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9/2014

여행 중에도 기도 시간을




몸을 뒤척이다가 더 이상 잠이 올 것 같지 않아 일어났다. 아직 어두움이 가득한 거실에 걸려 있는 벽시계의 바늘이 가리키는 방향을 어슴푸레 읽어 보았다. 새벽 4시가 다 되어 가고 있었다. 창문을 꼭꼭 걸어 잠그고 잔 탓에 집안 공기가 후텁지근 했다. 창문 하나를 열어 강화어머님네(나의 시어머님이시다) 집 둘레에 펼쳐진 넓은 들판을 휘젓고 다니던 바람을 불러 들였다. 창문을 열자마자 밀려들어 오는 새벽 공기가 참으로 시원했다. 뒤뜰에 있는 수도꼭지에서 쏟아지는 차가운 물로 세수를 하는 것 같았다.

어머님은 지난해 가을, 아버님이 돌아가신 뒤로 주무실 때 문이란 문은 모두 걸어 잠근다고 하셨다. 평생을 모든 것이 익숙한 고향의 한 마을에서 살고 계신 어머님에게서 처음 보는 낯선 모습이었다. 며칠씩 집을 비울 때는 모르겠지만 하루 안에 돌아오는 외출을 하실 때는 현관문도 잠그는 일이 없으셨다. 큰 집에 덩그러니 홀로 남게 되신 어머님이 아직 익숙지 않은 '혼자됨'을 힘들게 겪고 계시는 중임을 알 수 있었다. 강인하고 꾸밈이 없는 성격의 어머님이신지라 더욱 애처롭게 느껴졌다.

그날 새벽 공기가 실어오는 상쾌함과 쓸쓸함을 들이키고 있는데 어머님이 깨어 나오셨다. 초여름이라도 으쓱한(어머님 표현에 따르면) 새벽 공기를 막아줄 얇팍한 긴팔 옷을 챙겨 입으시며 이미 깨어 있는 나에게 같이 새벽기도 가자, 고 하셨다.
 "목사 사모가 와 있는줄 다 알텐데, 왜 새벽기도도 안 나오나 할 거 아냐?" 
오랜만에 들어보는 꾸중 섞인 말씀이다.

어머님네 와서 밤잠을 자게 되는 경우는 주로 명절을 쇠러 올 때다. 명절을 준비하느라 고단하기도 하고, 모처럼 부모님 집에 왔으니 목회 현장에서 떠나 푹 쉬고 싶은 마음이다. 날마다 드리던 새벽기도도 접고 길고 깊은 잠도 자보고 싶다. 그런데 어머님은 새벽기도를 가시면서 잠들어 있는 남편과 나를 보시면 화를 내셨다. 목회자 부부가 새벽기도를 빼먹는 것을 이해할 수 없다고 하셨다. 게다가 목사는 안 나가도 사모는 기도해야 할 것 아니냐, 고도 하셨다(이것은 내가 이해가 안되는 대목 가운데 하나이다). 그래도 꿈적하지 않으면, 새벽기도가 끝나고 집에 돌아오셔서는 문을 소리나게 쾅쾅 여닫으시고 그릇도 더 달그락 소리가 나게 다루셨다. 아침 한나절은 어머님의 볼멘 소리를 듣게 될 것이라는 신호였다.

어머님 댁을 방문할 때마다 새벽기도에 대해서 일관된(?) 태도를 보이자 어느 때인가부터 더 이상 새벽기도 얘기를 꺼내지 않으셨다. 그런데 어머님과 내가 고부지간으로 만난 지 이십 여년이 흘쩍 넘었으며, 미국에 살다가 오랜만에 고국을 방문하여 며칠 어머님 댁에 묵고 있는데 그 새벽기도 얘기가 다시 나온 것이다. 난 웃으며 어머님만 다녀오세요, 했다. 밖으로 드러나 훤히 보이는 어머님 고집이나 드러나지 않는 은근한 내 고집이나 만만치가 않다.

어머님의 새벽기도 시간은 남다르시다. 잠 자리에서 일어나시는 시간이 교회가는 시간이다. 새벽 두, 세 시라도 일어나시면 곧바로 교회로 가시곤 했다. 요즘은 네 시쯤 가시는 것 같다. 새벽예배 후에도 한참을 기도하시다 집에 돌아 오신다. 그동안 어머님이 기도하시는 모습을 지켜본 바에 따르면 기도 드릴 때마다 얼마나 간절히 기도하실지 그려진다.

난 어머님과 같이 부지런하고 열정적이고 한결같은 기도를 드리지는 못한다. 나도 새벽기도를 드리지만 정해진 시간 동안 기도하며 대부분 읊조리거나 말없는 기도를 드린다. 삶이 단순하기에 생활하는 중에도 짧막한 기도를 자주 드리곤 한다. 내가 다니는 교회에서 멀리 떠나 여행할 때는 새벽기도를 드리지 않기도 한다. 이러한 어머님이나 나의 기도 생활이 온전하지 않음은 물론이요 다른 사람의 기도 생활을 판단할 수 있는 잣대가 결코 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벽기도에 같이 가자는 어머님의 이번 요청을 따르지 못한 것이 자꾸 떠오르는 것은, 여행을 하는 중이라도 기도 시간을 따로 떼어놓지 않으면 깊이있는 기도를 하기 힘들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일이 생기는 대로 시간이 흘러가는 대로 하루를 보내기 일쑤이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변화의 시점에 있는 내 교회와 부모님들이 다니시는 교회가 건강하게 세워지기를 위해서, 가족의 평안을 위해서, 그리고 여행 중 만나는 모든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 주님이 함께 하여주시길 기도해야 하기 때문이다.

어머님이 새벽기도 가시고 집에 남겨진 나는 그 자리에서 마음을 정돈하고 하나님께 내 기도를 올려 드렸다.

6/21/2014

가족




"많이 돌아다닐 생각하지 말고 조용히 있다가 와."
한국으로 오기 전 남편에게 여러 번 들은 말이다. 두 번째 한국 방문이니 첫 번째만큼 반겨주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에서 한 얘기다. 일리가 있는 말이기도 하다. 지난 번은 오랜만에 한국을 방문한 것이고, 일 년만에 다시 오게 되었으니 반가움이 덜할 것이라고 쉽게 미루어 짐작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또 한편으로는, 자신은 미국에 남아 있으면서 한국 방문을 하는 아내에 대한 부러움과 질투가 살짝 느껴지기도 하는 말이다. 자신의 아내가 그리 번잡스러운 사람이 아님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면서 그런 당부의 말을 한국으로 떠나기 전에도, 한국에 머물고 있는 중에도 툭툭 하니 말이다.

하긴 나도 남편이 며칠 동안 외출을 하게 되면, 여행 가서 좋겠다!, 며 부러운듯한 말을 마구 던진다. 남편의 외출은 거의 교회와 관련된 모임이기에 회의나 교육 받는 시간이 대부분인 것을 안다. 그래도 일상을 떠나 낯선 장소가 주는 신선함이 있고 오랜만에 만나는 사람들도 있으니 외출 혹은 여행은 부러움을 살만한 경우들이다.

이럴 때 남편의 반응에 따라 더욱 얄미워지기도 하고 마음에 위로가 되기도 한다.
"회의만 하는데 뭐가 좋아, 지루하지. 집이 최고야!"
쳇, 아무렴 회의만 할까! 쉬는 시간에 수다도 떨고, 준비된 맛난 식사도 먹을 거면서.
"당신도 같이 가면 좋을텐데... 거기 가 봐서 좋으면 나중에 같이 가자."
경험상 나중에 다시 방문할 기회가 거의 없음을 알면서도 이런 말은 집에 남겨진 사람의 답답함을 어느 정도 가시게도 한다.

어쨌든 이번 한국 여행은 내가 집에 남겨진 남편뿐 아니라 작은아들의 부러움까지도 사게 되었다.

나의 부모님께서는 사는 곳에서 10분쯤 걸어가야 되는 곳에 조그만 텃밭을 가꾸고 계신다. 산책 삼아 나가 돌아보았는데 밭 한쪽이 온통 싱싱한 씀바귀로 가득 차 있었다. 나중에 뿌리째 뽑아 장아찌를 담그려고 키우는 것이라고 하셨다. 그런데 밭 주위를 지나 다니던 사람들에게도 이 씀바귀가 눈에 띄었나 보다. 어떤 사람이 씀바귀 효소를 만들면 좋겠다며 잎을 베어가고 싶다고 해서 그러라고 하셨단다.

하루는 이른 아침에 두 분 모두 텃밭에 나가셨는데, 아침 먹을 때쯤 아빠만 돌아오셨다. 엄마는 남아 있는 씀바귀를 모두 캐어 씻어가지고 올 거라고 아빠가 얘기해주셨다. 엄마도 씀바귀로 장아찌가 아니라 효소를 만들 작정이라면서.

조금 있다가 엄마는 젖은 씀바귀가 담긴 커다란 부대를 땀을 뻘뻘 흘리며 들고 오셨다. 엄마는 집으로 먼저 돌아오신 아빠가 계신 안방으로 곧장 가시더니 코 맹맹한 소리로 한 마디 하셨다.
"씀바귀가 많은 줄 알면 들어주러 와야지. 자전거를 가지고 오든가. 자전거 소리가 나길래 얼른 내다봤네, 에잇!"
말투는 무거운 씀바귀를 들고 오느라 힘이 들어 짜증났음을 드러내는 것 같은데, 내 귀에는 남편의 도움이 필요했다는 아내의 애교 섞인 투덜거림으로 들렸다. 나의 부모님은 이런 식으로 서로가 필요한 존재임을 드러내고 확인시키며 사시는구나, 새로이 알게 되었다.

애정어린 부러움과 질투, 애교스런 투정은 서로의 관계가 무뎌지지 않게 하는 윤활유 같은 것들이다.

한국 방문 중인 산이와 나에게 누군가 미국에 있는 다른 가족의 안부를 물을 때마다, 산이가 반복적으로 하는 말을 들으며 가족에 대한 산이의 생각도 엿본다.
"아빠, 윤아, 기다려. 빨리 올게."
"미국 가서 비행기 빨리. 우리 한국 가자! 아빠랑 윤이랑 같이. 가족이니까"
"엄마는 우리 엄마. 아빠는 우리 아빠. 윤이는 뭐지?"
"내 동생." 요것은 내 대답이다.
"아빠 감기 해? 기도할게."

산이는 가족 누군가가 외출을 하게 되면 언제 오냐는 질문을 수도 없이 한다. 어린 아이 같이 순수한 산이에게 가족이란 숫자 4(네 식구)인 것 같다. 우리 가족 네 식구가 늘 같이 있어서(지금까지는) 꽉 채워진 숫자 4 말이다.

가족마다 다양한 방식으로 사랑을 나누며 살아간다. 가족은 사랑으로 연결되어 있다. 그렇다고 언제나 행복하고 안정된 상태로 지속된다는 말은 아니다. 때론 관계가 삐그덕거려도 사랑은 가족을 지탱하게 해준다. 난 그 사랑이 더욱 견고해지기 위하여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께 늘 가닿아 있기를 기도한다.

6/13/2014

낯설고 강렬한 경험




한국으로 오는 비행기 안에서 있었던 일이다.

이번 한국여행은 장애를 가지고 있는 산이의 치아 치료(일상생활에 꼭 필요한 치료이고, 치료비용을 감안해 한국에서의 치료를 결정한 것이다)를 위한 여행으로 예정돼 있었다. 그런데 산이의 치아 상태에 문제가 생겨 급작스레 예정보다 일정이 앞당겨졌다. 큰아들 산이와 나는 감사하게도 갈아타는 번거로움이 없는 한국 비행기를 타고 있었다. 게다가 남편은 우리를 비행기가 출발하는 애틀랜타 공항까지 데려다줄 수 있는 여건이 되었고, 한국 국적 비행기이니 여러 가지 면에서 편안한 이동수단이 되리라는 기대감이 있었다.

긴 비행기 운항 시간의 지루함을 달래줄 영화 목록을 살펴보았다. 보고 싶었던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이 있었다. 갑작스레 정해진 일정이었지만 비행기를 타기까지 순조롭게 진행이 되었고 영화도 볼만한 것들이 꽤 있어서 이번 여행에 대한 느낌(느낌은 변화무쌍 하다. 신뢰할만 한 것이 못 된다)이 좋다고 생각했다.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제목만 봐서는 고풍스러운 배경을 감상할 수 있지 않을까, 근거 없는 기대가 있었던 영화였다. 비행기가 출발할 때부터 영화에 집중해서 한 시간 반 정도를 훌쩍 보내리라 생각했다. 새벽 일찍이 집을 나선 탓에 비몽사몽 오락가락 하면서 감상했어도 어쨌든 시간이 그럭저럭 흘러갔다.

한국 비행기 기내식의 대표 음식인 비빔밥을 점심으로 먹고, 저녁으로는 불고기와 밥을 먹었다. 당황스러운 사건은 저녁 식사를 마치고 얼마 뒤에 시작되었다.

산이가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기침이 그치지 않았고 그 소리가 점점 목구멍을 거칠게 훑고 나오는 것처럼 무거워졌다. 이때부터 평온한 여행에 대한 느낌은 쨍, 하고 깨져 버렸다. 산이가 기침을 힘들게 하기 시작하면 겁이 난다. 기침을 하다가 속을 싹싹 다 비울 때까지 토하기 때문이다.

기침한다고 승무원이 와주지 않을 것 같아 얼른 일어나 승무원들이 있는 공간으로 나아갔다. 냅킨을 좀 달라고 했다. 서너 장을 건네 받았다. 다시 내 자리로 돌아오자 산이는 울컥 게웠다. 체한듯 싶었다. 승무원을 부르는 벨을 눌렀다. 내 마음이 급한 것인지 벨을 잘못 누른 것인지 승무원이 오는 기색이 없었다. 다시 한 번 벨을 눌렀다. 승무원들이 잠시 머무는 장소에서 가까운 곳에 우리가 있었다. 그제서야 승무원은 뭘 도와 드릴까요, 물었다.

"우리 아이가 토해서요..."

승무원은 물티슈 여러 개와 두 개의 비닐 쇼핑백을 들고 와서 쇼핑백의 입구를 벌리며 내밀었다. 내 손에 들린 지저분한 냅킨을 넣으라는 신호인듯 하여 그리 했다. 나는 그 쇼핑백이 필요할지도 몰라 달라고 해서 발 밑에 두었다. 승무원은 가지고 온 또 하나의 쇼핑백을 벌려  아무 말없이 또 내 앞에 내밀었다.

"뭘..."

어떻게 하라는 건지 몰라 물었다.

"담요 넣으시라구요."

토한 것이 살짝 묻어 뭉쳐놓은 담요가 내 무릎 위에 놓여 있는 것을 잊고 있었다. 순간 승무원의 서비스를 받고 있는 것 같은데, 내가 뭘 잘못했나 싶은 생각이 들게 했다. 기분이 더욱 가라앉았다. 승무원은 돌아 갔고 승객이 덥고 있던 담요를 가져갔으면 새 담요를 가져다 주어야 할 것 같은데 소식이 없었다. 받으러 갈까 하다가 승무원 부르는 벨을 눌렀다. 왜 불렀냐는 표정이었다. 담요가 필요하다고 했다.

난 어둑한 실내등 불빛을 찾아 손을 쳐들었다. 손목시계의 바늘을 정확히 보기 위해 눈을 찡그렸다. 인천공항에 도착하려면 여섯 시간이나 남아 있었다. 제발 이대로만 버텨주길 바라는 간절한 마음을 하나님께 아뢰었다. 기도가 끝나기도 전에 산이는 기침을 다시 하기 시작했다.

조용히 혹은 피곤하게 비행을 하고 있는 다른 승객들에게 엄청 미안했다. 자기 몸에 이상이 생기면 고집스러워지는 산이는 화장실로 가는 것을 거부했다. 멈추지 않는 기침을 하면서 화장실로 이동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난 다른 승객들에게 큰 민폐를 끼치는 것인줄 알면서도 원하지 않는 기침을 하면서 괴로워 하는 산이의 편이 되기로 했다. 등을 쓸어주며 기도하는 것 밖에는 해줄 것이 없었다. 이 상황이 오래 지속 되면 승객들에게 같이 기도해 달라고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산이는 몸을 떨며 토하기를 두 번 더 했고, 자신도 괴로운지 끝내는 소리를 죽여가며 울었다. 그러는 동안 승무원은 벨소리를 듣고 온 것과 소화제를 요청하여 가져다 준 것을 빼고는 다시 오지 않았으며, 우리 옆을 지나치면서도 괜찮냐고 단 한 번도 묻지 않았다. 우리 모자는 비행기 안에서 공공의 적이었던걸까.

산이에게 울지 말라고 달래는데, 도리어 날 달래듯이 산이가 이젠 괜찮아, 했다. 속이 좀 편안해졌다는 소리로 들렸다. 감사, 또 감사했다. 기다렸다는듯이 피곤이 마구 몰려들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잠이 깜빡 들었다.

어수선한 움직임에 눈을 겨우 떠보니 승무원 세 사람이 눈 앞에 있었다. 우리 바로 앞에는 두 아들과 엄마가 앉아 있었는데 초등학교 1학년쯤 되어 보이는 작은 아들이 코피가 난 모양이었다. 알콜솜의 냄새가 잠을 확 달아나게 했다. 이미 가지고 온 얼음 봉지가 모자란 지 한 승무원은 작은 지퍼백에 담긴 얼음을 짤랑거리며 다시 달려왔다. 좁은 통로에 모여 있는 승무원의 뒷모습은 보란듯이 내 시야를 다 가리고 있었다. 한참을 아이와 눈빛을 마주하고 속삭이던 그들이 물러갔다. 내가 앉은 통로에서 보지 못했던 다른 승무원들도 오고 가며 아이의 안부를 계속해서 물었다.

아, 외롭게 겪은 산이의 소동에서 끝났으면 좋았으련만. 산이를 위한 승무원의 서비스가 이해되지 않았어도 그날의 사건은 여럿에게 불편함을 끼친 죄인의 심정으로 미안함만 기억되었을 것을. 산이와 앞자리의 아이를 대하는 다른 태도를 보고 있자니 심장이 벌벌 떨리고  가슴에 돌덩이를 얹어 놓은 것 같았다. 오, 주여...... 내가 모르는 승무원의 행동 수칙이 있을 거라고, 그래서 승무원들은 그 규칙을 따랐을 뿐일 거라고 되뇌이고 또 되뇌였다.

따끔따끔거리는 마음으로 인천공항에 다다랐다. 산이 옆에 앉아 있던 청년 승객에게 불편함을 줘서 미안했다고 말했다. 청년은 웃으며 괜찮다고 했다. 비행기가 완전히 멈춰 서고 승객들은 부산스럽게 짐을 꺼내 빠르게 통로를 꽉 채웠다. 우리도 일어섰다. 복잡한 승객들 사이를 비집고 멀리서 길고 흰 팔이 우리를 불렀다. 앉았던 통로 쪽에서 제일 많이 봤던 승무원이었다. 통로를 가득 메운 승객들 사이에서 산이를 한 번 바라보고 다시 날 바라보며 괜찮냐고 물었다. 괜찮다고 대답하고는 마치 변명할 기회라도 얻은 사람처럼 아까는 화장실로 갈 상황이 안 되었다고 빠르게 덧붙였다. 비행기를 빠져나오는 동안 이용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되십시오, 하는 승무원들의 인사가 마음에 와 닿지 않았다. 평상시와는 달리 그들의 인사에 도통 대꾸할 수가 없었다.

속상한 마음이 내 안에 오래 머물지 않도록 하나님 앞에 풀어놓았다. 동시에 이 낯설고 강렬한 경험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듣고 싶다고 했다. 어린 아이처럼 장애인 역시도 연약함을 가지고 있어서 관심 있는 돌봄이 필요하다. 우리는 서로 묻고 협력하면서 그 돌봄의 새로운 방법들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인간적인 노력만으로는 피상적인 돌봄에 그치기 쉽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한 것 같이 우리도 서로 사랑할 때 연약한 이들을 진심으로 돌볼 수 있는 지혜가 열릴 것이다. 산이를 아들로 주시고 가까이서 돌보게 하심이 얼마나 큰 은혜인지를 다시 한 번 깨닫는다.

6/06/2014

학교 이후의 삶을 시작하며




고등학교 다니는 아이들의 공식적인여름방학이 시작되었다. 비공식적으로 첫째 아이, 산이는 학교 일정이 마치기 하루 전에, 둘째 아이는 이틀 전부터 방학에 들어갔다. 둘째 아이의 말을 빌리자면, 일 주일 전부터 수업에 나오지 않는 아이들이 많아 학교 분위기가 싱숭생숭하다고 했다. 학점을 따기 위하여 필요한 시험이나 과제를 다 끝냈고, 출석 일수에 지장이 되지 않으면 결석 처리가 되더라도 등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자기도 방학하기 이틀 전부터 학교에 가지 않겠다고 했다. 그래도 마무리를 잘 해야 되지 않을까, 하며 수업은 빠지지 않아야 된다는 밑도 끝도 없는 고정관념을 가진 나에게 둘째 아이는 대놓고 답답하다고 했다. 다 알아보고 하는 거니까 걱정하지 말라는 말도 덧붙였다. 내 자신이 보편적인 제도나 질서 따위 속에서 안정감을 느끼는 경향이 있어서 스스로 고리타분하게 여기는 부분도 적지 않다. 둘째 녀석은 나와 닮은 듯하나 똑같지 않아서 다행이다, 싶기도 하다. 나보다 훨씬 자유롭고 창조적인 삶을 멋지게 만들어가길 진심으로 바란다.

방학하기 이틀 전 아침, 둘째는 학교를 가든 안 가든 알아서 잘 하겠지, 해놓고 첫째 아이는 학교에 보냈다. 다운증후군을 가지고 있는 산이한테서는 아무런 정보를 들은 것이 없으므로, 그리고 공교육을 하는 학교에 다닐 날이 더 이상은 없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학교 가려고 나서는 아이를 품에 안고 이마를 맞대고 잘 갔다 와, 하는데 가슴이 짠하다. 그 동안 한국에서 받았던 조기교육( 4)부터 미국 고등학교와 과도기 과정(transition class, 18-21) 마치기까지 겪었던 일들과 감정들이 뒤섞여 왈칵 왈칵 올라오는 것을 지난 주부터 참고 있었다.

지난 주에 산이가 학교 생활을 마치는데 부모의 사인이 필요하다며 학교로 오라고 했다. 이 모임은 산이를 위한 교육에 대해 재평가하는 자리로 두 달 전쯤 모였어야 했다. 하지만 방학을 코앞에 두고 호출하는 것이니 새로운 정보를 나누는 자리가 아님을 짐작할 수 있었다. 선생님은 올해 산이와 같은 반 친구들 가운데 네 명이 졸업하는데 모두 일자리를 찾지 못했다고 했다. 학교 선생님들은 아이를 위해서 더 이상 해줄 것이 없단다. 예상했던 대답이었다. 그래도 산이의 발전적인 미래를 위해서 의논할 것이 없다는 말에 무척 서글펐다.

애써 담담한 표정을 지으며, 학교 생활이 끝나면 아이와 여행도 하고, 평상시에는 아이가 좋아하는 수영과 볼링도 정기적으로 다닐 거라고 얘기했다. 주정부에서 운영하는 직업재활(Vocational Rehabilitation) 하는 곳에 방문하기로 약속이 되어 있다고도 선생님에게 전해주었다.

산이와 우리 가족을 위해 마지막으로 한 마디씩 해 달라고 부탁했다. 담임 선생님과 직업훈련 담당 선생님은 두 분 모두 산이가 스스로 할 수 있도록 기다리고 서두르지 말라(Be patient)는 말을 남기셨다. 한국에서는 새로운 학년이 시작될 때마다 산이의 담임선생님들한테 엄마로서 내가 부탁했던 말이 바로 기다려 달라, 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그 말을 선생님들로부터 내가 듣고 있었다. 하나님께서 우리 가족에게 산이를 선물로 주신 이유 가운데 하나도, 바로 인내를 배워가라는 것이라고 늘 말해왔다. 그런데 요즘은 산이가 학교를 떠난 후 앞으로의 삶에 대해 결정된 것이 없다는 사실에 불편한 마음이었다.

방학 기간이 끝나도 이제는 돌아갈 학교가 없다는 것이 헛헛하기만 한데 산이는 빨리 방학했으면 좋겠단다. 산이에게는 학교에 가지 말라는 말이 큰 꾸짖음이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산이는 빨리 학교가 끝나길 기다리고 있었다. 만 스물한 살의 특별한 청년에게 학교는 어떤 곳이었을까?

방학을 하루 앞두고 아이가 학교를 갔다 왔는데 시큰둥했다. 친구들하고 선생님들하고 다 만났냐고 물었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자기네 반 친구들이 많이 안 왔다는 것이었다. 주초에 있었던 피자 파티가 학년을 마무리하는 자리였나 보다. 둘째 아이 말 듣고 학교에 보내지 말 걸 그랬다. 남은 하루의 등교를 아무렇지 않게 흘려 보내고 공교육을 끝낸 새로운 삶의 단계로 슬쩍 옮겨갔다. 감사하게도 산이는 여느 날처럼 평화롭게 시간을 보내고 있다.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조바심도 조급함도 그에게서 느껴지지 않는다. 정한 때에 일을 이루시며 서두르지 않는 하나님의 모습을 산이의 어딘가에 숨겨놓으셨나 보다.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마을을 이루어 살아가는 공동체로 잘 알려진 라르슈나 캠프힐에 대해 관심을 가져왔다. 우리도 그런 마을을 이루어 살면 좋겠다는 꿈을 늘 꿔왔다. 산이의 학교 이후의 삶을 시작하며 돌아보니, 물리적인 공간을 가진 마을은 아니었어도 사랑의 관계로 이어진 공동체 안에서 살았음을 깨닫는다. 산이를 중심으로 가족, 친척, 친구들과 그들의 가족, 교우들, 선생님들의 관심과 사랑이 산이를 풋풋한 젊은이로 키웠다. 라르슈 같은 마을공동체도 사랑의 관계로 이루어진 것이니, 꿈 같은 그런 마을을 만들 수 있는 씨앗은 이미 우리 안에 뿌려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