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올 이즈 로스트(All is lost)"를 보고





얼마 전 눈이 거의 안 오는 이곳에 눈이 내려 좋아라 했었다. 그런데 이번 주에 더 많은 눈이 내렸다. 눈이 많이 쌓인 곳은 거의 20 cm(거의 8 인치)쯤 된다. 아이들도 눈이 내리기 시작한 날은 수업을 절반만 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다음 주 프레지던츠 데이(Presidents’ Day) 공휴일까지 합쳐 일 주일을 집에서 쉬는 방학 아닌 방학을 맞았다.

사르르 쌓이는 눈과 우박처럼 생긴 얼음 눈이 마구 섞여서 내렸다. 기상정보를 알려주는 텔레비전 방송에서는 교통사고, 정전, 학교나 공공기관 폐쇄와 같은 소란스러운 뉴스들이 마구 쏟아져 나왔다. 눈 폭풍은 이 세상의 당황스러움과 시끄러움을 알지만 자신도 어쩔 수 없다는 듯 엄청난 눈과 비를 우리에게 다시 돌려주고 있다. 지구의 기후 변화뿐 아니라 뭔가 변화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우주, 지구, 내가 사는 곳……

! 정말 엄청난 일이 벌어졌다. 뒤뜰에 눈 내리는 모습을 넋 놓고 바라보다가 갑자기 나가서 눈 속에 서 있어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뒤뜰로 나가는 문을 밀었다. 문이 열리지 않는다. 눈이 쌓이는가 싶더니 눈 깜짝할 사이에 문을 열 수 없을 만큼 눈을 쌓아 놓았다. 일기예보와 지난번 눈에 대한 경험에 의하면 이렇게 눈이 쌓여도, 눈이 그치고 하늘이 맑아지면 이 정도의 눈은 어느새 녹아버릴 것이다. 그걸 알면서도 뒤뜰로 나가는 문이 열리지 않으니(현관문을 여는 데는 아무 문제가 없다. ^^) 집안에 갇힌 느낌이 살짝 들면서 고립무원(孤立無援)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그 뜻을 찾아보니 고립되어 구원받을 데가 없다이다. 내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단어라는 생각에 힘없는 웃음이 풋, 하고 나왔다

꼬박 이틀이 지나 눈이 그쳤다. 먹이를 찾아 나온 새들도 보인다. 담 넘어 도로에 오고 가는 자동차의 모습도 드문드문 보인다. 요즘 달달한 음식이 땡긴다는 둘째 아이의 말도 생각나고 하여 도넛을 먹고 싶다고 남편을 꼬드겼다. 도로 위에는 눈이 얼마나 녹았는지 살펴볼 겸 나갔다 오라고. 남편은 또 첫째 아이를 달래어 함께 나갈 채비를 했다. 두 사람이 나간 지 얼마 되지 않아 돌아왔다. 도넛 가게가 문을 열지 않았다고 했다. 그리고 손에 들려 있는 것은 DVD 두 장. DVD 자판기에서 빌려온 것이다.

그 중 하나가 로버트 레드포드 주연의 올 이즈 로스트(All is lost)” 였다. 눈 때문에 집 안에만 머물러야 하는 약간의 갑갑함을 해소할 요량으로 영화에 집중했다. 주인공의 나이든 모습을 보니 오래 전에 찍은 영화는 아닌 듯 했다. 레드포드가 타고 있던 요트가 바다에 떠다니던 컨테이너에 부딪히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이 영화는 특이하게 대사가 거의 없다. 영화 초반에 고장난 무전기가 잠시 작동을 하면서 구조 요청 하는 몇 마디 말을 들을 수 있다. 후반부에서는 마실 물이 담긴 통에 바닷물이 들어가 섞인 것을 보고 God / Fuck 라는 대사를 들을 수 있다. 그리고 다른 배를 만났을 때 거의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Help를 몇 번 외치는 것을 빼고는 대사가 없다. 내 기억으로는 배경음악 조차도 영화가 거의 끝날 때쯤 들을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도 영화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주인공의 몇 마디 말이 이 영화에 필요한 모든 대사를 담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다.

주인공은 바다와 배에 대하여 풍부한 경험과 지식이 많은 사람인가 보다. 자기가 타고 있던 배 옆구리에 구멍이 났을 때도, 폭풍이 몰아칠 때도, 배가 침몰할 때도, 심지어 구명보트가 다 타버릴 때도 그는 침착하다. 무엇인가를 계속해서 잃어버리는 절망의 연속이다. 주인공은 이런 고립무원(이럴 때 딱 맞는 단어였다!)의 상황에서 맞서지 않고 능숙한 솜씨로 주어진 상황에 담담하면서도 부지런히 대처한다. 하지만 마지막에는 그가 타고 있던 구명보트까지 다 잃어버린다. 그리고 그는 모든 의지를 놓은 채 자신의 생명을 바다에 맡기려 한다.

안돼!”

영화를 보던 첫째 아이의 외침이다.

왜 여태껏 잘 해 놓고……”

나도 너무 아쉬웠다. 영화는 그 뒤에 한 장면이 더 남아 있다.

올해 78 세가 된 로버트 레드포드의 더 함도 덜 함도 없는 깊이 있는 연기를 감상할 수 있었다. 알고 보니 지난 해에 상영된 얼마 안 된 영화였다.

영화가 끝나고 그 이야기 속에 우리네 인생의 단면이 들어 있는 것 같아 가슴이 먹먹했다. 한 발을 겨우 빼고 나면 다른 한 발이 이미 깊이 빠져들고 있는 수렁 같은 상황을 만났을 때 나는 어떤 모습이었나. 폭풍우가 치는 바다 한 가운데에서 구멍난 배를 타고 있는 것 같은 현실을 만나면, 난 얼마나 의연하고 능숙하게 헤쳐나갈 수 있을까.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 그나마 위안이 된다.

그 많던 눈들도 한 나절 만에 절반 넘게 녹아 내렸다


댓글

  1. 오호! 드뎌 이 집엘 들어왔네. 벌써 수년동안 블로그를 운영해 온 내공이 흠흠.. 오늘 오랫만에 반가웠고, 앞으로는 종종 글 산책하러 올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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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방문해주셔서 감사해요. 편안함을 드릴 수 있는 산책이 되면 좋겠는데... 저도 반가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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