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크는 집

책을 사면 이름을 써두는 습관이 있습니다.
다른 종이보다 조금 더 두꺼운 표지를 들추고 한두 장을 넘기면 제목, 지은이와 출판사가 찍힌 표지와 거의 비슷한 곳이 있습니다.
그곳 어딘가에 언제, 어디서, 왜 사게 되었는지 두어 줄로 쓰고 남편과 제 이름 혹은 저와 남편 이름을 적어 놓습니다.
아이들 책에는 형, 동생의 이름을 혹은 강윤이 이름만 남겨 놉니다.

어릴 적 엄마가 삼성출판사에서 나온 세계문학전집과 세계백과사전을 사주신 적이 있습니다.
대학 다니기 시작할 무렵 그 책들 가운데 하나를 무심코 폈는데 표지 안쪽에 책을 구입한 날짜와 저와 동생들, 세 남매의 이름이 보였습니다.
그 때는 몰랐는데 오늘에야 돌아보니 자녀의 이름을 정성스럽게 남겨 놓은 엄마의 흔적이 기분 좋았었나 봅니다.
그래서 저도 언젠가부터 엄마를 따라 하게 되었고 책꽂이에 자리 잡고 있는 책 가운데 여러 책들에 저의 흔적을 남겨놓게 되었습니다.

미국에 오면서 가지고 있던 책을 거의 지인에게 주거나 재활용으로 버렸습니다.
끝까지 남은 책들은 최근에 관심있게 본 책, 목회에 필요한 교과서 같은 책, 삶의 방향을 잃지 않기 위한 영성(?)과 관련된 책, 그리고 한글과 한국 정서를 기억할 수 있는 아이들 책입니다.

저도 좋아하는 아이들 책을 몇 권 꺼내어 열어보니 그 책들을 갖게 되었던 때가 확 살아납니다.
『짜장 짬뽕 탕수육』 “당당하게 살자” 2002.11.6(수) 강산.강윤
『조커-학교 가기 싫을 때 쓰는 카드』 “엄마가 사주려고 했는데 강윤이가 고른 책” 2005.3.22
『리네아의 이야기3-신기한 식물일기』 강산.강윤 “언제 봐도 해맑은 리네아가 좋다” 2007.5.23
제가 뭘 이야기 하려고 책에다 남들도 많이 하는 싸인(sign) 얘기를 주절주절 하고 있는지....


얼마 전 다시 읽게 된 책 안쪽을 열어보니 “*** 목사님의 저자 소개로 구입하다/2000.11” 라고 쓰여 있습니다.
개신교 영성신학자 유진 피터슨의 『거북한 십대, 거룩한 십대』라는 책입니다.
아마 그때는 십대를 바라보는 지은이의 관점이 궁금해서 그 책을 읽었던 것 같습니다.
읽고 나서 구체적인 내용 보다는 전체적으로 “그래, 맞아” 했던 기억이 남아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 12개의 작은 제목 하나하나에 대한 내용이 무엇인지 알고 싶어졌습니다.
“강요하지 마세요” “왜 날 항상 못 믿으시는 거예요” “엄마 아빤 위선자예요” “나보고 이래라 저래라 하지 마세요” .......

강윤이는 요즘 들어 부쩍 무엇인가를 제안하면 생각이 같거나 하고 싶은 것이어도 “아니” “싫어”가 먼저 나옵니다.
제 생각에는 조정이나 타협 없이 “마땅히” 해야 할 것들도 강윤이에게는 그렇지 않은 것들이 있습니다.

개학하면 중학교에 가게 되는데 해야 할 방학 숙제가 딱 하나 있습니다.
학교에서 제안해준 6권의 책 가운데 하나를 읽고 독후감 같은 것을 자기소개와 함께 쓰는 것입니다.
강윤이는 처음부터 숙제를 하지 않겠답니다.
영어를 못한다는 이유입니다.
그래도 저는 성의를 보여야 한다며 가을에 지은이가 학교를 방문한다는 그 책을 사다 주었습니다.
185 페이지나 되는 영어 소설을 읽으라는 것이 아니라 표지에 있는 소개의 글이나 머릿글이라도 함께 읽고 숙제를 해주길 바라는 것이지요.
강윤이는 초지일관입니다.

그렇다면 영어 공부 쪼끔 하느라 도서관에서 빌린 그림책들 가운데 생각나는 부분들을 옮겨보고, 한국에서 읽었던 그림책 가운데 영어로 된 책이 있어 그걸로 숙제를 대신해 보자 제안했습니다.
아직 강윤이에게 이렇다 할 반응이 없습니다.

강윤이는 자신의 일을 스스로 결정하고 그에 대한 책임도 져야할 때가 된 것 같습니다.
이전에는 부모의 힘과 지혜를 가지고 통제하는 것이 많았다면 이제는 독특한 강윤이 자신이 되도록 허용할 부분이 커지나 봅니다. 통제와 허용의 경계가 어딘지 조금 혼란스럽지만 깨닫고 경험하게 되겠지요.
유진 피터슨은 “젊은 성인에게 아기가 하나님의 선물인 것처럼, 청소년기 자녀는 중년의 성인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이라면서 자칫 성장이 멈춰버린 중년의 부모가 자녀와 함께 성장할 수 있는 기회라는 것입니다.

미국에 와서 정기적인 기도 시간을 내지 못했는데 결국은 강윤이를 빌미로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영어 때문에 사람과 관계 맺는데 어려움 겪는 것을 보면서 또 그것 때문에 감정이 상하는 것을 지켜보면서 제가 대신해 줄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하나님을 찾게 되었습니다.
이기적인 기도인 것을 알지만 어쩔 수 없습니다.
Summer Camp가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부터 강윤이-더불어 가족들 모두-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알게 하시고 제 간절한 소망 받아 주시길 새벽마다 기도하고 있습니다.
이번 주가 Summer Camp 마지막인데 제 나름대로 정한 40일도 끝날 것 같습니다.
기도할 수 있도록 예민한 사춘기를 겪고 있는 사랑스러운 강윤이 주신 것이 감사할 뿐입니다.

“하나님 이 시간에 깰 수 있도록 도와주셔서 감사해요.
하나님이 우리 강윤이를 엄청 사랑하신다는 것을 알아요.
강윤이도 하나님 사랑을 잊지 않고 늘 기억하게 해주세요.
하나님과 사람에게 인정받는 사람되게 해주세요.
강윤이를 향한 하나님의 놀라운 뜻을 우리가 깨닫길 원합니다.
영어를 잘 할 수 있는 지혜도 주세요.
오늘 Summer Camp 즐거운 시간되게 함께 해주세요.
신실하고 정직하고 즐겁게 아이들과 함께 커가는 부모가 되고 싶어요.”

『거북한 십대, 거룩한 십대』에 오래 전 남겨놓은 메모 위에 이렇게 덧붙여 놓았습니다.
“강산 15세, 강윤 12세-2008.7 아틀란타에서 두 번째 읽다.”

"그 작은 자가 천을 이루겠고 그 약한 자가 강국을 이룰 것이라 때가 되면 나 여호와가 속히 이루리라"(사60:22)

댓글

  1. 사모니임~. 수인 엄마예요...열번에 한번쯤 연결되는 인터넷이 지금 연결중이네요*^^*.
    저도 가끔 책에 이런저런 기록을 적어두긴 했었는데.. 아이들이 자라면서 아이들과의 기록을 적어두는건 참 좋은 일인거 같아요. 저도 앞으로 이렇게 해야겠어요. 좋은 아이디어를 얻어가네요. 여기 사모님의 글들도 좋구..삶이 담긴 사진들도 좋구..나들이 사진들은 살짝 부럽기도 하구..그래요.
    종종 들를게요. 오늘 많은 시간 함께 해 주셔서 감사해요. 종종 제 얘기도 들어주시고 사모님의 삶도 나눠주세요.
    사랑하고 축복합니다.

    답글삭제
  2. 강산아 강윤아 큰삼촌이다 수영하는 모습보니 부럽당~~~~~
    미국이란나라에 잘 적응해나가니 대견습럽다 누나도 마음에 안정좀 찿았어? 난 3주동안 부산내려가 촬영하고 어제 올라왔어
    여긴 때아닌 장마에 물난리야 거기날씨는 요즘어때? 오늘부터 여름성경학교가 시작됐어 난 사진찍어주느라 바빠
    아이들이 별로없어서 허전한 느낌이 들정도야 매형도 잘지내시죠? 담에 또 들어올께요

    답글삭제

댓글 쓰기

이 블로그의 인기 게시물

북어대가리

친구가 준 졸업 반지

소설『높고 푸른 사다리』를 읽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