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7/2014

엉뚱한 상상


가을까지 피고 지기를 반복하는 뒤뜰 민들레입니다.


한국에서 방송되는 드라마나 예능 프로그램 가운데 몇 개를 찾아서 보고 있는데 참 재미있다. 한국에 살 때는 언제든 볼 수 있어서 그랬는지 TV에 연연해 하지 않았다. 때론 TV를 보지 않고도 살았다. 그런데 미국에 살고 있는 지금은 한국 TV 방송 가운데 몇몇 프로그램이 주는 즐거움이 대단하여 잘 챙겨서 보곤 한다.

요즘 몇 주는 어느 종합편성채널에서 방송되는 더 지니어스라는 리얼리티 쇼를 보았다. 정해진 참가자들은 매회마다 새로운 게임을 풀게 되고, 게임 결과에 따라 한 명씩 탈락한다. 여러 회에 걸쳐 마지막에는 남은 한 사람은 자신이 모아놓은 점수대로 상금을 타게 되는 오락 프로그램이다. 게임의 내용은 상당한 이해력과 지능, 사람의 심리를 잘 읽거나 리더십이 필요해 보이는 어려운(난 문제를 이해하는 데도 한참 걸린다) 과제가 매주 새롭게 제시된다. 어리바리인 나는 게임을 즐기면서 시청하기는커녕 방송을 보는 내내 어쩜 저렇게 머리가 좋을까, 똑똑한 사람이 참 많구나, 감탄하느라 정신이 없다.

참가자들은 직장인, 학생, 방송인 따위로 직업이 다양하다. 모두 게임을 잘 하는 사람들이 출연했을 것이다. 하지만 성격은 저마다 달라서 분위기를 이끌어 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조용히 따라 가는 사람이 있다. 과제를 급하게 풀어가는 사람과 상황을 지켜보며 시간을 끄는 사람이 있다. 자기 편을 분명히 하는 사람이 있기도 하고 어떤 이는 눈치껏 자기에게 유리한 편으로 왔다 갔다 하기도 한다. 어쨌든 모든 참가자들은 게임을 잘 통과해서 마지막 우승자가 되고자 하는 것은 분명하다.

사실 게임 자체에 대한 이해도 잘 안 되는 쇼가 나에겐 그다지 흥미롭지 않다. 다른 식구들이 시청을 하니까 같이 보게 될 뿐이다. 그런데 최근 방송에서 두 사람 가운데 탈락자 한 사람을 가리는 카드게임이 인상에 남았다. 한 사람은 승부욕이 강하고 게임도 능동적으로 풀어가는 사람이다. 다른 한 사람은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한 편이고 속마음을 잘 숨기지 못하기도 한다. 그날 방송의 흐름으로 볼 때 적극적인 태도를 가진 전자가 이길 것 같았다.

두 사람이 게임을 풀어가는 모양새도 전자에게 유리한 경우가 많이 나왔고, 시원시원하게 점수를 얻어 갔다. 후자는 질 것 같으면 미련 없이 베팅을 포기했다. 자기가 이길 것 같은 상황에서도 베팅하는 양은 적고 일정했다. 그렇다 보니 이겨도 조금의 이득 밖에 없었다. 조심스럽게 일관된 베팅을 이어가던 후자는 조금씩 조금씩 상대의 점수를 가져 왔다. 어설퍼 보이는 듯한 후자는 상대방 카드를 은근슬쩍 살피고 있다가 상대가 높은 숫자의 카드를 다 썼다고 판단되는 순간에 이르렀다. 전자는 게임 초반에 나온 유리한 카드를 어느새 다 써버리고 만 것이다. 후자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더블 베팅을 해서 결국은 이기게 되었다.

후자의 이러한 게임 운영 방식은 동료가 자세히 조언해 준 것이었다. 다른 참가자들에게 불편을 끼치지 않고 조용히(착해 보이는 캐릭터다) 게임을 하는 후자를 도와준 것으로 보였다. 물론 게임에 강한 전자가 이기는 것보다 착한 후자가 이기는 것이 다른 게임을 하게 될 때 더 유리하다고 판단해서 도와줬는지도 모르겠다.

이 게임의 결과가 인상적이었던 것은 나름 실력을 가진 순하고 착해 보이는 사람이 이겼다는 것(능력), 상황에 흔들리지 않고 차분하게 게임을 풀어갔다는 것(집중), 동료의 조언을 믿고 일관성 있는 태도를 유지했다는 것(지속)이었다. 이길 만 했다. 무엇보다 경쟁 사회에서 성품이 착한 것을 멍청하거나 덜 떨어졌다고 생각하거나, 그래서 얕잡아 보고 이용하려고만 드는 요즘 풍조를 조용히 뒤집어 놓은 것도 같았다.  

나는 이 쇼를 조금 더 지켜볼 생각이다. 바라기는 참가자들 가운데 끝까지 게임을 풀어가는 능력이 탁월하면서도 동료들을 조용히 잘 도와주는 사람이 우승자가 되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이 우승자가 상금을 탔을 때 십 여명의 다른 참가자들과 상금을 똑같이 나누어 갖는데, 이 결과는 제작진도 모르게 참가자들끼리 합의된 것이었다, 뭐 이런 엉뚱한 상상도 하면서 말이다. 드라마나 영화를 너무 봤나……

"사람의 마음에 있는 모략은 깊은 물 같으니라 그럴지라도 명철한 사람은 그것을 길어 내느니라"(잠언 20:5)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