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4/2009

냇가에 심은 나무 한국학교를 마치는 즈음에


우리 교회 부설기관인 “냇가에 심은 나무 한국학교”에서 우리 반 아이들과 「아낌없이 주는 나무」를 함께 읽은 적이 있습니다.
지난 학기에는「가방 들어주는 아이」(고정욱 지음, 사계절)라는 창작 동화를 읽으면서 서술어를 익히는 연습을 했습니다.
이번 학기에는 조사(助詞)를 배워볼 생각으로 앞뒤 문맥이 이해하기 쉬운 「아낌없이 주는 나무」(쉘 실버스타인, 시공주니어)로 시작을 했습니다.
아이들도 한번쯤 읽어본 적이 있고 내용이 이해하기 쉽다고 여겨져 그 책을 선택한 것입니다.

「아낌없이 주는 나무」는 아주 오래 전에 읽은 책으로, “사랑은 이런 거야”를 보여주는 좋은 책으로 기억에 남아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책을 다시 읽으면서 결혼 전에 읽었을 때와는 전혀 다른 감동에 사로잡히게 되었습니다.

소년이 자라나 나무를 떠나있는 시간이 많아지고 나무를 찾아갈 때마다 무엇인가를 요구하면 나무는 다 내주었습니다.
나무는 소년이 와서 돈이 필요하다고 하면 사과를 주고, 집이 필요하다고 하면 가지를 내어주고, 배 한 척을 만들어 멀리 떠나고 싶다고 하면 줄기를 베어가도록 합니다.

이 부분에서 “그래서 나무는 행복했지만....... 정말 그런 것은 아니었습니다.”라고 쓰고 있습니다.
잠시 저는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자기가 주고 싶어서 다 줘 놓고는 정말 행복한 것은 아니라니?’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나이가 든 소년은 나무를 다시 찾아옵니다.
소년이 무엇을 달라고 한 것도 아닌데 나무는 줄 것이 없어 미안해합니다.
“이젠 나도 필요한 게 별로 없어.
그저 편안히 앉아서 쉴 곳이나 있었으면 좋겠어.
난 몹시 피곤하거든.”
소년이 말합니다.

그러자 밑동 밖에 남지 않은 나무는 안간힘을 다해 몸뚱이를 펴면서 말합니다.
“자, 앉아서 쉬기에는
늙은 나무 밑동이 그만이야.
얘야, 이리로 와서 앉으렴.
앉아서 쉬도록 해.”
소년이 그렇게 하자 나무는 행복해합니다.

나무는 소년과 함께 있어 행복한 것 같기도 하고, 소년에게 뭔가 해줄 것이 있어 행복한 것 같기도 하고 그렇습니다.
나무가 부모님의 모습을 비춰주고 있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뭉클했습니다.

우리 반 아이들에게 물어보았습니다.
“이 책에서 말하려고 하는 것이 뭘까?”
한 친구가 얼른 손을 번쩍 듭니다.
“부모님 사랑이요.”
이럴 수가!
저는 결혼해서 아이들 키우며 이제야 알듯 모를 듯한 그것을 그 친구는 자신 있게 대답하다니...

우리 반 아이들보다 조금 더 먼저 살아온 저는 그 책에 나오는 소년이 되기도 하고 나무가 되어보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 나무처럼 모든 것을 다(?) 내어주는 사랑은 아닐지라도, 한 학년 동안 저와 함께 한국말을 배운 우리 반 친구들에 대한 사랑 비스름한 것들을 느낍니다.

우리말을 더욱 아끼고 사랑하는 것을 통하여 한국 문화와 역사에 더욱 관심 갖기를 바랬고 그래서 자랑스런 Korean-American으로 자라나는데 적은 지식이나마 우리 반 친구들과 나누고 싶었습니다.
귀엽고 예의 바른 우리 반 아이들을 보면서 얼마나 예뻤는지 모릅니다.

어느새 두 학기를 마치는 때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비록 일주일에 한번이지만 가르치는 곳에 설 수 있어서 좋았고 어리고 순수한 아이들과 함께 있어서 즐거웠습니다.

언젠가는 성경 말씀도 이렇게 즐겁고 편안한 마음으로 아이들에게 이야기하고 또 이야기하며 나이 들어가고 싶어지는걸요.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또 진실하여 허물 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 /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빌1:9-11)

4/17/2009

행복한 꿈나라로


밀알에서 주최하는 장애인의 날 기념예배를 세 번 드리게 되는데 오늘 그 두 번째 예배를 마쳤습니다.
11시 넘어 들어와 이제 컴퓨터 앞에 앉습니다.
자야겠습니다.

네 잎 클로버의 뜻이 "행운"이라죠?
그런데 네 잎 클로버는 찾기가 어렵습니다.

그와는 달리 세 잎 클로버는 흔하게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누군가는 세 잎 클로버의 뜻을 "행복"이라고 하더군요.
우리 가까운 곁에서 찾아볼 수 있는 행복.

제 주변에 맘 따뜻한 사람들이 있어서 행복합니다.
그걸 발견하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행운보다는 행복을 찾겠습니다.
행복한 마음으로 편안한 잠을 청해야 할 것 같습니다.
*^^*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 뿐더러 /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 /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빌3:7-14)

4/10/2009

속물(俗物)과 속물(贖物)

<우리 교회 현관 안쪽 벽에 장식되어 있는 십자가들>
-교인들 가정마다 십자가를 하나씩 꾸며서 모은 것입니다.
십자가가 계속 늘어나고 있는 중이랍니다.
성금요일 묵상예배에 다녀왔습니다.
며칠 마음을 힘들게 하던 문제를 가지고 드린 예배였습니다.
예수님 안에서, 예수님 닮아가는 삶을 살고 있는가?
세상과 벗하여 살면서도 거기에 매이지 않는 자유한 삶.

길지 않은 지난 삶을 아무리 곱씹어 보아도 대답은 아직도 속물(俗物)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안타까운 대답만 남습니다.
조금만 시간 내어 기도해 보아도, 좋아하는 말씀 한 장만 읽어 보아도 온통 감사할 것 뿐인데 언제까지 이리 정신 못 차리고 투정하고 살 것인지 한심한 노릇입니다.

오늘 예배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하신 일곱 말씀을 묵상하는 예배였습니다.
첫 번째 말씀과 두 번째 말씀을 읽고 찬송하고 기도하는 동안 천둥과 번개가 치면서 비가 쏟아지는 소리가 예배당에 가득했습니다.
마치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셨던 그 때도 이런 소리가 났을까 싶었습니다.
제 생각에는 예배 분위기 하고 잘 어울리는 소리였습니다.

그 순간에도 저는 동시에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자동차에 송화 가루 천지인데 잘 됐다. 아주 깨끗해지겠는데.’
꽃가루가 많은 계절이라 제 차가 송화 가루에 온통 뒤덮혀 있어서 비가 언제 오려나 했었거든요.
어느 목사님은 교인 가운데 세차장 하는 사람이 있어 주말에 비오는 것이 안타깝다고 하셨는데 저는 제 것에만 관심 충만이지요.
게다가 예배에 집중해야할 시간이구요.
이러니 속물이지요.--!

우리 교회에서 드린 성 금요일 기도회 프로그램은 미 연합 감리교 예배서를 참조한 것이라고 합니다.
올해 예배에서는 순서 가운데 있는 공동기도문이 마음에 남았습니다.
여러 개의 기도문 가운데 두 개만 옮겨보겠습니다.

"영원하신 하나님, 하나님만이 우리를 하나되게 하심을 믿습니다.
우리를 도와 주시옵소서.
우리의 교회를 도우셔서 하나님과 또 우리 서로간에 행하도록 주어진 사명을 잘 감당케 하시옵소서.
우리 가운데 불친절한 태도를 없애주시고, 성냄이나 덕스럽지 않은 말 따 위를 없게 하시옵소서.
부드러운 마음을 주시고 서로가 깊은 관심과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게 도우소서.
다른 사람의 아픔과 어려움을 우리 자신의 것처럼 느낄 수 있게 하시며, 또 우리 서로가 다른 사람의 부족함을 인내로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 주시옵소서.
이기적이지 않게 하시고 매일의 삶을 사랑 가운데 걸으며 예수 그리스도를 닮게 하시길 간구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

기도문에 끝에 “예수 그리스도를 닮게 하시길” 이란 구절이 있는 줄 몰랐습니다.
그 부분은 지금 발견한 것입니다.
어제 오늘 제 기도 내용이었거든요.
하~~~

"자비로우신 아버지, 우리 주님이 오늘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십자가에 달리심을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기다립니다.
이 자리에 함께 한 우리 모두가 십자가를 향한 믿음 가운데 살게 하옵소서.
우리 자신들이 지니는 그리스도인 답지 못한 마음가짐이나 욕망을 십자가에서 버리게 하옵소서.
주님이 보여주신 남 섬기는 사랑을 매일의 기도를 통해 닮게 하옵소서.
우리가 가진 모든 썩은 것들과 불신앙의 소산을 제거시키셔서 이제는 옳은 일함에 두려움 갖지 않게 하시고 옳지 않은 일은 생각조차 하지 않게 하옵소서.
언제나 하나님이 기뻐하는 삶을 살아 당신께 영광 돌리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사순절 동안 이 세상에서의 내 존재에 대한 물음을 가지고 있었는데 뻔한 결론으로 부활절을 맞게 될 것 같습니다.
별 수 없습니다.
제게 다른 길은 없습니다.
제가 아무리 보잘 것 없는 속물(俗物)이라 해도, 속물(贖物)로 오신 예수님 따르는 길을 당당하게 갈 것입니다.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 가라사대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고 영혼이 돌아가시니라”(요19:30)

4/03/2009

비스킷 구우며


다음 주가 봄방학이라는 얘기를 다시 한번 기억나게 해주자 잠자리에서 가볍게 일어나 학교에 가는 강산이를 저도 기분 좋게 배웅하고 들어왔습니다.
아침에 먹을 빵(biscuit)을 구워보려고 합니다.

지난 주 한국학교 교사들 아침 간식으로 조그맣고 동그란 빵을 주셨습니다.
고소한 버터 냄새가 나고 노르스름하게 잘 구워진 빵에 딸기잼을 발라 먹으면 맛있다며 선생님들이 두어 개씩 가져가셨습니다.
저도 빵에 잼을 대충 발라 교실로 가져와서는 수업이 끝나면 먹으리라 생각하고 한쪽에 밀어두었습니다.
그리고는 아이들 올 때까지 자료를 정리하며 수업 준비하고 있는데 빵 냄새가 얼마나 맛있게 나는지 밀어둔 그릇을 다시 끌어왔습니다.
하나를 뚝딱 먹고는, 하나 더 가져올 걸 그랬다고 생각했습니다.

1교시가 끝나고 아이들은 특별활동 하러 다른 장소로 갑니다.
그 시간에 우리 잎새반 선생님들과 조교들이 한 교실에 모여 수업과 관련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게 됩니다.
그 교실에 갔는데 비스킷이 또 눈에 띄었습니다.

옆에 계신 선생님께 빵 맛이 괜찮다 했더니 집에서 구워먹을 수 있다고 하십니다.
“그래요?”
그 선생님이 가르쳐 주신 것 가운데 더 신기한 것은 반죽이 다 되어있어서 오븐용 쟁반에 떼어 놓고 굽기만 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미국 음식 가운데는 요리하기 편하게 되어있는 상품이 많다는 얘기는 들었는데 빵 반죽도 있다니 빵 좋아하는 저에게는 솔깃한 정보입니다.
이곳 사정에 밝지 않은 저를 위해 어디서 팔며 상점의 어느 위치에 가면 있을 거라는 자세한 설명도 해주셨습니다.

아침에 얼른 잠자리에서 일어나지지 않을 때 빵하고 커피 마실 생각을 떠올리면 잠을 깨는데 어느 정도 도움이 됩니다.
오늘은 특별히 미국 마트인 크로거(Kroger)에 가서 사온 비스킷을 굽고 막 내려 만든 커피를 마시려고 합니다.

비스킷 반죽이 들어 있는 캔 표지를 살펴보니 오븐을 375℉로 예열한 후에 11~15 분쯤 구우라(bake)고 써 있습니다.
별로 어렵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 집에 있는 오븐은 어떻게 예열을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매뉴얼도 없고.

어떻게든 해보려고, 갈비를 한번 오븐에 구워본(broil)적이 있어 비슷한 방법으로 버튼을 눌러보았습니다.
bake 버튼을 누르자 온도가 100℉부터 시작을 합니다.
동그란 밀가루 반죽을 하나씩 떼어 담은 쟁반은 오븐 안에서 맛있는 비스킷이 되려고 준비하고 있습니다.
조금 지나니 온도가 점점 올라갑니다.
‘아, 저렇게 온도가 높아지는구나’ 하는데 오븐 위로 연기가 솔솔 올라옵니다.
조금 이상합니다.

오븐을 열고 보니 비스킷 아래쪽이 벌써 검어졌습니다.
예열이 충분히 되고 나서 쟁반을 들여놨어야 하는데, 온도가 오르면서 열기가 올라오는 비스킷 아랫부분이 다 타버렸습니다.
웃음이 납니다.
조그만 빵 이름이 비스킷 이라는 것도 알고, 가게에 가서 사와서, 오븐을 사용할 줄 몰라 다 태워먹고 이른 아침에 우두커니 그걸 바라보고 있는 제 모습이 재미있습니다.

잠깐 그것들을 바라보고 있자니 꼭 시커먼 제 마음 속 같습니다.
일을 하다 보니 여느 때와는 달리 점점 말이 많아지는 것 같습니다.
생각을 먼저 하고 말하려고 해보지만 어느 상황에서는 정리되지 않고 걸러지지 않은 생각들을 말하게 됩니다.
남들과 비교 하는 말들, 의심, 미움, 물질 앞에서 약해지는 모습, 명예욕....
점잖은 척 어디 구석에 가라앉혀 놓았던 것들이 대화 가운데 한 번씩 휘저어 주면 여지없이 떠올라 제 마음뿐 아니라 관계까지도 시꺼멓게 할 가능성이 많은 말들입니다.

이미 타버린 빵을 어쩔 수 없듯이, 말도 입술을 떠나면 다시 되돌리기가 무척 어렵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오븐을 예열해서 그 열을 적절하게 사용하듯 자신의 생각을 잘 읽어서 고마움이나 기쁨, 슬픔이나 분노도 표현하는 기술을 가지고 있어야 되려나 봅니다.
다행인 것은 제 안에 남아 있는 부정적인 감정들을 알아채니 감사할 뿐입니다.

한 면이 타버린 비스킷을 뒤집어 마저 구워봅니다.
다 익혀서 타지 않은 비스킷 안쪽을 떼어 먹어보니 먹을만 합니다.
남편은 더 적극적으로 탄 것을 잘라버리고 남은 것에 잼을 발라 먹습니다.
고맙습니다.
먹을 곳이 남아 있는 비스킷이 고맙고,
그걸 찾아내 먹어주는 남편이 고맙고,
이 상황을 고마워하는 저한테 고맙습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없이 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유쾌하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행3: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