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려움을 이기기 위하여


이 사진은 http://blog.daum.net/nchwang15 에서 가져왔어요.

강원도 동해시에 있는 무릉계곡으로 여행 갔을 때의 일이다. 단짝친구와 둘만의 여행이었다. 대학교에서 만난 우리는 방학이 시작되면 바로 여행을 다녀오곤 했다. 둘 다 신학생이어서 각자 다니는 교회에서 주로 교육부를 맡아 일하고 있었으므로 여름성경학교나 수련회 또는 성탄절 준비로 바빠지기 전에 짧은 여행을 했다. 대학교 3학년인지, 한 학년을 마친 겨울방학이 되었고 우리는 강원도 쪽으로 여행을 하기로 했다. 지금처럼 여행 정보가 넘쳐나는 시절이 아니어서 아마도 미용실에 머리 하러 가서 보게 되는 여성 잡지의 어느 한 구석에서 무릉계곡이라는 곳을 발견하지 않았을까 싶다(친구야, 맞니?).

내 친구 E는 깡마른 체구에 가무잡잡한 피부와 작지만 깊이 있는 눈을 가지고 있다. 새파랗게 젊던 그 시절, E는 이러한 자신의 외모를 맘에 들어 하지 않았다. 요즘 한국에서는 마른 사람이 미인이 되는 분위기다. 지난해 한국에서 여러 친구들을 만났을 때 우선, 겉모습에서 느껴지는 대로 서로 안부를 묻던 중 어느 친구가 E를 바라보았다.

“E, 넌 여전하구나. 하나도 안 변했다.”
시대를 잘 만나서 어깨 펴고 산다.”

다들 공감하는 E의 대답에 한바탕 까르르 웃었던 기억이 난다. E는 대학 생활이 해를 더할수록 학교 안에서 인기가 많은 사람이 되었다. 착한 심성을 가진 데다가 친구들의 얘기를 잘 들어주는 사람이었다. 게다가 연극, 그림, 노래에 뛰어난 재능을 보여 대학이라는 공동체 생활에서 꼭 필요한 사람이 되었다.

E와 절친이었던 나는 강의실과 도서관만 오고 가는 샌님 같았다고 할까.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지만 친구들은 날 범생이(모범생을 낮춰 부르는 말)라고 불렀던 것 같다.

말라깽이와 범생이는 한 인격체로서 성숙해가는 과정 중이었고, 제한적이나마 세상에 대한 탐구와 모험심이 가득했다. 그래서 여행지에 대한 상세한 정보나 별다른 준비물 없이 작은 배낭 하나만 짊어지고 둘만이 떠나는 어설픈 여행이 가능했다.

동해시에 도착해서 저녁을 먹고 나자 한겨울 짧은 해는 이미 저문 상태였다. 기차역 근처였는지(! 그때를 자세히 기억하기에는 시간이 꽤 흘렀나 보다) 여관을 정해 들어갔다. 낯설고 침침한 여관에서 두 여대생이 하룻밤을 묵는 장면은 지금 생각해도 편안하지가 않다. 겁이 많은 나는 헐렁한 여관방 문고리가 마음에 걸려 밤새 뒤척였다. 잠이 많은 E는 잠 못 드는 날 신경도 안 쓰고 무심하게 잘도 잤다. 이제나저제나 기다리던 아침은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밝아왔다.

뻑뻑하고 충혈된 눈으로 세수만 겨우 마치고 여관 문을 나섰을 때 깜짝 놀랐다. 온 세상이 하얬다. 밤새 눈이 온 모양이었다. 무릉계곡이 있는 산에 올라갈 수가 있으려나 아니, 거기까지 가는 버스가 다니기는 하는 걸까 궁금해하면서 동시에 물어 물어 버스를 타고 무릉계곡 입구에 이르렀다

매표소 앞에 다가가 작은 창문을 두드렸다. 아저씨 한 분이 계셨다. 아저씨는 이렇게 눈이 많이 온 날 무슨 일이냐는 표정으로 바라보셨다. 산에 올라가려고 한다니까 아저씨는 매표소 안으로 들어오라고 하셨다. 아저씨는 우리들을 아래 위로 훑어보셨다.

운동화는 신었네. 아직 산에 올라간 사람이 한 사람도 없어. 짐은 여기에 맡기고 가도 돼.”

다른 주의 사항이 있었는지 모르겠다. 아무런 등산 장비 없이 운동화 신은 것만으로 등산이 허락되었다. 그 시절은 그랬던 것 같다.

길이 어디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눈이 쌓여 있었다. 우리가 그날 아침 처음 등산객이니 앞서 간 사람의 발자국도 없었다. 매표소 아저씨가 허락해주어 들어가긴 했지만 참으로 무모한 산행이었다. 의심 많고 두려움이 많은 나는 도저히 발걸음을 뗄 수가 없었다. E가 앞장 섰다. E가 두 걸음 앞서 가면 난 한 걸음을 내디뎠다.

등산길 옆으로는 계곡이었는데 얼음이 얼었는지 물이 흐르고 있는지 보이지 않을 정도로 눈이 쌓여 있었다. 온통 눈으로 덮인 크고 하얀 산에 처음 손님이 되어 찾아 들었으니 흠집 없는 그대로의 설산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그곳을 찾아간 보람이 있었으련만 온 몸이 긴장되어 있어 주변 경관에 눈 돌릴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얼마 걷지 않았는데 발걸음이 점점 무거워졌다. 다리에 힘을 엄청 주며 걸은 탓이었다.

내 기억으로는 입구에서 얼마 멀지 않은 곳에 수백 명이 올라갈 수 있다는 무릉반석이 나온다. 아주 넓은 바위인 무릉반석 위에 서보려면 길에서 내려서서 계곡 쪽으로 걸어가야 한다. 그곳에 이르러 E는 무릉반석 위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내딛는 곳이 바위 위일지 계곡물이 흐르고 있을지 모르는데 말이다. 나는 그냥 그 자리에 서 있었다. E는 무릉반석의 평평한 눈 위에 누워 좋아라 했다. 그래도 난 제자리에서 꼼짝하지 않고 바라보고만 있었다. 이래가지고는 무릉계곡에서 유명한 용추폭포까지 갈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그런데 어디선가 말소리가 들려 돌아보니 아저씨들 몇 명이 보였다. 그들도 겨울산행에 나선 이들 같았다. 아저씨들은 우리와 가벼운 인사를 나누고 앞으로 쭉쭉 나아가셨다. 아저씨들은 길 위에 발자국을 쿡쿡 찍어 놓으셨다. 우리들은 뜻밖에 나타난 아저씨들의 고마운 발자국을 따라 올라갔다. 기대하지 않았던 도움이 우리의 산행을 수월하게 했다.

그래도 눈 쌓인 산길에 대한 두려움은 여전히 나와 동행하고 있었다. 그 두려움을 이기기 위해서 친구와 서로 의지하며 걷고 또 걸어야 했다. 도중에 멈추어 서는 것은 우리의 모험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것이며, 그건 더 두려운 일이었다. 우리가 계획했던 용추폭포에 이르렀다. 우리는 감사하게도 별다른 문제없이 산을 다시 내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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