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꽃






올 여름에도 분꽃이 피었다. 집 뒤쪽 담장 아래에 씩씩하게 피어있다. 처음 분꽃 씨앗은 돌아가신 김세영 권사님이 주신 것이다. 진한 분홍색 꽃이 더 예쁘다며 그 씨만 주셨는데, 어찌 된 일인지 여러 가지 색깔의 꽃이 피었다. 진한 분홍, 옅은 분홍, 노랑, 주황, 하양. 꽃들은 늘 뭐가 그렇게 부끄러운지 해질녘에 피어 밤을 지나고 아침 햇살이 고르게 퍼질 때쯤에는 꽃잎이 다시 움츠러든다. 한낮에는 활짝 핀 꽃을 볼 수가 없다. 여름 내내 꽃이 피고 진다.

여름이 끝날 즈음에는 꽃이 핀 자리마다 씨앗이 맺힌다. 씨앗을 갈무리했다가 다음 해에 원하는 자리에 심을 수도 있다. 나는 그 자리에서 다시 자라도록 씨앗이 그냥 떨어지게 두었다. 계절이 바뀌면 분꽃은 이파리를 눈깜짝할 새 떨구고 가지도 누렇게 말라 마디 마디 똑똑 부러져 자신의 흔적을 말끔히 지운다.

다시 봄이 되면 동그란 모양을 한 새싹이 오만 군데에서 올라온다. 어느 해 봄에는 그 새싹들을 솎으면서 한 곳으로 모으다가 깜짝 놀라는 일이 있었다. 분꽃의 싹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한 것이 다른 싹들과는 달리 성큼성큼 자라 눈길을 끌었다. 싹만 봐서는 분꽃이라는 확신이 안 들어 뽑아버리기로 했다. 싹의 뿌리가 얼마나 깊이 있으랴 싶어 손으로 잡아당겼는데 끔쩍도 하지 않았다. 흙 속으로 모종삽을 꾹 눌러 넣어 들어 올리려 했으나 그것도 소용이 없었다. 싹 주변을 여러 삽 파내고 나서야 그 뿌리를 볼 수 있었다.

마치 고구마처럼 생긴 뿌리였다. 분꽃이 아닌 것 같아 그것을 파내어 담장 아래에 던져 두었다. 그런데 그 뿌리가 마르지 않고 어떻게 땅 속으로 들어갔는지 살아있다가 꽃을 피웠다. 분꽃이었다. 분꽃은 씨가 맺히는 걸로 봐서는 뿌리로 번식하는 식물은 아닌 것 같은데, 굵은 뿌리가 남아 있다가 거기서 싹이 나온다는 것이 살짝 당황스러웠다. 씨와 줄기 뿌리로 동시에 생명을 이어가는 여러해살이 꽃인 줄 그제야 알았다. 씨에서 자란 것과 뿌리에서 자란 것을 비교해보니 나중 것이 더 튼실하다.

한 번은 모아둔 분꽃 씨앗이 주방 바닥에 떨어져 있었나 보다. 식탁 의자에 앉다가 바지직 소리가 나서 봤더니 씨가 바스러져 있었다. 씨앗 겉은 검은색인데 검은 껍질 안에는 하얀 가루 같은 것이 보였다. 이 흰 가루가 마치 여인들이 화장할 때 쓰는 분과 같아서 분꽃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씨에서 나온 싹과 뿌리에서 나온 싹의 모양이 다르고, 한 줄기에서 여러 가지 색깔의 꽃이 피고, 흙 위에 던져 둔 한 덩이 뿌리가 다시 살아나는 것, 모두 참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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