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1/2013

소설『높고 푸른 사다리』를 읽고


 
 
전자책으로 한 권의 책을 완독했다. 처음이다. 전자책이 대세가 되어가고 있는 요즘도 나는 종이책이 더 좋다. 종이가 주는 느낌이나 냄새도 좋고, 맘에 드는 구절은 연필로 삐뚤삐뚤 줄을 긋거나 동그라미를 쳐 놓을 수도 있고, 책 내용과 관련되어 떠오르는 생각들을 적어놓기도 하고, 그래서 종이책이 좋다. 전자책을 읽을 수 있도록 만든 기기나 일부 앱들의 기능이 나날이 발전하고 있어 종이책을 읽으면서 하는 줄긋기, 메모, 북마크를 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원하는 내용을 찾아주는 검색 기능도 있어 편리하기도 하다. 그래도 아직 나는 손으로 한 장 한 장 넘기면서 읽는 종이책이 익숙하고 정겹다.

그런데 이번에는 한국 책을 구입할 수 없는 이곳에서  빨리 읽고 싶은 마음에 전자책 구매를 하자는 남편의 의견에 동의를 했다. 온라인 서점에서 책 값을 결제하면 바로 내려 받아 읽을 수 있으니 말이다. 처음 구입한 전자책은 공지영 작가의 새로운 소설, 높고 푸른 사다리. 공지영 작가의 소설은 시대정신을 반영하고 있는 것들이 많다. 그런 점이 공지영 작가의 글을 자꾸 읽게 한다.

높고 푸른 사다리』에서도 감동적이고 역사적인 사실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한국전쟁이 시작된 1950 12월에 있었던 흥남 부두 철수사건과 관련된 이야기가 소설 속에서 잔잔한 배경이 되어 자리잡고 있다. 전쟁에 필요한 연료를 전달하기 위해 흥남 부두를 향해 미국 국적의 배 한 척이 항해를 한다. 북쪽 흥남 부두에 도착했을 때 중공군의 개입으로 대대적인 철수가 이루어지고 있는 때였다. 피난을 떠나려는 많은 사람들은 부두에 모여 어떻게 해서든 배를 타기 위해 몸부림을 치기도 하고 승선이 허락될 배를 조용히 기다리기도 한다. 이것을 본 연료 운반선의 선장은 열 두 명이 정원인 배에 무려 1 4000 명을 태운다. 배가 가라앉거나 바닷속 지뢰가 터질 위험을 감수한 결정이었다. 사흘 동안 바다를 달려 한 명의 사망자도 없이 무사히 거제도에 도착한다. 이런 기적 같은 일을 경험한 선장은 종적을 감춘다. 이 사건의 자세한 내용과 그 후 선장이 어찌되었는지 소설에서 만나볼 수 있다.

이 소설에서는 사랑이라고 꼬집어 말하지는 않으나 여러 가지 사랑 이야기가 나온다. 한 미국인 선장의 피난민을 향한 사랑, 북한에서 선교하다가 죽거나 살아서도 자기 나라로 돌아가지 않고 남한에서 평생을 수도하는 외국인 수사들의 우리나라 사랑, 철탑에 올라가 있는 여성과 그녀의 가난한 아이들을 보듬는 어느 수사의 사랑, 친구들끼리의 사랑, 신부 서품을 앞두고 한 여성과 사랑하게 되어 신부가 되려는 것도 다 버리겠노라 하는 주인공 수사의 열렬한 사랑……

동시에, 사랑하기에 견뎌내야 하는 아픔과 이해할 수 없는 고통과 고난을 겪으며 하나님께 도대체, ?” 라는 물음을 계속 묻는다. 이러한 물음과 톨스토이가 물었던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에 대한 대답은 같다.  공지영 작가는 우리는 사랑하는 법을 배우기 위해 이 지상에 머문다고 표현한다.

높고 푸른 사다리』의 현실적인 배경은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과 거기서 노동하며 기도하는 수사와 신부들이다. 그들은 나와 교단은 다르지만 하나님의 부르심 대로 살아가려고 애쓰는 신앙인이라는 동질감이 생겨 그들의 이야기를 진지하게 읽었다. 내 생각이나 욕심과 하나님의 뜻 가운데서 늘 갈등하면서 그래도 하나님의 뜻을 묻고 따르려고 애쓰며살아가는 나의 마음에 남는 글귀가 있어 적어본다. 주인공인 요한 수사는 소설의 끝부분에서 미국에 살고 있는 노년이 된 연료운반선의 선장을 극적으로 만난다. 이 선장님이 요한 수사에게 한 말이다.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그날 배를 운전한 것은 제가 아니었습니다. 당신 자신을 그대로 놓아주세요. 힘을 빼고 즐거워하세요. 그러면 어떤 항구에 도착할 것입니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절대 미리 모든 것을 가르쳐주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한 가지만은 가르쳐주셨습니다. 반드시, 반드시 고통을 통해서만 우리는 성장한다는 것을요.”

11/14/2013

포옹


엄마의 화장품을 놀잇감 삼아 놀았던(으~~~) 산과 윤이.
 
 
둘째 아들 윤이가 싸놓은 도시락을 챙겨 학교에 가기 위해 주방 쪽으로 온다. 그러면 나는 가방 앞 쪽에 도시락을 편안하게 자리잡아 넣는 아이를 옆에 서서 지켜본다. 아이는 가방의 지퍼를 밀어 잠그고 나를 향해 돌아선다.

엄마, 나 갔다 올게.”

그래, 잘 갔다 와~.”

우리는 서로 꼭 끌어안는다. 그리고 이어서 나 보다 키가 훨씬 큰 윤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거나 뺨을 어루만져 주며 한 마디 빼놓지 않고 덧붙인다.

축복합니다.”

나는 엄마로서 윤이에게 아주 미안한 몇 가지 잊지 못할 일들을 가지고 있다. 첫 번째는 윤이가 새로운 생명으로 우리에게 찾아왔을 때이다. 첫째 아이 강산이를 얻은 이후로 임신이 되었을 때 마냥 기뻐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다. 강산이의 다운증후군 장애를 검사했던 병원에서 다음 아이를 갖게 되어도 검사를 받는 것이 좋다고 했기 때문이다. 우리 부부는 아이를 임신한 사실을 주변 사람들은 물론 가족에게조차 알리지 않고 조용히 검사를 받았다(왜 하나님을 믿는 신앙인이 이런 태도로 새로운 생명을 맞이했는지 제발 묻지 말아달라. 겨우 감추고 사는, 그래도 잘 감추어지지 않지만, 나의 어리석음과 부족함을 적나라하게 드러낼 용기가 아직은 없다). 검사 결과, 정말 정말 감사하게도 건강한 아이였다. 하지만 검사 결과가 나오기 까지 임신 기간의 절반은 걱정 속에서 보내야만 했다. 태아가 가장 잘 느끼는 감정이 두려움이라는데 윤이가 의식하지 못한다 해도 두려움 속에서 그의 삶을 시작한 것이다. 무엇으로도 갚을 길이 없는 미안함이다.

두 번째는 아이들을 더욱 안전하게 지켜주지 못한 것이다. 서울에서 살 때의 일이다. 한 전셋집에서 다른 전셋집으로 이사를 가기 위해 짐을 싸고 있었다. 이사 비용을 아끼기 위해 이삿짐 센터에 맡기지 않고 남편과 둘이서 살림살이를 정리하고 있었다. 미리미리 조금씩 짐을 싸두었다 해도 이사 전 날에 싸야 할 짐이 제일 많았다. 우리 부부는 짐 싸는데 온통 정신을 쏟고 있었고, 아이들은 현관 앞에 있는 정말 손바닥만한 화단에서 흙 장난을 하고 있었다. 그 화단은 창고 건물 지붕에 꾸며져 있던 것인데, 우리가 살던 2층집 현관과 창고 지붕이 연결되어 생긴 아주 조그만 공간이었다. 아무런 안전 장치도 없는 그 좁은 공간에서 아이들이 놀도록 방치한 것이다.

짐을 싸다가 뭔가 싸한 느낌이 들었다. 밖에 나가보니 윤이는 계단 10 개 정도의 높이인 창고 지붕에서 아래로 떨어져 있었다(십 몇 년 전 일인데 여기에 사실을 밝혔다고 경찰에 잡혀가지는 않겠지?). 두 살 반 밖에 되지 않은 작은 아이가 콘크리트 바닥에 누워 있는 것이 보였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고 모든 것이 정지되어 있는 것 같은 그 때의 적막한 느낌이란…… 다시는 느껴보고 싶지 않은 분위기다. 한 쪽 팔꿈치 아래에서부터 손목까지 깁스하고 몇 개월 치료하는 것으로 그 사건은 지나갔다. 하지만 지금도 윤이가 몸 어디가 불편하다고 하면 지붕에서 떨어진 일과 자꾸 연결시켜 생각하게 된다. 미안한 마음이 언제나 가실 지 모르겠다.

엄마 노릇을 제대로 못한 것이 이 밖에도 많으나 마지막으로 미안한 마음이 큰 일은 윤이가 어릴 적에 너무 엄하게 대한 것이다. 예절까지는 아니더라도 내가 아는 상식에 어긋나는 행동은 늘 지적당하고 바로 잡아져야 했다. 목회자 가정이다 보니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자리에 가는 경우도 많았고 공동육아 하면서 친구들과도 어울릴 때가 많았는데, 사람이 많은 곳에서건 그렇지 않은 곳에서건 어리광이나 칭얼거림을 잘 받아주지 못했고 단호했다. 교육에 일관성이 있어야 된다는 명분 아래 상이든 벌이든 “~하면 ~ 한다고 말했으면 그대로 지키려고 애썼다. 고지식하여 융통성 없는 나의 성향 대로 아이를 키운 것이다.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넓은 공간에서 옷을 비롯하여 여러 가지 생활용품을 일정 기간 동안만 팔고 없어지는 세일 행사장이 빈번히 열리던 때였다. 집에서 자동차로 10 여분 떨어진 곳에 그런 행사장이 열렸다는 소식을 듣고 젊은 교인들과 그들의 아이들과 함께 쇼핑을 갔다. 장난과 호기심도 많아지고 이리저리 잘 뛰어다니던 6 살쯤 된 윤이도 함께 있었다. 행사장이 복잡하고 사람도 많았기 때문에 그 입구에서 윤이에게 주의를 주었다. 주의의 내용은 엄마를 잘 따라 다녀라, 딴 짓 하다가 엄마 놓치면 그냥 두고 간다”, 정도 되었던 것 같다. 이것은 엄포를 놓으려고 흔히 말하는 관용어구 같은 것이었다.

행사장 안으로 들어가 둘러보길 잠깐의 시간이 흘렀는데 윤이가 보이지 않았다. 온 길을 되짚어 행사장 밖에 까지 나왔으나 윤이는 보이지 않았다. 같이 간 교인들도 이리저리 흩어져 찾아 다녔다. 행사장 안 있던 곳까지 다시 들어갔다가 또 밖으로 나왔다. 그런데 하얀색 승용차가 그 복잡한 틈으로 들어오더니 윤이를 내려놓는 것이었다. 윤이는 편안한 얼굴이었다. 운전석에 앉아 있는 사람은 중년의 여성이었는데 자동차 뒷좌석에 백화점 쇼핑 가방이 여러 개 있었고 옷 차림새로 보아 잘 사는 사람처럼 보였다.

아이의 말을 들어보니 여기 계실 것 같아 다시 데리고 왔습니다.”

난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잘 알지도 못하면서 고맙습니다, 만 여러 번 말하고 있었고, 그 여성은 휭하니 그 자리를 떠났다. 쇼핑이고 뭐고 다 집어치우고 윤이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왔다.

윤이는 행사장에 들어서자 마자 잠깐 한눈파는 사이에 엄마와 일행을 잃어버린 것이다. 엄마를 놓치면 두고 간다고 했으니 엄마는 저를 두고 가버렸다고 생각한 것이다. 윤이는 밖으로 나와 주차장에서 울고 있는데 어느 아주머니가 울고 있는 이유를 물었다고 한다. 윤이는 엄마가 자기를 두고 집에 갔다라고 설명을 했고, 우리 교회 있는데 까지 데려다 주시면 집을 찾아갈 수 있다고 했단다. 아주머니는 기꺼이 윤이를 승용차에 태워주었고, 윤이는 차 안에서 아주머니의 핸드폰으로 나와 지 아빠와 교회에 전화를 했으나 통화가 안 되었다. 교회 십자가 탑이 보이는 곳에 다다랐는데 그제서야 엄마인 나와 아주머니가 통화가 되었고, 아주머니는 다시 세일 행사장으로 돌아온 것이다(이것은 윤이의 증언(!)에 따른 것이다. 그 아주머니와 통화한 기억이 사실은 없다. 정신이 없긴 했나 보다). 가슴 철렁하고 어이없고 황당한 이 일을 윤이는 대단한 일을 해낸 모험담처럼 떠들었다. 윤이가 엄마를 원망하지 않고 그 정도로 기억해주어 고맙다. 정말 아찔하고 미안한 일이다.

이런 일들은 잊혀지지 않고 종종 윤이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게 했다. 무엇이 계기가 되었는지 기억은 나지 않는데, 어느 날 아침 잠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윤이를 더욱 따뜻하게 보듬어야겠다는 마음이 진하게 들었다. 오늘 실행하지 않으면 안 될 같은 절박한 마음도 들었다. 그 날부터 등교하는 윤이와 포옹이 시작되었다. 일 년이 조금 넘은 것 같다.

윤아, 오늘부터 엄마랑 허그 하고 학교에 가자.”

윤이는 선뜻 그러자, 고 하고 꼬옥 안았으나 서로 어색했다. 윤이는 나를 껴안는 팔의 힘 조절을 어떻게 할 지 몰라 했다. 팔을 내 등에 얹는 듯 마는 듯 하길래 성의 없이 이게 뭐야, 했다. 그랬더니 다음 날은 어찌나 세게 껴안는지 내 가슴이 터지는 줄 알았다. 나는 또 피드백을 해 주었다. 그것도 반복되는 훈련 같아서 익숙해지고 자연스러워졌다. 그리고 이제는 엄마와 포옹하고 나서 학교 가려고 윤이는 나를 기다리기도 한다. 축복의 말도 꼭 듣고 싶어하는 것 같다.

윤아, 엄마는 네게 줄 복을 갖고 있지 않아. 엄마가 축복합니다~, 라고 말하는 것은 그 말 앞에 예수님의 이름으로, 가 생략된 거야.”

나도 알아!”

알고 있다니 고마운 일이다. 포옹하고 나서 자동차에 오르고, 차고의 문이 열리고, 자동차가 차고를 빠져 나가고, 다시 차고 문이 닫히기 까지 윤이를 바라보며 기도한다. 축복합니다~, 뒤에 생략된 기도도 이 기회에 윤에게 들려주고 싶다.

주님, 윤이가 만나는 선생님과 친구들의 관계 속에 늘 함께 있어주세요. 학교에서 배우는 모든 지식이 하나님을 알아가는 지혜가 되게 해 주세요. 세상과 사람을 위해 사랑으로 헌신하여 하나님 나라를 위해 일하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게 해 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아멘

11/07/2013

IEP (2)


Prom 2013


 
앞으로 두 번 정도 남은 IEP 미팅이라도 잘 해보자는 생각으로 일 년 전 받았던 IEP 서류를 꺼내 다시 훑어보았다. 모든 학교 생활이 끝나면 부모와 같이 산다고 하더라도 독립적인 생활이 가능하도록 계획되어 있다. 전자레인지를 이용하여 간단한 음식 조리해 먹기, 식기세척기나 세탁기 사용하기, 시계보고 시간 알기, 동전과 지폐의 가치 알고 헤아리기, 일터에서 다른 사람의 건설적인 비판을 존중하고 받아들이기…… 이러한 목표들을 학교에서, 집에서 얼마나 잘 수행했는지 묻고 답하게 될 것이다.

다음은 직업훈련과 관련된 질문을 적어보기 위해 강산이가 그 동안 일했던 곳과 맡겨진 일이 무엇이었는지 다시 살펴보았다.

여기 지역 과도기 학급(transition class, 만 18-21 세)의 직업훈련은 기본적으로 다니던 고등학교에 출석하면서, 학교 안에서 일하는 것(school-based work experience)과 지역사회에서 일하는 것(community-based work experience) 가운데 선택할 수 있다. 참고로 전에 살았던 곳에서는 직업훈련이 ADAPT(Assisting Developing Adults with Productive Transitions)STRIVE (Supported Training and Rehabilitative Instruction In Vocational Education) 프로그램으로 나뉘어 있다. ADPAT는 다니던 고등학교에 계속 머무르면서 학교와 지역사회를 경험하는 프로그램이다. STRIVE는 교육 시간 내내 일터로 직접 나가서 직업 훈련을 하는 프로그램으로, 이것 역시 공교육 과정에 들어 있는 것이다. 고등학교 4 년을 마친 후 이 두 프로그램 가운데 하나로 들어가게 된다. 이러한 프로그램들은 주마다 다르고, 같은 주라도 카운티마다 조금씩 다르다. 사실 강산이를 통해 미국의 특수교육을 아주 조금 경험했을 뿐 새로운 현실에 맞닥뜨리면 여전히 어리바리 하다.

강산이네 학교 안에서 이루어지는 직업훈련은 학교 소식지 발송을 위해 라벨 붙이기, 온실 관리, 일정 지역 청소 등을 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강산이가 지역사회에서 했던 일은 피트니스 센터에서는 수건 정리하는 일, 백화점이나 Family Thrift shop(재활용품 파는 곳)에서 옷 따위를 옷걸이에 걸어 진열, 정리하는 일을 하기도 했다. 그리고 USC School of Medicine(사우스캐롤라이나대학 약학대학)에서는 사무실 업무 보조 역할로 편지 발송을 위한 라벨 붙이기와 간단한 서류 정리를 했다고 한다. 직업훈련과 관련되어서는 실습을 나간 곳에서 강산에게 맡겨진 일들을 잘 하고 있는지, 어떤 일을 가장 재미있게 잘 하는지를 꼭 물어보리라 적어두었다.

그리고 강산이가 학교 밖에서 잘 하고 있는 일 한 가지를 더 적어두었는데, 교회 재정부에서 집사님들을 도와드리고 있는 것이다. 언제부턴가 집사님들이 헌금 정리하시는 시간에 강산이가 교회 사무실에 들어가는 것을 알게 되었다. 주일마다 사무실에 들어가는 것 같아 집사님들에게 방해가 되지 않을까 신경이 쓰였다. 하루는 사무실 문을 살짝 열고 강산이 보고 그만 나오라고 했다. 그랬더니 집사님은 괜찮다고 하셨다. 그래도 마음이 쓰였다. 그런데 어느 날인가 한 집사님께서 강산이가 어디 있느냐며 찾으셨다. 재정부 일 볼 시간이라면서 말이다. 집사님은 일부러 강산이와 함께 일을 하고 계셨던 것이다. 집사님들 곁에 강산이의 자리를 마련해주신 그 배려에 어찌나 감사하던지…… 강산이가 사무실 안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하는지는 모른다. 그저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재정부 일이 끝났는지 종이 두 장을 들고 나온다. 그 중 하나인 헌금 수입 보고서는 모두가 볼 수 있도록 교회 게시판에 걸어두고, 다른 하나인 재정보고서는 재정부장님과 목사님의 사인을 받아가지고 간다. 그 일을 하는 동안 강산이의 걸음은 얼마나 힘찬지 모른다. 이 사실을 IEP에 가서 얘기하고 싶어 잘 보이게 적어놓았다.

정해진 IEP 미팅 시간보다 조금 일찍 학교에 도착했다. 학교 현관에서 체크인을 하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회의실이 있는 3층으로 갔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려는데 마침 강산이와 담임 선생님이 엘리베이터 문 앞에 와 있었다. 회의실이 1층으로 바뀌었다며 내려가자고 했다. 엄마가 학교에 온다고 강산이가 많이 좋아라 했다며 선생님께서 전해주셨다. 선생님이 그 말을 하는 바람에 금방 잊었지만, 엘리베이터 앞에서 두 사람을 만나지 못했으면 조금 헤맬 뻔 했다. 학교가 생각보다 넓고 복잡하다.

담임 선생님은 회의를 시작하자며, 그 동안 여러 차례의 IEP 미팅을 하느라 애쓰셨을 텐데 오늘이 마지막 회의가 될 것이라, 고 말씀하셨다. 2014 1월에 강산이가 스물 한 살이 되므로 이번 학년도가 마지막이라는 것이었다. 나는 장애 학생은 스물 두 번째 생일 전 날까지, 그러니까 교육 받을 수 있는 21 세까지는 꽉 채워 학교에 다니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러면 강산이는 이번 학년도가 끝나는 2014 6월이 끝이 아니라 스물 두 살 생일이 들어있는 2015 1월이 끝이어야 하는 것이다. 내년 6월이 끝인지 몇 번 확인을 했는데 그렇다는 것이다. 한 학기 일찍 학교를 마친다고 해서 큰 일이 일어나는 것은 아니지만 마음에 의문이 가시지 않았다.

게다가 학교 심리학자는 사우스캐롤라이나 경제가 어렵기 때문에 강산이가 학교를 마친 후에 일할 곳을 구하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했다. 강산이가 자원봉사든, 보수를 받든 일을 할 수 있는 곳이 생긴다는 것은 사회와 소통하는 길 가운데 중요한 하나다. 그 분은 현실을 있는 그대로 얘기하는 것일지라도 아직 시간이 남았는데 어떤 노력도 하기 전에 단정지어 얘기하는 것 같아 마음이 답답해져 왔다. 한편 일터와 더 먼 거리에 있는 중증장애인들을 생각하면 강산이의 경우는 투정에 지나지 않을 것 같다.

담임 선생님은 강산이가 지난 IEP 목표들을 대체로 잘 수행했다고 평가해주셨고, 나는 준비해간 직업훈련과 관련된 질문들을 주로 했다. 선생님은 강산이가 특히 사무실 업무를 좋아하고 잘 한다고 하셨다. IEP 초안에도 사무실 일과 관련된 기술들을 강화하는 계획들이 들어 있는 것을 보게 되었다. 사우스캐롤라이나대학의 약학대학 사무실에서도 일을 아주 잘 했다고 하셨다. 강산이가 교회 재정부에서 일을 돕고 있다는 것도 비슷한 종류의 일인 것 같아, 선생님의 평가에 이어 자연스럽게 잊지 않고 얘기할 수 있었다. 보통은 IEP 회의에 가도 난 그다지 말이 많지 않은데, 이번엔 미리 준비한 얘기가 적절하게 강산이의 강점을 드러내는데 도움을 준 것 같았다. 신기하고 감사했다. 담임 선생님은 이번 IEP모임을 한 장에 정리한 문서를 나중에 보내주셨는데, 강산이가 사무실 업무를 더 잘하기 위해서 지역 내 다른 교회나 미술을 가르치는 사무실 등에서 훈련할 것이라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이것은 잘 되었다.

또 마지막 IEP 모임이기 때문에 가디언십(Guardianship, 장애인의 법적인 후견인을 세우는 일)이나 직업재활센터에 대한 정보를 다른 때보다 구체적으로 제공해주었다. 데이케어(day care, 주간보호시설)에 대해서는 지난 번과는 달리 언급하지 않으셨다. 언젠가 방문하여 알아본 데이케어 종일반에 다닐 경우 매월 3,000 달러 정도의 비용이 든다. 또 현재 어느 장애학생이 다니는 데이케어에서도 그 정도의 비용을 받는다고 그 어머니로부터 들은 바 있다. 이 비용은 개인적으로 부담하기도 하고, 메디케이드 웨이버(Medicaid waiver, 연방정부가 정한 기준에 해당되는 장애인에게 주정부가 제공하는 서비스)를 받는 사람은 주정부가 그 비용을 담당하게 되므로 장애인 본인은 무료로 데이케어의 서비스를 받을 수 있다. 그런데 메디케이드 웨이버 대기자가 몇 천명에 이른다. 여기는 5,000 명 정도 된다고 했다. 강산이가 데이케어를 이용하려면 그 비용을 개인이 부담해야 한다. 와우! (더 적은 비용으로 다닐 수 있는 주간보호시설이 있는지, 이것을 지원하는 정부차원의 다른 서비스가 있는지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한다. 와우! 반면, 만약 저렴한 비용으로 다닐 수 있는 데이케어가 있다면 애틀랜타에서 만난 여러 장애우들이 다니고 있었을 텐데 그 당시에는 내가 만난 이들 중에 한 명도 없었다.)

회의를 마치고 갑갑한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왔다. 차근차근 하나씩 풀어가면 되겠지, 하면서도 산 넘어 산 같이 여겨진다. 당장 의문을 해결할 수 있는 것이라도 해서 그 짐을 덜어내리라. 애틀랜타에 살 때 알고 지내던 어느 장애학생의 어머니에게 전화를 했다. 공립학교에 언제까지 다닐 수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역시 내가 알고 있던 대로 스물 두 번째 되는 생일 전 날까지 다니는 거라고 했다.

나는 선생님께 이메일을 보냈다. 애틀랜타에서는 스물 두 살 생일이 되는 전 날까지 학교를 다니는데 강산이에게 이번 학년도가 마지막인 것이 맞느냐고 말이다. 선생님은 바로 답장을 주셨다. 주마다 법 적용이 다양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곳 정책에 따르면 21 세 생일이 들어 있는 학년도까지만 학교에 다니게 되어 있다는 설명이었다. 그래서 내년 6 6일이 마지막 날, 맞는다고 하셨다. 자세한 설명을 해주어 진심으로 감사하다는 답글을 보내드렸다.

보통은 자녀들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이나 직장을 갈 나이쯤 되면 부모의 품을 떠나는데 우리 강산이는 더 가까이 오게 된다. 강산이가 학교를 다 마친 후의 삶을 어떻게 준비해야 할 지…… 앞으로 펼쳐질 새로운 패턴의 삶이 딱 한 학기만큼 더 가까이 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