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0/2014

깊어 가는 사귐




넉 달 전쯤 고춧가루와 곶감이 들어 있는 작은 상자를 우편으로 받았다. 우리 집에서 자동차로 운전하여 이틀이 넘게 걸리는 데 사는 H가 보내준 것이다. 소포를 받기 며칠 전, 요즘 잘 지내느냐며 안부 묻는 전화를 H와 하게 되었다. 페이스북에 가을 고추 말리는 사진을 올려놓은 것이 기억나길래 고추는 잘 말렸냐고 물어 보았다. 그랬더니 말린 고추를 빻았는데 색깔이 기가 막히게 예쁘다며 선뜻 보내주겠다고 했다. 아무리 고추는 농사 지은 것이 아니고 사 온 것이라 해도 햇볕에 말리고, 거두고, 빻는 수고를 엄청 했을 텐데 안부 인사 한 마디에 그 귀한 고춧가루를 나눠주겠다니, 난 얼른 그만 두라고 했다. H는 다 먹고 살자고 한 일이라며 어서 집 주소나 부르라고 했다.

몇 번이고 사양을 했지만 그럴 때마다 H는 자신의 수고는 뒤로 하고 나눠줄 만한 이유를 덧붙였다. 그이는 멕시코 국경과 가까운 주에 살고 있다. 멕시코는 우리처럼 매운 음식을 즐겨 먹기 때문에 고추도 다양한 품종을 생산하는 모양이다. 고추 밭에 직접 가서 고추를 사면 값도 저렴하고 우리 입맛에 맞는 것을 고를 수 있다고 했다. H는 우선 싼 값에 산 고추이므로 부담 갖지 말라고 했다. 그리고 자신이 사는 곳은 볕이 좋고 건조하기 때문에 말리는 것도 수월했으니 걱정 말라는 것이다. 아무리 그래도….., 라고 대꾸해놓고 전화를 끊자마자 바로(!) 주소를 보내주었다.

몇 날이 지나지 않아 H로부터 정성이 가득 담긴 상자가 멀리서 날아왔다. 상자를 열자마자 칼칼한 냄새가 콧속으로 빨려 들어왔다. 웬걸 이렇게 많이도 보냈는지 고마움과 미안함이 마구 뒤섞였다. 제일 큰 봉투에 담긴 고춧가루는 뭘 모르는 내가 보기에도 참으로 곱고 먹음직스러운 빨간 색이었다. 고추씨만 따로 모아 빻은 가루도 보였다. 덜 맵게 먹고 싶을 때 사용하면 좋다고 보낸 것이다. 게다가 손수 말린 곶감도 여러 봉지 들어 있었다. 이민자로 살다 보니 한국 제품이면 뭐든지 귀하게 여겨진다. H가 만든 것처럼 원재료는 현지의 것이더라도 우리네 입맛에 맞는 고춧가루나 곶감으로 바꿔 놓은 그의 솜씨도 귀하고 대단했다.

한국에서 가져온 어머님께서 만드신 고춧가루는 맛은 있는데 조금 매웠다. 어머님께 쬐끔 죄송하지만 H가 만든 고춧가루의 맵기가 내 입맛에 딱 맞는다. 너무 맵지도 않고 싱겁지도 않고. 김치를 해 놓으면 맑은 빨강색이 되어 마치 음식 전문가가 만들어 파는 김치 같다. 곶감은 오랜만에 먹어보는 것이기도 하고 적당히 말라 먹기도 좋아, 아껴가며 하나씩 야금야금 빼 먹었다.

돌이켜 보니 H와의 사귐은 이십 년이 넘었다. 같은 강화 지방에서 목회를 할 때 요한 웨슬레 목사 회심 기념 주간에 남편 목사들끼리 서로 교환 설교를 한 적이 있다. H네는 강화 본도에서 배로 한 시간이 넘는 거리에 있는 섬에서 목회를 하고 있었다. 강화 본도에서 목회하던 우리가 먼저 H네를 방문했던 것 같다. 그곳에서 들은 내 남편 목사의 설교는 안타깝게도 기억에 하나도 없지만 H가 만들어 주었던 닭조림과 김밥은 생생하다. 또 이후에 H네가 목회를 하게 된 교회가 내가 전도사로 있던 데여서 삶의 한 조각이 또 겹쳐지기도 했다. 거기서 얻어 먹은 오징어볶음과 스파게티도 잊을 수 없다. 어떤 사람을 떠올릴 때 함께 나누어 먹었던 음식을 기억하는 것은 그 음식에 배어든 애정이 내 몸 어딘가에 저장되어 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음식을 시원스럽게 잘하는 솜씨 못지않게 H는 기도 생활도 열정적이다. 미국으로 이민 와서 기도 생활을 제대로 못하고 있다고 자책하지만 그녀는 늘 하나님의 뜻을 묻고 있다는 걸 몇 마디 얘기를 나누다 보면 금방 알 수 있다. 한인이 많지 않은 작은 도시에서 십여 년 동안 남편과 함께 묵묵히 목회를 감당하는 뒷심은 기도를 통해 얻는 힘이다. 때론 외롭고 때론 경쟁적인 일상에 매몰되려 하지 않고 하나님 뜻을 알려고 늘 애쓰는 모습에서 기도의 모습이 읽혀진다. 자기는 신앙 생활이 엉터리인 사람이라고 말하지만 그런 H의 얘기를 들으면서 오히려 나를 돌아보게 된다. 내 신앙 생활이 얼마나 엉터리인지. 다행이고 감사한 것은 서로 자신은 엉터리라고 하면서, 상대방에 대해서는 작은 열심이나 성실의 흔적이라도 찾아내어 칭찬해 주고 그 에너지를 나눠 받고 싶어한다. 이것이 우리 사귐이 지속되는 까닭인지도 모르겠다.

미국에 사는 몇 년 동안 우린 전화 통화만 할 뿐, 사정이 여의치 않아 얼굴을 마주하고 만나보지 못했다. 그래도 전화가 연결되면 늘 만나는 사람마냥 수다를 떤다.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진다는 말이 이런 상황에서는 꼭 맞는 것 같지 않다. 서로를 기억하고, 전화든 편지든 시간을 내어 찾아보고, 입술 끝을 떠나면 곧 공기 중에 흩어져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영혼 없는 말이 아니라 마음이 담긴 애정 어린 말을 나눠주고, 기도로 영적인 끈을 이어가는 관계는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뛰어넘어 그 사귐이 깊어질 수 있나 보다.

H와 새로운 만남을 만들어 보려고 한다. 어찌 하다 보니 비슷한 시기에 둘 다 한국을 방문할 계획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같은 미국에 살면서 언제나 만나냐, 하며 못 만났는데 결국은 한국에서 만날 기회를 갖게 될 듯하다. 의미 있고 맛있는 사귐의 자리가 마련되길 기대해 본다.

5/23/2014

환대하는 선생이 되기 위하여


<뒷면에 동요 가사를 써서, 보면서 불렀어요.>


한국학교에서 가까운 공원으로 나들이를 갔다. 올해 봄 학기를 마무리함과 동시에 한 학년을 잘 마친 아이들을 격려하는 자리였다. 아이들은 몇 가지 놀이를 신나게 하고 나서 선생님들과 부모님들이 준비한 맛있는 점심을 먹기로 했다. 한국학교에 빠지지 않고 출석했거나 한국어 실력 향상을 위하여 노력한 아이들을 칭찬해주고, 수료한 모든 아이들을 축하해주었다

미국에 오기 전에는 한국학교라는 것이 있는지도 몰랐다. 한국학교는 타국에 거주하는 동포의 자녀들(유치원생에서 고등학생까지)에게 한글을 배울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주는 기관이다. 혹은 한국어에 관심 있는 본토 학생에게도 열려 있어서, 이곳 한국학교에는 두어 명이 수업을 듣고 있다. 인터넷에서 찾아보니 미국 안에 있는 한국학교의 수가 생각보다 많았다.

재미한국학교협의회(NAKS)는 미국 전역 14개 지역협의회로 구성돼 있고 산하에 953개의 한글학교가 있으며 전체 교사 수는 7천 명, 재학생 수는 8만 명에 달하는 조직이다. 이들 한글학교는 주로 교회나 성당, 한인회 등이 주말에 운영한다”(웹진 재외동포의 창, 2012 8월호).

한국학교에서 가르친 경험이 있는 지인들의 소개로, 나는 애틀랜타에 이어서 이곳 한국학교에서 아이들을 만나게 되었다. 처음엔 대체교사로 두 번 수업에 참여했다. 그러다 어느 선생님이 개인 사정으로 그만두게 되어 학기를 마치기까지 남은 4주 동안 한 반을 맡게 되었다. 짧은 기간이라 아이들과 사귐이 깊지 않았지만 가르치기도 하고 배우기도 하는 즐겁고 감사한 시간이었다.

주택가 한 가운데 자리잡은 한적한 공원에는 우리들뿐이었고 두 모둠으로 나누어진 아이들은 맘껏 뛰놀며 놀이에 참여했다. 놀이가 끝나면 반마다 부모님들과 다른 반 친구들 앞에서 장기자랑을 하나씩 하기로 되어 있었다. 제일 큰 언니 반만 K팝에 맞추어 춤을 추기로 했고 나머지 반은 노래를 부르기로 했다.

우리 반은 동요인 솜사탕을 부르기로 했다. 다 같이 불러보는 연습 시간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잘 부를 수 있을지 조금 걱정이 되었다. 우리 차례가 되어 앞에 나가 섰다. 이동용 스피커에 연결된 마이크를 내 앞에 서 있는 어느 아이의 손에 쥐어 주었다. 말할 때 거의 영어를 사용하지만 한국어를 적극적으로 배우려는 학생이었다. 그 아이는 마이크가 부담스럽다는 눈길을 내게 보내면서도 마이크는 여전히 붙들고 있었다. 나도 아이들 뒤에 서서 함께 부르기로 했다. 준비된 음악이 나오면 따라 부르기로 되어 있었다. 그런데 기계끼리 연결이 잘 안되었는지 음악 소리가 너무 작았다. 이미 음악은 흘러나오고 있었고 순간 나는 마이크를 든 아이에게 눈을 찡긋하고는 마이크를 다시 내게로 가져왔다. 아이들이 노래를 잘 부를 수 있도록 작은 소리의 음악 대신 내 목소리를 듣고 따라오라는 판단이었다.

노래를 마치고 인사를 하다가 마이크를 가지고 있던 아이와 눈이 마주쳤다. 아이는 뭔가 만족스럽지 못한 표정이었다. 아차, 싶었다. 아이는 한글을 더듬더듬 읽기는 하지만 자기 목소리를 내고 싶었나? 아무런 요청 없이 마이크를 가져가 버린 것이 화가 났나? 내가 아이에게 한 행동이 짧은 순간에 스치고 지나가면서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마이크를 되가져온 그 순간의 내 마음은 1분 남짓한 공연의 가치를 잊고 있었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준비된 상황이 예상했던 대로 되지 않고 여러 사람들이 보고 있더라도 선생은 여유를 가지고 아이들이 끝까지 노래를 부를 수 있도록 자리를 마련해야 했다. 아이들이 자기 목소리를 내서 서툴더라도 한국말로 부르고 있음을 자랑스럽게 여기도록 도왔어야 했다. 선생의 노래 자랑 시간이 아니었는데, 부끄러웠다.

우리 반 아이들은 선생에게 배움의 기회를 베풀었다는 것을 아직 모른다. 예수회 사제이며 영성 신학자인 헨리 나우웬은 인간은 서로에 대한 적개심(hostility)과 그들을 무조건 따뜻하게 맞아들이는 환대(hospitality) 사이를 오고 가면서 산다고 말하면서, 스승과 제자 사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환대해 주는 선생은 학생들에게 자신도 베풀 것이 있다는 점을 드러내 주어야 합니다. 많은 학생들은 오랜 세월 동안 받는 입장에만 있었고 또 아직도 배울 것이 더 많다는 생각에 깊이 잠겨 있습니다. 그런 나머지, 그들은 자신감을 잃어버렸으며 자기들보다 교육을 덜 받은 사람들에게뿐만 아니라, 동료 학생과 선생에게까지도 자신들이 베풀만한 것이 있다는 생각을 거의 안 합니다”(영적 발돋음, 두란노).

어릴 적 경험을 돌아보아도 그렇고, 선생의 말 한 마디, 행동 하나가 아이들에게 상처가 되기도 하고 격려가 되기도 하는 것을 안다. 다음 학기에 한국학교에서 한 반을 맡아 가르치기로 했다. 그 때 아이들을 다시 만나면 학국학교 선생으로서 부족했던 마음가짐에 대해 귀한 가르침을 주어 고마웠노라 얘기해야겠다. 물론 미안했던 마음도 함께 말이다. 헨리 나우웬의 표현처럼 학생들을 따뜻하게 환대하는 선생이 되기 위한 발돋음을 해보련다.

한편, 상황에 이끌려 학생들을 환대하는 마음을 또 잃게 될 가능성이 많은 내 자신에 대해 잘 알고 있다. 선생으로서 학생을 가르치기만 할 뿐 학생에게서 배우려는 마음이 옅어진다든가 학업의 성과를 드러내 보이려 한다든가 하면서 말이다. 그런 순간에 부디 주님께서 내 영혼을 일깨워 주시고 환대하는 선생의 자리로 다시금 이끌어 주시길 기도한다

5/16/2014

두려움 없이 기도로 나아가기


<미국으로 이사올 때 친구가 만들어 준 십자가>


요즘 새벽기도 시간에 기도하다 보면 입이 근질근질해진다. 기도 소리가 슬금슬금 닫힌 입술을 비집고 새어 나온다. 종알종알 읊조리다가 어느새 커져버린 내 목소리에 놀라, 다시 기도 소리를 안으로 삼켜버리고 만다. 몇 년간 새벽에 침묵 기도(언제나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가 아니었다. 미처 떨쳐내지 못한 졸음이나 잡생각에 빠져 있던 적도 꽤 많다)로 일관해 왔다. 그런데 마음에 생긴 갈급함이 소리를 타고 입 밖으로 자꾸 쏟아져 나오려고 한다.

하나님께 기도 드리는 것 중 하나는 내가 사는 지역에 있는 교회들이 건강하게 믿음을 지켜가도록 지켜주십사 하는 것이다. 여기 사우스캐롤라이나주의 주도인 콜럼비아에 한인은 4,000명 정도이고, 한국에서 오는 유학생과 그들의 가족을 빼면 한인들의 인구 이동이 거의 없는 곳이다. 간혹 우리 교회에 새로 등록한 교우들처럼 다른 주에 살던 다문화 군인 가정들이 육군 훈련소와 새로 마련된 국립묘지가 있는 이곳으로 이사를 오기도 한다. 개신교 교회는 12개쯤 있는 걸로 알고 있다. 사우스캐롤라이나 주립대학(USC) 근처에 있는 교회는 150여명으로 제일 많은 교인들이 있고, 너덧 교회의 교인들이 50-70여명쯤 되는 것 같다.

6,7년 전에 이 지역 여러 목회자들의 이동이 있었다. 그때는 이곳에 살지 않았으므로 정확하지는 않지만, 교회 안에 문제들이 생겨 결과적으로 목회자들이 바뀌게 되고 교인들도 다른 교회로 수평 이동하게 되었다는 얘기를 많이 들어왔다. 그런데 요즘 몇몇 교회들에 대한 안타까운 소식들이 다시 들려오고 있다. 어느 목사는 자신이 속했던 교단을 떠나 남미 선교사로 갔는데, 자신이 목회했던 지역을 방문하여 자신을 따르던 교인들을 따로 모아 여러 날 동안 만나고 갔다는 것이다. 선교비를 부탁하고 갔으며 6개월 후에 다시 오겠다고 했단다. 그 목사의 상식 없는 행동이 새로 부임한 목사와 교인들, 교인과 교인 사이를 껄끄럽게 하고 있다. 어느 교회는 시작할 때부터 이단 시비가 있었고, 이제 다른 한 교회에서도 목사가 이단이라며 교회가 어지러워졌다. 한 교회는 많은 수의 젊은 교인들이 교회를 떠났고, 다른 교회는 교회 건물 구입 과정에 문제가 생겨 사람들 입에 오르내렸었다.

교회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원받은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면서도 여전히 죄를 짓고 살아가는 연약하고 어리석은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기도 하다. 그래서 교회 안에 문제가 생기기도 하고, 하나님 믿는 믿음 안에서 기도와 말씀으로 그 문제를 해결해 나가기도 한다. 하지만 한국교회나 여기 한인교회나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일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어찌하여 이 지경에 이르렀는지 탄식이 절로 나온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교회의 목회자나 교인들을 생각하면 얼마나 마음이 혼란스럽고 아플까, 안타깝다.

모든 기도와 간구를 하되 항상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라”(에베소서 6:18)

이 말씀을 붙잡고,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는(베드로전서 5:8) 이때에 지역 교회들이 반석 같은 믿음 위에 든든히 서 가길 기도하고 있다. 다른 교회뿐 아니라 나의 교회를 위해서도 마땅히 같은 기도를 올려 드린다.

하나님께 드리는 또 하나의 기도는 모국을 위한 것이다. 세월호 참사로 정부의 무능과 태만, 기업의 탐욕, 사회 전반에 만연한 안전불감증 등을 온 국민이 문제로 인식하게 되었다. 생명이 존중되고, 정의로운 정치 지도자들이 세워지고, 가정의 가치가 회복되고, 백성이 안전하고 행복한 삶을 누리는 나라를 세우고자 하는 뜻이 여러 집회나 의식 있는 언론을 통해 모아지고 있음을 타국에서나마 관심 있게 지켜보고 있다. 또 이러한 의지를 가진 국민들이 곧 있을 지방선거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자 하는 걸로 알고 있다.

너는 또 온 백성 가운데서 능력 있는 사람들 곧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진실하며 불의한 이익을 미워하는 자를 살펴서 백성 위에 세워 천부장과 백부장과 오십부장과 십부장을 삼아”(출애굽기18:21)

이 말씀과 같은 지도자를 분별하는 영의 눈이 열려서 국민을 위하여 일하는 참된 지도자가 세워지길 간절히 기도한다.

어려움에 처했을 때 눈물, 콧물 뽑아가며 기도하다가 마음 속 깊은 곳으로부터 울려오는 음성을 들어본 적이 있다. 그 음성은 나의 모든 것을 다 내려놓고 하나님의 뜻을 묻고, 그 뜻에 순종하려는 결단이 있을 때 들려왔다. 조용하고 간결한 그 음성을 듣게 되면 평안이 찾아오며, 어려움을 견딜 수 있는 힘을 얻게 되고, 두려움 없이 살아가도록 도와 주셨다. 그렇게 말씀만으로도 삶을 재창조하는 힘을 가진 분은 하나님뿐임을 고백한다. 교회와 나라를 위한 기도를 통해 무뎌진 영성을 일깨우시고 기도의 자리로 이끄심을 감지한다.

5/11/2014

올바른 쪽으로





집에서 가까운 거리에 주립공원이 있다. 공원의 대부분은 숲이고, 숲 속에 있는 나무들 사이로 걷거나 자전거로 달릴 수 있는 길들이 여러 갈래로 나 있다. 그리고 캠프장, 늘 고요한 호수, 호수에서 탈 수 있는 배를 보관하는 건물, 공원을 관리하는 사무실이 있는 단층 건물 두어 채가 있다. 동네나 상가 입구에 철철이 색과 종류를 달리하여 심겨지는 꽃들을 늘 볼 수 있다. 하지만 이 공원에서는 정문 표지판 근처에 심겨진 몇 그루의 꽃나무를 빼면 인위적으로 심겨진 꽃을 본 기억이 없다. 억지로 꾸미지 않고 있는 그대로를 유지하려는 의도가 아닌가 어림잡아 헤아려 본다. 공원 밖도 마찬가지여서 정문 쪽에 장사가 될까 싶을 정도로 한가해 보이는 햄버거 가게가 하나 있을 뿐이다. 공원 이름을 적어 놓은 표지판이 아니면 그냥 지나쳐 버릴 만큼 밋밋하다. 넓은 공원의 안이나 밖이나 참으로 수수하다.

자칫 지루하게 보일 만큼 조용한 이 공원은 남편과 나에게 치료실 같은 곳이다. 나무 사이로 한 시간 반쯤 걷는 일을 반복하면서 남편의 불편한 허리가 거의 다 나았다. 한국에서보다 움직임이 많이 적어져서 살만 둥실둥실 늘어난 나에겐 그나마 지금 상태를 유지하게 해준다. 또 맘놓고 수다를 떠는 시간이기도 하다. 그러면 갈 길 못 찾던 생각들이 가지런히 정리가 되기도 하고, 답답한 문제들은 해소가 되기도 하고, 새로운 다짐을 하기도 한다. 남편은 이런 공원이 곁에 있어서 감사하다며 언젠가 공원에 뭐라도 기부해야겠다,고 할 정도였다.

우리는 이 공원에 들어가기 위하여 공원 정문의 반대편에 있는 출입구를 이용했다. 전에 살던 집에서 이차선 도로만 건너면 이 입구가 있기 때문이다. 걸어서도 들어갈 수 있다. 이쪽 입구에 들어서면 발걸음이 길을 따라 자연스럽게 옮겨 갈 만큼 익숙해졌다.

그런데 지난해 9월쯤인가, 우리가 다니는 출입구에 표지판이 하나 세워졌다. 입장료를 내고 들어오라는 빨간 글씨의 경고용 안내판이었다. 공원으로 들어가는 좁은 입구가 있는 이곳은 주차장도 있고 숲길을 알려주는 게시판도 있지만 요금을 받는 곳은 없다. 정문 쪽으로 들어갈 때도 요금을 받는 곳이 닫혀 있어서 그냥 들어갔다가 나온 적이 있다. 산책 나온 주민들을 위해 무료로 개방해 놓은 공원인줄 알고 다닌 것이다. 그래서 그냥 편하게 집에서 가까운 출입구를 이용한 것인데 입장료를 내야만 하는 곳이었나 보다. 자세히 알아보지도 않고 나 편한 대로 생각한 것이다. 공원 측에서 보면 입장료도 내지 않고 숲을 휘젓고 다니는 뻔뻔한 방문객이었던 것이다.

그 사실을 확인하고도 무슨 배짱인지 몇 번 더 뒤쪽 입구로 다녔으나 마음은 점점 더 불편해졌다. 입장료를 지불하지 않았으니 공원에 발을 들여놓을 때마다 범법자가 되는 것이다. 기분이 찜찜했다. 공원에 갈 때마다 그쪽으로 드나드는 사람도 여럿 만나곤 했는데 사람들 수도 점점 줄어드는 것 같았다. 이건 아니다 싶어, 공원을 이용하는 사람으로서 정해진 규칙을 지키기로 마음 먹었다.

정문 매표소를 찾아갔다. 문이 닫혀 있었다. 다음에 다시 매표소 앞에 차를 멈추었다. 아무도 없었다. 어떻게 하지, 생각하는 순간 매표소 벽에 붙어 있는 안내판이 그제야 눈에 들어왔다. 나이에 따른 요금표였다. 매표원이 없으면 방문객이 자율적으로 입장료를 내야 하는 것이다.

몰랐다면 모를까 입장료를 내야만 한다면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고 이 공원의 숲이 주는 편안함을 되찾고 싶었다. 공원 정문 쪽에서 가까운 관리사무실을 찾아갔다. 공원입장료는 방문할 때마다 한 사람당 2달러(65세 이상은 1.25달러, 15세 이하는 무료). 남편과 나는 이렇게 저렇게 계산해본 뒤, 내가 살고 있는 주의 주립공원은 어디든지 일년 동안 무제한으로 입장할 수 있는 75달러짜리(사용범위에 따라 99달러, 50달러짜리도 있다) 입장권을 샀다. 이 입장권을 걸어둔 차량에 타고 있는 사람은 모두 입장이 가능하다.

입장권이 있으니 정문으로 들어가든 뒤쪽으로 들어가든 마음에 거리낌이 전혀 없다. 어느 날 웬일인지 매표소에 연세 많으신 할머니께서 앉아 계셨다. 느낌에 자원봉사자 같았다. 우리는 일 년짜리 입장권을 보란 듯이 자동차 뒷거울에 걸어놓았다. 할머니께서는 얼른 입장권을 확인하시고 들어가도 좋다는 표시를 웃는 얼굴로 보여주셨다. 우리도 상쾌하게 굿모닝인사를 남기고 매표소를 쌩 하니 빠져 나왔다.

정해진 규칙은 누가 보든 보지 않든 자율적으로 지켜서 사회 질서가 원만하게 유지되고 이런 체계에 자부심을 갖는 분위기를 이 나라에서 경험한다. 한편, 규칙을 어긴 사람에게는 반드시 벌금을 물게 하는 엄격함도 함께 경험한다. 숲에게 고마워서 기부하고 싶을 정도였는데, 이 기회에 입장료라도 내게 되어 숲에게 받기만 하는 고마움을 조금이나마 갚을 수 있었다. 작은 규칙이 지켜지고 올바르다고 생각되는 쪽으로 한 걸음 옮겨갔을 뿐인데 마음이 편하고 당당하다

5/04/2014

가시덩굴




지금 집은 여태 살아본 집 가운데 꽤 넓은 앞뒤 뜰을 가지고 있다. 뜰이 넓다는 것은 잔디를 관리하는데 그만큼 힘이 든다는 것이기도 하다. 남편의 말에 의하면 농부들이 논의 상태를 서로 비교하며 그 집의 형편을 가늠하듯이 미국 사람들은 잔디가 얼마나 잘 관리되고 있는가를 서로 비교한다는 것이다.

그 동안은 윤구병 님의 『잡초는 없다』나 황대권 님의 『야생초 편지』의 글처럼 사람이 그렇듯 풀도 저마다의 이유를 가지고 자기 자리에서 자라고 있으려니 했다. 풀과 나는  다양하게 자라는 모습을 호기심 있게 바라봐 주는 그저 그런 사이였다. 그런데 남편이 하는 말을 듣고 나니 잔디보다 훨씬 잘 자라서 눈에 잘 띄는 풀은 그 순간부터 잡초가 되었다.

잡초를 그냥 놔둘 수가 없었다. 잡초도 관리 안 하는 게으른 사람처럼 보이고 싶지는 않았다. 지난 이태 동안 봄이 시작되면 잔디 사이사이로 올라온 잡초를 뽑느라 많은 시간을 보냈다. 잡초를 제거하는 화학 약품을 쓰고 싶지 않아서 시간이 날 때마다 손으로 열심히 뽑아 젖혔다. 남편도 양 옆집의 잔디에 뒤지지 않게 우리 뜰도 반듯하게 깎아 놓곤 했다. 손으로 잡초를 골라내는 수고가 헛되지 않아 처음보다는 잡초의 수가 많이 줄었다.

이른 봄, 잡초들이 슬슬 올라오려고 준비하는 낌새가 보였다. 올해는 왕성한 번식력을 가진 고것들을 어찌하나 일찍이 결정을 하기로 마음 먹었다. 쭈그리고 앉아서 풀 뽑는 모습이 동네 사람들 보기에 어떨까 싶기도 하고, 손마디에 약한 통증이 생긴 것을 고려했다. 언젠가 광고지에서 잡초를 통제하는 제품을 본 것이 기억났다. 가게에 가보니 잔디에 뿌리면 잡초가 제거되는 가루가 있었다. 정원관리 업체에서 사용하는 농약 같은 극단의 조치는 아니지만 화학 약품을 선택한 것이다. 결과적으로 잡초가 다른 해보다는 훨씬 덜 하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지난 해에 보지 못했던 새로운 잡초들이 생겨났다. 뒤뜰 한가운데에는 찔레같이 생긴 가시가 많은 넝쿨도 자리를 잡았다.

처음 그 가시 넝쿨을 봤을 때 어이가 없었다. 어디 담 밑이나 잔디밭 가장자리도 아니고 뜰 한가운데 나다니 겁도 없다. 그 넝쿨이 자라면 주변의 잔디를 못살게 굴 것이다. 나는 두어 달 전에 남편한테 그 가시넝쿨을 파내라고 하였다. 남편은 그걸 그냥 두고 있더니 며칠 전 잔디를 깎으면서 그 못된 풀을 파내지 않고 그냥 깎아놓았다. 다시 자랄 텐데 말이다. 풀들이 자라는 데는 저마다 그곳에 있을만한 이유가 있다고는 하지만 잔디가 깔린 뜰 한가운데서 자라는 가시덩굴은 잔디에게나 사람에게나 그럴만한 이유를 못 찾겠다. 뜰에 나가 손이든 화학 물질이든 삽이든 사용하여 그 가시가 달린 풀을 없애야겠다,고 마음 먹고 들여다 보는데 그 풀의 가시가 내 마음을 쿡쿡 찌른다.

겉으론 평온한 듯 보여도 마음 속엔 안정을 추구하는 마음이 가시덩굴처럼 나를 찔러댄다. 세계를 좌지우지하는 나라, 자국민을 철저하게 보호하는 나라, 재난구호가 체계적인 나라라고 말하는 미국에서 7년차 살고 있는 나는 아직 이방인이다. 그 모든 수식어가 나와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이 나라의 역사와 문화를 알아가고 있으나 태어나고 자라면서 체득한 내 나라의 것들과 달라 낯설기만 하다. 낯선 것을 감당해야만 하니 두려움이 생기고, 두려움은 안정된 생활에 대한 갈망을 커지게 하고, 그 갈망은 현재에 만족하지 못하게 한다. 만족이 없다는 것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온전히 믿지 않는다는 것의 다른 말이다.

뒤뜰의 가시덩굴은 내 마음에 있는 가시덩굴도 보게 하고, 동시에 요즘 많은 생각이 집중되어 있는 한국의 세월호 참사를 떠올리게도 한다. 세월호 참사를 통해 드러난, 자기 역할은 제대로 하지 못하고 주변에 해만 끼치는 정부 지도자들과 기업인들이 가시덩굴 같다.

어디에도 쓸 데가 없는 가시덩굴을 더 자라기 전에 뿌리 채 뽑아 버려야겠다. 뒤뜰에서도, 내 마음에서도 말이다. 그리고 한국 사회 속에 박힌 가시덩굴도 뽑아내야 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