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0/2015

마냥 좋지는 않아도 봄은 새롭다






강화에 사시는 어머님과 전화 통화를 하던 중 중부 지방에 비가 내리지 않아 봄 가뭄이 심하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수리조합에서 관리하는 물이 삼분의 일 밖에 남지 않았는데 좀처럼 흔하지 않은 일이라고 하셨다. 여긴 비가 많이 와야 댜~, 라는 말씀에 물이 부족한 것에 대한 안타까움이 느껴졌다.

여기 사우스캐롤라이나는 겨울이 우기라서 눈은 거의 오지 않고 비가 자주 내린다. 겨울 내내 일주일에 하루 이틀은 비가 오더니, 봄이 지나가고 있는 요즘도 흐린 날이 많고 비도 심심치 않게 찾아온다. 어머님네는 비가 오길 바라고 있는데 이곳은 비는 그만 오고 따뜻한 햇볕이 나서주길 기다리고 있으니 사는 처지가 참 다르다.

교인 가운데 병원에 입원한 분이 계셔서 병문안을 가기 위해 집을 나섰다. 그 전날 비가 오기도 하고 기온도 떨어져서 그런지 하늘이 더없이 깨끗하고 파랬다. 높이가 낮은 건물들 덕분에 넓은 하늘이 한눈에 들어오고, 솜 덩어리 같은 뭉게구름도 하늘 한가득 그림 같이 떠 있었다. 이렇게 맑고 포근한 하늘을 몇 달 만에 보는 것 같았다. 기분이 슬슬 좋아졌다. 이왕이면 자동차의 창문을 열고 봄바람도 느껴보고 싶어졌다. 창문을 반쯤 열고 잠시 달렸는데 목이 컥, 하고 막혔다.

꽃가루 때문이었다. 특히 천지에 퍼져 있는 송홧가루. 봄철 동안에는 노란 송홧가루가 건물 밖에는 어디나 날아다닌다. 그래서 꽃가루 알러지가 있는 사람들은 재채기, 콧물, 눈병, 가려움 따위로 아주 힘들어 한다. 알러지가 없던 사람들도 이곳에 사오 년 살다 보면 알러지가 생긴다고 한다. 사람이 무던한 건지 둔한 건지 나는 아직 꽃가루의 영향을 별로 받고 있지 않다. 그런데 달리는 자동차의 창문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송홧가루에는 나도 어쩔 수 없었다. 청명한 봄하늘은 가슴을 설레게 하는데 꽃가루는 몸을 괴롭게 했다. 모든 것이 마냥 좋을 수는 없는가 보다.


부활주일을 앞두고 교회에서 대청소를 했다. 교회 마당에서는 나무와 꽃들 사이에 솔잎을 깔아주었다. 남성 교우들과 아이들이 그 일을 맡아주었다. 커다란 솔잎 덩어리 80단이 교회 울타리 아래로 넓게 흩어졌다. 교회 건물 뒤편에도 솔잎이 필요한 곳이 있었는데 솔잎이 모자라 올해는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전에 솔잎을 주문하던 교우가 없어 100단 정도가 필요한 것을 미처 헤아리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교회 주변에 솔잎이 깔리고 나니 더욱 깔끔하고 넉넉해 보였다.

교회 안에서는 지난 몇 년 동안 사용하지 않던 물건들을 전부 정리하여 버리기로 했다. 방마다 사물함이나 책상 위에 무심히 쌓여 있는 물건들은 거침없이 커다랗고 까만 쓰레기 봉투로 들어갔다. 주방에 있는 그릇 수납장은 여러 사람이 일을 거들어야 했다. 주방 도구들을 죄다 끄집어내고, 수납장 바닥을 깨끗이 닦고, 꺼내 쓰기 편리하게 그릇들을 재배치 하였다. 쓰지 않고 자리만 차지하고 있던 것들은 필요한 사람이 가져가든가 버렸다. 있는지 몰라서 사용하지 못했던 물건들을 찾아냈을 때는, 지난날 적절히 쓰여지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과 앞으로 편리하게 사용될 것을 기대하는 눈빛을 서로 교환하기도 했다.

올해 부활절 맞이 대청소에는 여느 때와는 달리 많은 교우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전에는 교회 일이 아주 적은 수의 사람들에 의해 결정이 되고 나머지 사람들은 수동적으로 따라가거나 아예 관심도 갖지 않았다. 그런데 이번 대청소는 친교실 증축과 함께 여러 교우들이 교회에 관심을 갖게 되는 또 하나의 계기가 되었다.

구태의연한 교회에서 벗어나서 사람들의 영혼을 살리는 생명력 있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는 새로운 흐름이 교우들 사이에서 생겨나고 있다. 이러한 마음들이 모아져 결정된 친교실 증축이 못마땅하여 교회를 떠난 사람들도 있다. 그 사람들을 생각하면 모든 것이 마냥 좋아 보이지 않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교우들 대부분이 우리 교회를 향한 하나님 뜻이 무엇일까를 묻고 또 물으며 이 새로운 변화의 흐름에 끈기 있게 동참하고자 마음 먹고 있다. 생명이고 진리이신 주님이 동행해주시길 겸손히 바라며 새로운 길을 가다 보면, 모든 것이 협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셨음을 고백하게 되리라 믿는다. 새로운 변화를 이어갈 담대한 용기가 주님으로부터 흘러나온 것이길 기도하고 또 기도한다

3/09/2015

일상 속의 페이스메이커(Pacemaker)




어느 집사님께서 심장 기능이 안 좋아져서 치료 받으시는 과정을 지켜본 적이 있다. 처음에는 약물로 치료를 하다가 증상이 나아지지 않아 페이스메이커(Pacemaker)라는 심박조율기를 심장과 연결하게 되었다. 이 조그마한 장치는 집사님의 어깨 아래 피부 속에 심겨졌다. 페이스메이커에서 나온 전선은 심장에 가 닿아 있어서 심장 박동이 정상이 되도록 자극을 주는 기계라고 했다. 이런 기계가 있다는 것을 처음 알게 되었는데 그 뒤로 연세 드신 어르신들 가운데 페이스메이커의 도움을 받는 분들이 여럿 계심도 알게 되었다. 심장이 자연스레 튼튼하면 더욱 좋겠지만 그렇지 않아도 인공적으로 만든 기계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니 고마운 일이라 여겨졌다.

심장 박동이 느려지면 페이스메이커는 이것을 감지하고 심장을 자극하게 되는데, 가만히 보면 일상 속에서도 안일하거나 게을러진 삶의 태도를 자극하는 여러 일들을 만나곤 한다.

토요일마다 열리는 이곳 한국학교에서 가르치는 일로 두 번째 학기를 보내고 있다. 지난 학기에 나의 반이었던 아이들과 새로 등록한 아이들을 만나 한글 낱말들을 익히고 그 낱말들을 이용하여 문장 만들기를 꾸준히 연습하고 있다. 아이들이 별로 좋아하지 않으나 매주 숙제를 내주고 받아쓰기 하는 것은 웬만하면 거르지 않는다. 집에서 쉬고 싶은 토요일에 한국어를 배우러 나온 아이들이 지루해하지 않고 공부할 수 있도록 나름 이 궁리 저 궁리 하여 학습계획안을 작성하기는 하는데, 수업이 다 끝나고 나면 부족함을 종종 느낀다.

수업 일정에는 특별활동 시간도 있어서 만들기나 노래, 소고춤, 장구춤, 그리고 케이팝을 부르며 춤을 추는 반으로 나누어진다. 나의 반 아이들은 장구춤을 추는 반에 모두 들어가 있다. 이번 학기 특별활동에서 배운 것들은 가을에 열리는 한인축제에 나가 공연하기로 결정되었다. 그래서 활동 내용을 좀 더 확실히 익힐 필요가 생겼고 장구춤반은 내게 맡겨졌다. 장구춤반 아이들은 다른 선생님들과 지지난 학기부터 배워오고 있었고 난 몇 번 지켜본 적이 있을 뿐이었다. 아이들은 이미 춤 순서를 제법 외우고 있는 듯이 보였다. 이번 학기가 이미 시작되고 어중간하게 장구춤반을 담당하게 되었지만 복잡하지 않은 몇 가지 동작을 반복하는 춤이기에 아이들이 하는 것을 보고 배우면 되리라 편안하게 생각했다.

장구춤반을 맡은 첫 시간이었다.
선생님이 아직 춤 순서를 다 외우지 못했어. 너희들이 하는 걸 먼저 볼게. 너희들이 좀 가르쳐 줘~.”
그 동안 관계를 쌓아온 나의 반 아이들이 대부분이니 반은 공손하게 반은 애교를 섞어 솔직한 부탁을 했다. 가수 윤도현이 부른 아리랑 노래에 맞추어 춤을 한 번 끝냈다. 내 눈에는 아이들에게 따로 가르칠 것이 없을 정도로 잘 하였다. 춤 순서를 아직 외우지 못한 사람은 나 뿐인 것 같았다. 하지만 아이들이 잘 하니 걱정할 것이 없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아이들을 두 모둠으로 갈라 서로 춤추는 모습을 지켜보자고 했다. 한 모둠이 앞서 한 것처럼 잘 끝냈다. 다른 모둠이 뒤를 이어 춤을 추기 시작하였다. 에구, 이걸 어째! 두 번째 모둠 아이들은 춤 순서를 몰라 우왕좌왕 하면서 나를 흘깃흘깃 바라보았다. 선생인 내가 춤 순서를 지시해주길 바라는 눈길이었다. 아이들을 도와주려고 했지만 나 역시도 헤매기는 마찬가지였다. 이 아이들은 그 동안 순서를 잘 아는 다른 아이들을 보고 따라 한 것이었나 보다. 당황스러웠다.

그때 마침 지난 주까지 장구춤을 지도하던 선생님이 지나가시며 잘 돼?, 하고 아이들에게 물었다. 그러자 아이들이 우르르 그 선생님에게 몰려가 영어(!)로 불평을 하는 것이었다.
저 여자는 이 춤을 혼란스러워해. 엉망이야.”
순서 좀 틀리면 어때. 틀린 곳을 알았으니 다시 잘 배우면 되지!”
난 아이들이 쏟아놓는 불평을 듣다못해 호기롭게 말했다.

그 선생님은 아이들을 정돈시켜 세우고 다시 한 번 음악에 맞추어 춤을 가르쳤다. 아이들에게 여유로운 듯 대꾸를 했지만 그 노래 한 곡이 끝나기까지 씁쓸한 기분은 가시질 않았다. 적어도 나의 반 아이들과는 친밀함을 쌓아가고 있고, 나를 도와달라고 부탁까지 했는데 춤 한 판에 지들 선생을 그렇게 몰아세우다니…… 그러면서 순간, 그저 잘한다, 잘한다 하던 아이들을 평가하는 내 자신을 보았다. 사실 춤 순서를 완벽하게 외우고 있는 아이나 시작한지 얼마 안 돼서 순서를 잘 모르는 아이들은 말이 없었다. 불평하는 아이들은 배운지 오래 되었는데 집중하지 않아 순서를 익히지 못한 아이들이었다.

집으로 돌아와서도 그 일이 자꾸 떠올랐다. 아이들을 가르쳐야 할 사람이 아이들 하는 것을 보고 배우겠다고 생각하다니 너무 안일했다. 아이들이 페이스메이커가 되어 게으른 나에게 에잇, 받아라, 하며 자극을 보낸 것 같았다. 그렇다고 아이들의 행동을 비난하거나 내 자신을 자책하고 싶지는 않다. 가르치는 역할을 건강하게 수행할 수 있도록 따끔한 자극이 온 것일 뿐이다. 어리기만 한 아이들과 어설펐던 내가 한국학교에서 즐겁고 재미있게 서로 배우고 가르칠 수 있는 길을 찾아야 한다.

이번 자극을 계기로 아이들에 대한 뭉뚱그린 생각이 아니라 세밀한 평가는 어떻게 가르칠 것인지를 아는데 도움이 될 것이고, 장구춤반 선생에게 필요한 것은 춤을 잘 추는 게 우선일 것이다. 교회학교에서 율동 가르치던 실력을 오랜만에 발휘해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