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9/2014

언제나 남는 것은 사람


시카고에서




지난 주에는 가족과 함께 장거리 여행을 했다. 시카고 근처에 사는 몇몇 친구들을 만나고 오는 일정이었다. 이 여행이 실행되기를 오래전부터 마음에 품고 있었다. 중간에 쉬는 시간을 빼고 자동차로만 열두세 시간이 걸리는 긴 여행을 아이들과 함께 해 보고 싶었고, 아직 미국 중북부를 가보지 못한 아이들에게 그곳의 풍광도 보여주고 싶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곳에는 오래된 친구들이 있으니 기회만 되면 그들에게로 달려가는데 주저할 이유가 없었다.

사실 이 여행을 구체적으로 계획하게 된 계기가 있었다. 겨울 방학이 시작되기 전, 둘째 아이는 성탄절 즈음에 친구네 가족을 따라 스키장에 가도 되느냐고 했다. 우리 가족은 딱히 계획이 없었던 지라 아이라도 즐거운 시간을 보내라고 허락했었다. 아이는 방학이 가까워지자 스키장에서의 구체적인 일정을 점검하고 있었다. 스키장에 대한 정보가 들어 있는 홈페이지도 보여 주었다. 거기엔 스키복과 스키 장비를 빌리는데 드는 비용도 잘 정리되어 있었다. 아이는 맨몸으로 가서 모든 장비를 빌려야 하는 상황이었다. 빠르게 속셈을 해보니 그것들을 하루만 빌린다 해도 몇 백 달러가 필요했다. 이거 너무 비싸다, 했더니 안 되겠지, 라는 대답이 바로 이어서 나왔다. 렌트 비용을 미리 살펴본 눈치였다. 아이와 이런 짧은 대화가 오고 간 다음날 남편은 시카고 여행을 제안했다. 중북부를 여행할 기회가 바로 이때라고 판단되었나 보다.

가족 여행 계획이 친구와 스키장을 가지 못한 아이의 아쉬움을 얼마나 채워줬는지는 모르겠다. 남편은 친구들과 연락을 하여 적극적으로 일정을 잡았다. 남편의 그런 모습은 참으로 오래간만이었다. 방학 동안 심심해 할 아이들을 위해서도, 단순한 일상 속에 묻혀 있는 아내를 위해서도, 그리고 친구들이 몹시 그리운 자신을 위해서도 꼭 필요한 여행이라 여겨졌는지 일을 진행하는 모습에 파드닥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그런데 우리 교회에서 100세가 가까워 오시는 권사님께서 성탄주일이 되기 일주일 전에 입원하시게 되었다. 날마다 병문안을 다니던 남편은 아무래도 여행 계획을 취소해야겠다고 했다. 나는 어느 정도 마음에 준비를 하고 있었다. 아이에게도 이러한 형편을 알리자 우리 가족이 그렇지, , 하고는 더 이상 말이 없었다.

원래 여행을 떠나기로 했던 전날, 권사님께서 퇴원하시게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권사님께서 입원해 계시는 병원을 다시 찾아갔다. 권사님의 병세가 어떠신지 직접 눈으로 살펴야 했기 때문이었다. 권사님의 눈동자와 말소리에 힘이 조금 생기신 것 같았다. 우리는 권사님이 퇴원하시게 되었으니 시카고로 여행을 다녀오려고 한다고 말씀 드렸다. 권사님은 걱정 말고 다녀오시라며 오히려 우리를 격려하셨다. 우리는 집으로 돌아와 부리나케 여행 가방을 꺼냈다. 그래도 혹시 권사님께 무슨 일이 생길까 싶어 마음은 들뜨지 않도록 잘 붙들어 두었다.




그런 복잡한 사정을 뒤로하고 떠난 여행은 감사하게도 순조로웠다. 비가 내리기도 했지만 대체로 도로 사정이 좋았다. 북부지역이라 눈이 오면 어쩌나 했는데(눈이 오면 오는 대로 좋았을 것 같기도 하다. 남부에서는 눈을 보기가 어려우므로) 우리 가족이 남부의 따뜻한 기온을 몰고 왔다고 농담할 정도로 그다지 춥지 않았다. 미주리 주의 선배 목사님네를 시작으로 아이오와 주와 일리노이 주의 친구들을 찾아 다니는 동안 비록 자동차 안에서 바라보는 풍경들일지라도 구경도 많이 했다. 친구들이 사는 크고 작은 도시들, 고속도로 주변에 스치는 여러 분위기의 도시들, 추수가 끝나 빈들이 되어버린 탁 트인 평야와 풍력발전에 사용되는 거대한 바람개비들, 무엇으로도 가려지지 않은 끝없는 하늘이 반복되었다. 하지만 여행자의 눈에는 지루한 줄 모르는 신선한 경치들이었다. 아이가 영화에서만 보던 시카고는 몇 군데 걸어 다녀보기도 했다.

여행에서 만난 동료 목사님들과 그들의 가족들은 우리 가족에게 정성스런 음식과 편안한 잠 자리를 내어주었다. 밤이 깊어지는 것도 모른 체 자신이 몸담고 있는 목회 현장에 대한 이야기와 신앙인으로써 이 시대에 어떻게 의미 있는 삶을 살 것인지 진지하게 풀어 놓았다. 신학적 주제에 대해서도 열띤 논쟁이 있었다. 다들 중년에 이르러서인지 서로의 의견을 존중하며 자신의 견해를 풀어가는 성숙한 모습을 보면서 친구들에 대한 자부심이 더 커졌다. 친구들과 멀리 떨어져 사는 우리 가족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과 애정 어린 조언들을 들을 때에는 감동이었다. 오래 묵은 친구들에게서만 풍겨 나오는 진한 향기를 맡는 듯했다.

또 노래도 엄청 불렀다. 어느 부부 목사가 기타 반주를 하며 오 거룩한 밤노래에 화음을 넣어 멋있게 부른 것이 시작이었다. 우리가 젊었던 8,90년대에 거리에서 불렀던 노래나 대중 가요를 정말 오랜만에 다시 불러 보았다. 가사를 모르거나 연주 코드가 헷갈리면 스마트폰으로 검색하여 척척 내놓았다. 부부끼리 노래 부르는 모습을 동영상으로 찍어주기도 했다. 잘 불러도, 틀리게 불러도 웃기고 재미있었다. 중년의 나이에 사는 모습이 조금씩은 달라도 노래 부르는 동안은 나라의 발전과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달려가던 젊은 시절의 그들 같았다.

둘째 아이는 집으로 돌아오며 이렇게 말했다.
옛날 노래가 지금 노래 보다 더 좋은 것 같아. 내가 나이 들어서도 엄마, 아빠들처럼 그렇게 함께 노래 부르며 즐길 수 있을까?”
엄마, 아빠들이 같이 노래하는 모습이 보기 좋았단다. 대화의 내용도 많이 엿듣다 잠이 들었다고 했다. 아이가 이번 여행에서 스키장에 못 가는 아쉬움과 여행이 취소될 뻔해서 느꼈던 감정들 대신에 더 소중한 가치들이 있음을 기억해주면 좋겠다.

한 해가 가고 새해가 와도, 여행을 떠나고 다시 집으로 돌아와도 언제나 남는 것은 사람이다. 마음과 마음이 이어지는 가족, 친구, 동료, 교우……

12/21/2014

그 플러그(plug)




머리를 감았다. 머리를 감고 나면 무엇인가를 시작할 수 있는 준비가 된듯한 기분이 들곤 한다. 집안에서  일을 하든, 사람을 만나거나 교회에 가는 일 따위로 외출을 하든 말이다. 머리를 감은 후에 급하게 집 밖을 나갈 일이 아니라면 헤어 드라이어를 쓰지 않고 젖은 머리가 자연스럽게 마르도록 나둔다. 헤어 드라이어에서 나오는 열기로부터 머리카락을 보호하기 위한 최소한의 배려이다.

헤어 드라이어의 열기를 때로 피했다 하더라도 또 다른 열로 머리 모양을 잡아주는 플랫 아이론(flat iron)을 사용해야 하는 단계가 남아 있다. 플랫 아이론은 직사각형 모양을 한 넙적한 판이 마주보고 달린 고데기 같은 도구이다. 머리카락에 남아 있는 물기가 마르는 동안 부스스해지고 이리저리 삐친 머리카락을 단정하게 펴주는데 아주 쓸모 있는 도구이다. 이 플랫 아이론의 열이 머리카락을 더 손상시킬지도 모르지만 지난 몇 년 전부터 사용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플랫 아이론은 미용실 원장님이 쓰던 것을 받아온 것이다. 원장님이 내 머리에 퍼머를 해주었는데 잘못되어 머리카락이 거의 다 타버렸었다. 뜨거운 압축기로 눌러놓은 것처럼 머리카락이 작은 지그재그 모양으로 구부려졌다. 그걸 만지면 바사삭 바스러질 것처럼 건조하고 거칠기가 이를 데 없었다. 머리를 묶지 않고 풀러 놓으면 가발을 쓴 것처럼 부풀어 올랐다. 머리를 삭발하기 전에는 해결될 수 없는 상태였다. 그냥 괴상한 머리카락을 달고 그냥저냥 시간이 가서 머리카락이 자라는 대로 조금씩 잘라내며 상태가 나아지길 기다리는 수 밖에 없었다. 머리카락 때문에 참담함을 느낀 것은 처음이었다. 원장님은 미안한 마음에 다시 퍼머도 해주고(상황은 변하지 않았다), 자기가 쓰던 플랫 아이론과 고데기도 주었다. 그렇게 플랫 아이론은 머리카락을 일시적으로 진정시켜주는 도구로 나와 친해졌다.

얼마 전, 머리를 감고 다 마르도록 그냥 놔두었다. 하던 일이 마무리 되어 머리를 마저 정리하기 위해 플랫 아이론이 있는 화장실로 갔다. 플랫 아이론의 플러그를 찾아 콘센트에 꽂았다. 어라! 전원이 들어온 걸 표시하는 빨간 불이 켜지지가 않았다. 그 전날까지 멀쩡했기에 별 생각 없이 플러그를 뽑았다가 다시 꽂았다. 불은 여전히 켜지지 않았다. 그 쬐그만 등이 고장 났나 싶었다. 아이론이 뜨거워지기만 하면 등이 고장 난 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어느 정도 기다리다가 아이론에 손을 대보았는데 차가웠다.

그렇다면 화장실 콘센트 전체의 전원이 꺼져 있는지 확인해야 했다. 에너지 절약을 위해서인지 같은 벽면에 있는 콘센트의 전원을 한꺼번에 차단할 수 있는 장치들이 되어 있다. 안방 화장실은 아이들이 주로 쓰는 화장실 콘센트에서 전원을 켜고 끌 수 있다. 가서 확인을 해 보니 전원은 들어와 있었다. 기대를 살짝 하며 다시 돌아와 플러그를 꽂아보았지만 아무 반응이 없었다. 갑자기 아쉬운 마음이 확 들었다. 손에 익은 아이론을 더 이상 쓸 수 없어 아쉽기도 했고, 그 아이론에 묻어 있는 기억의 조각들도 더 멀어져 가는구나 싶었다.

그 엉망이었던 퍼머를 하게 된 까닭은 40대 중반을 넘어 도전하게 된 지역 전문대학에 다니게 되면서, 머리에 신경 쓰지 않으려고 간편한 스타일로 바꾸려는 마음에서였다. 영어 실력을 넓히고 미국식 사회복지에 대해 공부할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했는데, 한 학기가 지나 그만 두었다. 더 공부할 마음이 있었으면 주변 상황이나 조건을 따지기 보다 어떻게 해서든 학교에 남아 있었을 것이다. 한 학기가 지나 재정적인 문제에 부닥치자 나는 곧 학교를 미련 없이 그만 두었다. 새로운 것을 배우는 것은 엄청 흥미로운 일이었으나 역설적이게도 얄팍하나마 이미 가지고 있는 지식과 경험과 가치관과 신앙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는 기회가 되었다. 나름 진지했던 도전과 재빠른 포기의 흔적이 고스란히 담겨 있던 플랫 아이론을 이제는 보내야 할 때가 온 것이었다.

, 잠깐! 잠깐만! 이 플러그가 아니잖아!’  
    
화장실 서랍 속에는 헤어 드라이어와 플랫 아이론이 같이 들어 있다. 헤어 드라이어의 플러그를 꽂아 넣고는 플랫 아이론이 작동하지 않는다고 오해한 것이었다. 이런 실수를 한 적이 없었다. 어이가 없었다. 플랫 아이론과 연결된 플러그를 꽂자 빨간 전원등이 수줍게 켜졌다. 얻어서 쓰던 조그마한 미용 도구의 수명이 다 했다고 여기며 지난 몇 년 전 일들을 떠올려 정리하고 있던 모습에 웃음이 났다.

전기가 공급된 플랫 아이론은 뜨거워졌고 거울을 보며 삐친 머리카락들을 가지런히 정리하기 시작했다.

대학교에 도전한 것은 제대로 된 플러그를 사용했던 걸까?’
지금은 어떤 플러그를 쓰고 있는 거지? 인내의 플러그? 건강한 신앙 공동체에 대한 소망의 플러그?’
한 동안 감사의 플러그가 빠져 있었던 것 같아. 그건 하나님을 신뢰하는 플러그도 함께 서랍 속에 갇혀 있었다는 거겠지?’

머릿속에 날아다니는 어쭙잖은 생각들도 아직까지 잘 작동하는 플랫 아이론이 닿을 때마다 가지런하고 예쁘게 정리되면 좋으련만.

12/08/2014

새로운 설거지 짝꿍




우리 교회 주일 점심 식사는 늘 푸짐하다. 반찬이 항상 열 가지가 넘는다. 와우! 후식도 떡과 빵이 늘 있다. 교인들이 각자 알아서 해 온 음식들이다. 대부분 한국 사람 입맛에 맞는 음식들이다. 각자 집에서 늘 해 먹던 음식이 아닌 다양한 것들을 먹는 즐거움이 있다. 다문화 가정의 미국 교인들도 한국 음식을 잘 드신다. 미국 남편과 사시는 교인들은 집에서 한국 음식을 요리할 기회가 아무래도 적다 보니, 그들 또한 주일 점심 식사에 대한 기대가 있는 듯하다. 예배를 드리며 영적인 갈망을 채우는 것만큼 음식에 대한 욕망을 맘껏 채우는 시간이다.

음식은 정해진 순서 없이 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사람이 알아서 준비하고, 식사가 끝나고 설거지는 당번을 정하여 돌아가면서 한다. 두 사람이 한 조다. 젊은이들은 말할 것도 없고 연세 드신 교인들도 마다하지 않으시고 설거지에 동참하고 계신다.

나와도 한 조를 이룬 사람이 있었다. 그분은 여러 가지 사정으로 함께 설거지 할 기회가 거의 없었다. 그나마도 다른 교회로 가버리는 바람에 당번인 주일에 혼자 설거지를 했다. 물론 정말 혼자 한 것은 아니다. 언제나 다른 집사님들이 도와주셨다.

그런데 나에게 다시 설거지 짝꿍이 생겼다. 우리 교회에 나오신 지 얼마 안 된 분이다. 어느 집사님이 내 설거지 짝이 없는 걸 아시고 그분께 설거지를 권유하셨나 보다. 그 분은 흔쾌히 내 설거지 짝꿍이 되어 주셨다. 나도 좋아서 그분께 다가가 저와 설거지 같이 하시는 거예요!” 했다. 그분은 그래유~” 하면서 손을 들어 하이파이브를 요청하셨다. 설거지 하자는데 뭘 이렇게 기뻐하시나 싶었다. 그분은 언제가 당번인지를 물어오셨다. 나는 11월 마지막 주쯤 될 거라고 알려드렸다. 주일에도 한 주 건너마다 직장에 나가셔야 하기 때문에 미리 계획을 짜두셔야 했다. 그 뒤에도 설거지하는 날짜를 계속 확인하셨다.

설거지 당번인 주일. “설거지 할까요?” 했더니 얼굴에 미소가 가득한 채 또 그래유하셨다. 마음이 넉넉해 보이던 첫인상 그대로였다. 갈아 입을 옷과 앞치마까지 준비해 오셨다. 그릇을 세제로 깨끗하게 닦아서 헹구고, 종이 수건으로 물기를 닦아 그릇 주인이 찾아갈 수 있도록 죽 늘어놓았다. 처음이라 뭘 해야 될 지 모르겠다고 하시면서도 손은 계속 움직이셨다. 짝꿍이 있으니 얘기도 나누고, 일도 하는 것 같지 않게 빨리 끝난 것 같았다.

그분과 짧은 시간 동안 설거지를 같이 하면서 마음이 흥분되었다. 설거지는 누가 보아도 궂은 일인데 기꺼이 즐겁게 일하는 그 마음이 내게도 전하여지는 듯했다. 교회 안에 특별히 친한 사람도 없지만 교인들도 목사 아내와 조금이라도 가까운 티를 내지 않으려 한다. 그들에겐 교인들끼리의 관계가 우선인 것이다. 한 지역에서 평생을 같이 부대끼며 살아야 하기에 도드라지는 행동을 하지 않으려는 조심스러움을 자주 느끼곤 한다. 그런데 짝꿍에게서는 그런 마음이 느껴지지 않았다.

설거지를 마치고 짝꿍은 흰 설탕도 여러 봉지 나누어 주셨다. 사실 그 설탕은 거의 매주 떡을 해 오시는 집사님에게 드리려고 가져오신 것이다. 그런데 그 집사님이 설탕을 쓰지 않으신다고 하여 나에게 흰 설탕을 먹냐고 물어오셨다. 나도 흰 설탕을 먹지는 않지만 효소 담글 때 쓰기는 한다고 했다. 그랬더니 나중에 효소 담그는 방법을 자기에게도 알려 달라며 자동차에서 설탕 몇 봉지를 꺼내 주셨다. 거저 받는 설탕 무게만큼이나 설거지하면서 느끼던 설렘도 더해졌다.  

꽤 무거운 설탕 봉지들을 끌어 앉고 내 차가 있는 곳으로 갔다. 설탕을 땅 위에 내려놓고 트렁크를 열어 문을 높이 올렸다. 허리를 굽혀 설탕을 들어올리는데 머리카락이 앞으로 흘러내려 시야를 가렸다. 두 손은 설탕을 들어올리느라 머리카락을 뒤로 넘길 손이 없었다. 앞이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 설탕을 들어올림과 동시에 트렁크 안으로 밀어 넣는데, 으악! 속으로 비명을 삼켰다. 트렁크 문이 스르르 반쯤 내려와 있었나 보다. 눈과 눈 사이에 있는 높지도 않은 콧등을 트렁크 문 모서리에 힘차게 들이댄 것이다.

아무도 주차장에 없길 바라며 뒤로 돌아섰는데 짝꿍이 그대로 서서 지켜보고 계셨다. “괜찮아요?” 물어보시길래 하며 멋쩍게 콧등을 쓸어 내렸다. , 만지지 말 걸…… 가로로 움푹 패인 것이 손을 댈 수 없게 아팠다. 하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 짝꿍과 헤어졌다.

설거지하면서 그리고 설탕을 받으면서 설레었던 마음이 한 순간에 가라앉았다. 콧등이 욱신거릴 때마다 교인들을 대하는 평정을 잃지 말며 거저 받는 것 너무 좋아하지 말라는 신호 같았다. 새로 온 교인과 함께 설거지하며 설렌 마음을 차분히 내려놓고, 주님 안에서 더욱 친밀한 관계로 나아가길 기도하고 있다

12/01/2014

두 권사님


2011 부모님들과 디즈니월드에서(올랜도, 플로리다)



한국에 계신 두 권사님의 이야기이다. 그들은 기질도 다르고 각각 다니는 교회도 다르지만 공통점이 꽤 많다.

우선, 70대의 여성분들로 삶이 곧 신앙생활 그 자체다. 하루의 시작과 끝은 기도이며, 일상 속에서도 예수님을 의지하는 마음은 그들의 태도나 언어에 배어 있다. 주일을 반드시 지키는 것은 물론이요(중병으로 수술을 해도 병원에 마련되어 있는 예배실에서 주일을 지킨다), 교회에서 드리는 예배나 모임에 빠지지 않으신다. 헌금도 적당히 하는 것이 아니라 최선을 다하여 드린다.

두 분은 이웃과 나눌 수 있는 것들을 쌓아두는 법이 없다. 그러면 이웃들은 이 권사님들께 무엇인가를 다시 나눈다. 그들의 나눔은 계속 순환되기도 하고 혹은 필요한 곳으로 흘러가 그걸로 만족하기도 한다. 권사님들은 부유하지도 가난하지도 않게 살고 계신다.

개인적인 성품으로는 부지런하여 일을 미뤄두지 못하는 성격이시다. 해야 할 일이 있으면 당장 끝장내야 한다. 그러다 보면 몸이 지치기도 하는데, 입술에 물집이 여러 개 생기면서 부르트는 모습도 비슷하셨다. 두 분 모두 일을 하시다가 지독한 감기 몸살에 걸리셨다. 몸살 치료하려고 병원에 가셨다가 14, 12년 전에 대장암을 진단받기도 하셨다.

그때만 해도 대장암 수술이 큰 수술이어서 하나님께 자신의 생명을 맡기겠노라, 그래도 살려주시면 신앙생활 더 잘 하겠노라 기도하시고 들어가셨다. 두 분의 수술은 잘 되었다. 그 뒤로 혹독한 항암치료를 견뎌내셨고 5년 동안 정기적으로 몸 상태를 살펴야 했다. 이 세상에서 해야 할 일이 있어 살려두셨을 거라며 더욱하나님을 의지하고 더욱이웃과 나누는 생활을 이어가고 계신다.

두 권사님은 감리교인이라는 말이 부끄럽지 않게 엄청 규칙쟁이다. 먼저 수술 받은 권사님은 입원했던 병실에서 만난 어느 환우로부터 야채 스프와 현미차에 대하여 소개를 받으셨다. 권사님은 퇴원하신 다음 야채 스프와 현미차를 하루도 거르지 않고 5년 이상을 만들어 드셨다. 뒤이어 같은 암에 걸린 다른 권사님은 친분이 깊던 앞서 권사님의 권유로 야채 스프와 현미차를 또 오랫동안 드셨다. 만드는 방법이 간단해 보여도 야채 스프와 현미차를 손수 만들어 오랜 시간 드셨다는 것은 웬만한 정신력과 정성이 아니고서는 할 수 없는 일이다.

일본 식이요법회 회장, 다테이시 가즈(立不一)가 개발한 야채 스프에는 무(4분의1), 무우청(4분의 1), 당근(2분의 1), 우엉(4분의 1, 작은 것은 2분의 1), 표고버섯(화고, 자연 건조한 것 1)이 들어간다. 야채 스프를 먼저 드시기 시작한 권사님은 좋은 재료를 얻기 위해 텃밭에 야채를 무농약으로 키우기 시작하셨다. 집에서 기를 수 없는 것은 재배지에서 직접 구해오기도 하셨다. 또 재료를 많이 구해서 나중 권사님에게 나누어 주기도 하셨다.

야채 스프를 만드는 방법은 다음과 같다.
     야채는 물로 씻어서 큼직큼직하게 썬다.
     야채를 많이 넣지 말고 기본 분량을 꼭 지킨다.
     모든 야채 재료의 양에 3배의 물을 붓고 센 불로 끓인 후 약한 불로 60분 달인다.
     끓이는 기구는 스텐, 알미늄, 유리그릇을 사용한다(테프론, 법랑 용기는 사용하지 말 것).
     보존 용기는 유리병이나 사기그릇을 사용한다.

현미차에는 현미 1홉과 물 8홉이 필요하다. 현미차를 만드는 방법도 옮겨 본다.
     현미를 짙은 갈색이 되도록 볶는다(기름기 없는 용기 사용).
     8홉의 물을 다른 용기에서 센 불로 끓인다. 끓으면 현미를 넣고 불을 끈다.
     5분쯤 후에 채에 받치어 낸 물이 1번 차이다.
     채에 걸러진 현미를 다른 용기에 넣고, 새로운 물 8홉을 부어 센 불로 끓인 후 약한 불에서 5-10분간 끓인다. 다시 채에 받쳐 낸 물이 2번 차이다.
 ⑤ 1번 차와 2번 차를 혼합하여 보관, 사용한다(용기는 유리병, 사기그릇을 사용).

두 권사님들께서는 야채 스프와 현미차를 지극정성으로 드셨을 뿐 아니라 식생활도 많이 달라지셨다. 눈에 띄게 달라진 것은 육류를 많이 드시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쨌든 두 분은 지금까지 건강하게 지내고 계신다. 난 그것들을 마셔본 적은 없으나 두 분을 뵈면 효과가 아주 없지는 않은 것 같다.

2012.1. 한국으로 돌아가시기 전 날. 주일예배 끝나고.

이 두 권사님은 나의 어머님(남편의 엄마)과 엄마이시다. 그들의 견고하고 부지런한 신앙 생활은 나에게 항상 자극을 준다. 내 신앙은 그들보다 유연하고 덜 부지런하다. 우리가 가진 신앙의 모습은 조금씩 달라서 부딪칠 때도 있지만 대부분 서로에게서 배운다.

주일 예배에 가려고 손거울을 들고 화장을 하다 보니 입술에 돋은 좁쌀만한 물집 두 개가 눈에 띄었다. 시력도 갑자기 안 좋아지는 것 같더니 거울에 비친 얼굴을 가까이 들여다 보고서야 알았다. 입술에 물집이 생긴 것은 처음이다. 딱히 힘든 일도 없었는데…… 두 어머니가 문득 생각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