이기기 위해서 친구와 서로 의지하며 걷고 또 걸어야 했다. 도중에 멈추어 서는 것은 우리의 모험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것이며, 그건 더 두려운 일이었다. 우리가 계획했던 용추폭포에 이르렀다. 우리는 감사하게도 별다른 문제없이 산을 다시 내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