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의 계절에 보고 싶은 분

<제가 첫돌 때 찍은 가족 사진입니다.>
제가 초등학교에 들어가 1학년 가을 학기가 되었을 때 아빠는 새로운 직장을 다니게 되셨습니다.
그때까지 우리 가족은 인천 시내에 살다가 아빠의 새 직장이 있는 인천 변두리로 이사를 가게 되었습니다.
우리 가족은 할머니와 함께 살고 있었는데, 이사 갈 집에 수리가 필요한 상태라서 할머니는 집이 고쳐진 다음에 이사 오시기로 했습니다.
어렴풋이 기억하기로는 할머니와 떨어져 살았던 시간이 그리 길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 기간 동안 할머니에 대해서 애틋한 감정을 가지게 되었고, 아주 긴 시간 떨어져 산 것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어느 날, 엄마가 할머니 집에 가보자고 하셨습니다.
시내에 계신 할머니가 어떻게 지내시는지 살펴보기도 하고, 엄마는 이런 저런 일을 보신 것 같습니다.
저는 할머니에게 갖다 드린다며, 두꺼운 종이 조각에다가 이불 꿰매는 하얀 면실과 검은 색 재봉실을 둘둘 얼마큼 감아서 챙겨두었습니다.
할머니에게 왜 실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는지 모르겠습니다. ^^

할머니 집에 도착해서 보니, 그 때 50대 중반이신 할머니는 일터에서 아직 돌아오시지 않으셨지만 집에는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엄마는 무슨 일인가 보러 나가시고 저 혼자 할머니 방에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번뜩 할머니가 일 갔다가 오시면 저녁 드실 밥이 있나 찾아보았습니다.
여기서 잠깐!
기억이 나질 않는 부분인데(나중에 엄마한테 여쭈어 봐야겠습니다), 엄마가 해 놓은 밥인지, 할머니가 우리가 올 줄 모르고 아침에 한 그릇 남겨놓고 일 가신 것인지, 뚜껑이 있는 밥그릇에 담긴 밥 한 그릇을 발견했습니다.

문득 할머니가 오셨을 때 따뜻한 밥을 드시면 더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아랫목 이불 밑으로 밥그릇을 가져다 놓았는데 이것 가지고는 밥이 따뜻해질 것 같지가 않아 밥그릇을 들고 부엌으로 다시 갔습니다.
연탄불 위에 올려진 솥에서 따끈하게 데워진 물을 퍼서 밥에 붓고, 뚜껑을 다시 덮어, 딱 밥 한 그릇 들어가게 만든 스티로폼 통에 밥그릇을 넣어 아랫목에 펴져 있는 이불로 잘 감싸두었습니다.
예닐곱 살짜리가 그런 생각을 해낸 것이 스스로 꽤 괜찮다고 여기며, 할머니께 들을 칭찬을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시간이 얼마가 지났는지 할머니가 집에 돌아오셨고 저를 보고 무척 기분 좋아하셨던 것 같습니다.
곧이어 할머니 드시라고 꽁꽁 묻어둔 스티로폼 통에서 밥그릇을 꺼내 내어드렸습니다.
밥그릇의 뚜껑을 여신 할머니는 물에 불어 있는 밥을 보시고, 밥이 왜 이러냐고 물으셨습니다.
저 또한 밥에 물(게다가 따뜻한 물)을 부어 놓으면 밥이 불어 오를지 몰랐기에 당황스러웠지만 이만저만 해서 할머니를 위해 따뜻한 물을 부어 놓았노라 말씀 드렸습니다.

할머니는 제 설명을 듣고 흐뭇해 하시면서, 퉁퉁 불은 밥을 마다하지 않으시고 드셨습니다.
게다가 한참 동안 친척들이나 친구 분들을 만나시면 이 어이 없는 밥 사건과 엉성하게 감긴 실 꾸러미에 대해 두고두고 애기하셨습니다.
아마도 어린 것이 할머니를 생각한답시고 한 짓이라 사랑스레 여기셨던 것 같습니다.

그 보다 더 어렸던, 둘째 동생이 태어나서 얼마 지나지 않았으니까 제가 서너 살쯤 되었을 때입니다.
할머니는 딸이지만 첫 손주인 저를 많이 위해주셨는데, 아빠가 장남이시고 남동생이 태어나자 그 동생을 정말 이뻐하셨습니다.
그래서 엄마가 동생에게 젖을 먹이고 나면 할머니는 그 동생을 업고, 저는 옆에 걸려서 마실 다니시곤 하셨습니다.

바로 옆집에 할머니는 우리 남매를 데리고 놀러 가셨다가, 집에 돌아오려고 동생을 업고 계셨습니다.
동생을 등에 올려 포대기로 감싸고, 끈으로 돌려 매듭을 짓기 전에 아이가 흘러내려 오지 않도록 한번 추켜 올려주는 순간이었던 것 같습니다.
월남 치마라고 했던가요?
허리는 고무줄로 되어 있고 길이가 발목까지 내려오던 치마요.
할머니가 동생을 추켜 올리면서 허리춤에 있던 치마의 천이 달려 올라갔습니다.
그 모습을 뒤에 지켜보고 있던 저는 “늙은 년이 치마도 하나 간수 못해” 하며 맹랑하기 짝이 없는 말을 했습니다.

예의 바르지 못한 말에 야단을 치실 만도 한데, 할머니와 친구 분들은 허리가 구부러져라 웃어주셨습니다.
지금에서야 변명 같지만 할머니들이 하시는 말투를 흉내낸 것이 아닐까요?
--;;
말도 잘 하고 기억력도 좋다는 이유로, 할머니의 손주들 자랑(?) 목록에 그 아이답지 않은 말투와 가요 제목만 대면 줄줄이 가사를 외워 노래하는 것이 늘 들어 있었습니다.
어렸을 때는 말도 똑 부러지게 잘 했다는데 지금은 영....


교외로 이사간 집에 방도 한 칸 더 들이고 하여 할머니도 다시 함께 살게 되었습니다.
저는 당연히 할머니와 한 방을 썼습니다.
잠 잘 때는 할머니가 꼬옥 끌어 안아주시곤 하셨는데, 겨울이면 차가운 저의 손을 끌어다가 할머니 몸에 얹어 녹여 주셨고 발은 끌어다가 할머니 다리 사이에 넣어 따뜻하게 데워주셨습니다.
그리고 잠 자리에서 무슨 주문 외듯이 날마다 저에게 속삭이셨습니다.
“손에 물 묻히지 말고 발에 흙 묻히지 말고 살아라. 비행기 타고 유학 가서 공부도 많이 해라.”
이렇게 사는 것이 여성으로서 최고로 행복하게 사는 것이라 여기셨던 것 같습니다.

또 할머니는 언제나 제 편이셨습니다.
속상하게 했던 일이나 친구들 얘기를 하면 상대방에게 얼마나 욕을 하시는지 속상했던 마음이 저절로 풀어지기도 하고, 상대가 그렇게 엄청난 욕 먹을 정도는 아니지 싶어 스르르 마음이 풀어지곤 했습니다.
어느 정도 제 기분이 괜찮아진 것 같으면 할머니는 사람이란 이런 거야, 사람 마음은 저런 거야 하시면서 말씀해주셨습니다.
정말 위로 받고 싶은 일은 온전히 제 편이 되어주셨던 할머니께 가져갔던 것 같습니다.

할머니는 늘 변함 없는 저의 지지자였는데 저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글쎄 할머니가 저 때문에 가출하신 적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고교 시절 사춘기를 보내고 있던 어느 때, 할머니가 작은 집에 가서 며칠 동안 머무르셨던 이유가 제가 너무 까칠하게 굴어서였다고, 스무 살이 넘어 좀 컸다고 여기셨는지 지나가는 말처럼 하셨습니다.
할머니는 손주 삼 남매가 곁에만 있어도 좋아하실 뿐 상처 받으실 수도 있다는 생각은 꿈에도 못했었습니다.
무척 죄송했는데 죄송하다는 말씀은 드리지 못했습니다.

그런 얘기를 들은 다음에도 할머니께 잘 해드리지 못했습니다.
돈 많이 벌면 옷 한 벌 맞춰드리겠다고 했는데, 돈 벌어 학비에 보태며 학교만 다니다 결혼을 해버렸습니다.
결혼해서는 자동차가 생기면 할머니 태우고 좋은 데 구경시켜드린다고 했는데, 약속을 하나도 지키지 못했습니다.
딸이 없어 딸 같이 여겨주시기도 하던 첫 손녀 결혼하는 거 보고 돌아가시려고 그러셨는지 제가 결혼하고 한 달쯤 지나 돌아가셨습니다.
….

할머니를 기억하며 몇 줄 글을 쓰고 보니 이야기의 주인공은 모두 저네요.
이렇게 이기적인 기억일 줄이야….

지금도 할머니를 떠올릴 때면 많이 많이 보고 싶고, 그 품에 안기어 살아 가는 이야기뿐 아니라 풀지 못한 마음의 숙제도 다 털어놓으면, 제 편이 되어 무슨 말씀을 해 주실지 궁금합니다.
할머니께 강산이도 강윤이도 보여드리고 싶은데….

할머니가 곁에 계시지는 않지만, 할머니의 한결 같은 사랑과 삶의 지혜를 나눠주시며 자주 하셨던 “사람은 줏대가 있어야 해” 라는 말씀은 삶을 만들어가는 제게 오늘도 여전히 영향을 주고 있습니다.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생명까지 내어주시며 그 사랑을 확증시켜주시고, 다시 살아나셔서 사랑으로 살도록 도우시는 우리 주님-“주님”이라 함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뿐 입니다-을 기억하는 부활의 계절이 되면, 왜 할머니가 자꾸 생각나고, 더 그리운지 모르겠습니다.

“보라 너희가 다 각각 제 곳으로 흩어지고 나를 혼자 둘 때가 오나니 벌써 왔도다 그러나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느니라 /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란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요한복음16:3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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