쪼끄만 꽃무늬 같은 착한 짓


강산이가 어머니 날 선물로 준 꽃.
손바닥만한 작은 화분에서 시들거리길래 꽃밭에 심어주었더니 지금까지 꽃이 핀다.
 
나는 초등학교 1학년 첫 학기를 인천 시내에서 마치고 그 해 가을, 변두리에 있는 학교로 전학을 갔다. 아빠 직장과 가까운 곳에 살기 위해서였다. 시내에서 버스를 타고 한 시간쯤 가는 거리인데 이사 가는 날은 택시를 타고 갔다. 태어나서 처음 이사 가는 거였는데 기억나는 어떤 느낌은 별로 없다. 다만 한 가지 잊혀지지 않는 장면이 있는데 코스모스 길이다. 그때는 비포장 도로였고 택시가 달릴 때 일으키는 뿌연 먼지를 몸을 돌려 뒤쪽 창으로 바라보며 가고 있었다. 시내로부터 새로 살 집까지 삼분의 이쯤 가면 남동 삼거리가 나오는데 거기를 분기점으로 그 이전 풍경과 사뭇 다른 풍경이 펼쳐졌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삼거리에 이르기 전 버스길 양쪽에는 집들과 작은 상점들이 드문드문 있었던 것 같다(잘 기억이 안 난다. 그 길이 어느 순간 포장도로가 되고 넓어지고 시청 같은 큰 건물들이 들어서면서 너무나 많이 바뀌어 이젠 옛날 길을 찾기도 힘들다). 그 삼거리를 지나면서부터는 논들이 펼쳐지면서 야트막한 야산도 보이고 그랬다. 논과 버스 길의 경계에는 길 양쪽으로 코스모스가 줄지어 가득 피어 있었다. 내가 타고 있던 택시가 일으키는 엄청난 흙먼지 바람에 코스모스가 뒤엉켜 힘겹게 흔들리는 모습은 첫 이사와 관련되어 아련한 한 장면으로 기억 속에 남아있다.

이곳에서 중학교 2 학년 봄 학기 마칠 때까지 살았다(다시 시내로 이사한 후에도 이곳에서 다니던 교회를 대학교 2 학년 때까지 다녔다. 그 교회는 나의 모교회가 되었다). 초등학교를 마치고 중학교에 다니기 시작하면서는 버스를 타고 시내로 다녀야만 했다. 내가 살던 지역에는 중학교가 없었기 때문이다. 버스는 한 시간에 한 대 정도가 다녔는데 그것도 제시간에 오지 않을 때가 많아 버스 시간 맞추는 것이 정말 어려웠다. 그러다 보니 등하교 시간에는 늦지 않게 다니려는 학생들로 버스가 늘 꽉 찼다. 옛날에는 버스 사정이 다 그랬나……. 그렇다 해도 정말 사람을 미어지도록 태우고 다녔다.

토요일 같이 중고등학교의 수업 끝나는 시간이 비슷한 날에 집에 가는 버스를 타기 위해서는 마음을 단단히 먹어야 했다. 버스 종점이 내가 다니던 중학교에서 걸어서 30 분쯤 되는 곳에 있었다. 학창 시절 추억이 많은 동인천이 바로 그곳이다. 종점으로 걸어가서 버스를 타는 이유는 조금이라도 편한 자리를 잡기 위해서였다. 의자에 앉으면 그날은 재수가 억세게 좋은 날이다. 그런 건 어쩌다 하늘의 별 따기였고, 그저 손잡이라도 제대로 잡고 서서 갈 수 있는 자리를 차지하면 그것으로 대만족이었다. 또 다른 이유는 종점에서 버스에 너무 많은 사람이 타고나면 내가 평상시에 기다리던 정거장에서 버스가 서질 않고 가버리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었다. ! 이런 일이……. 추운 겨울에 세 시간 넘게 집에 가는 버스를 기다려본 적도 있었다(이 버스 타기에 대한 이야기들은 언제 한 번 다시 떠올려봐야겠다. 재미있을 것 같다).

버스에 타는 것을 성공하고 나면 그 다음부터는 견뎌야 한다. 발이 밟히는 건 일도 아니고, 버스가 급정거라도 하면 검은 색 교복을 입은 학생들이 우르르 한 쪽으로 쏠리기도 하고, 그러다 누구 하나 넘어지기라도 하면 도미노처럼 쓰러져 사람들 밑에 깔리기도 하고, 소리지르고, 지금 생각하니 웃음이 나온다. 또 집까지 절반쯤 되는 거리에 있는 석바위를 지나면 비포장 도로로 바뀌었다. 온 몸과 정신이 고도의 긴장 상태가 된다. 버스가 조금 빨리 달린다 싶으면 도로가 깊게 패어진 곳에서는 학생들의 머리가 버스 천정에 가 닿을 듯이 튕겨진다. 그럴 때 조금 활달한 학생들은 일부러 요동이 심한 버스 뒷좌석을 차지해서는 까르르 숨 넘어가듯이 웃어대곤 했다. 나는 새침데기여서 잘 웃지도 않고 어떻게 해서든 넘어지지 않으려고 버스 의자나 천정에 달린 손잡이를 잡은 손에만 온통 정신을 집중하고 있었다. 왜 그렇게 뻣뻣하게 살았나 모르겠다.

어느덧 우리 가족은 다시 시내로 이사 나왔고 나는 중학교 3학년이 되었다. 학년 초였던 것 같다. 1,2 학년 때 같은 반을 해보지 않았던 친구들 가운데 한 명이 다가왔다. 한 번도 말을 주고 받은 적이 없는 낯선 친구였다.

너 나 기억하니?”

나는 분명 말도 없이 고개만 저었을 것이다. 처음 보는 친구였다.

나 도림동 살아.”

그래도 기억이 안 났다. 도림동은 집에 가는 길에 20 분 전쯤 있는 동네였다.

버스에서 네가 나 잡아줬잖아.”

도림동은 세 개의 버스 노선이 지나는 곳이어서 같은 번호의 버스만 타는 나와 마주칠 확률이 적었다. 버스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그 친구는 순박한 얼굴로 짧은 설명을 덧붙였다.

여느 날처럼 사람이 많은 버스를 타고 가고 있었는데 버스가 심하게 흔들렸고, 그 친구가 넘어질 뻔 한 것을 내가 잡아주어 괜찮았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한 반이 되어 반갑다, 며 두 눈이 안 보이게 온 얼굴로 웃었다. 나는 어떤 표정으로 친구와 마주보고 있었을까? 그 친구는 내가 다니던 교회 옆에 있는 성당에 다니고 있었다. 친구의 집에서 그 성당을 가려면 내가 타고 다니는 버스를 타야 했기 때문에 아주 가끔 버스에서도 만났고, 중학교 마지막 학년 동안 친하게 지냈다.

 

이것은 다른 이야기이다.

이번에 한국에 갔을 때(또 한국!) 다니던 교회에서 주일 예배를 한 번 드렸다. 부모님이 그 교회에 다니고 계시니 엄마네 집에 머무르는 동안 인사를 가는 것이 마땅했고, 지난 담임 목사였던 남편에게 설교할 기회를 주셔서 감사한 마음으로 예배에 함께 했다.

예배 시작하기 전 교인들과 어느 정도 인사를 나누고 자리를 잡아 앉았다. 그러자 뒤에 앉아계신 어르신 한 분이 등을 톡톡 건드렸다. 돌아보니 아주 낯설지는 않은데 이 교회에서는 처음 뵙는 분이었다. 무슨 일이신가요, 하는 얼굴로 쳐다보았다.

장날 오 천원(미화 오 달러 정도)이 없어가지고 그러니까 사모님이 빌려줄까요 했던 사람이에요.”

예배가 시작되려는 때이기도 해서 뭐라 답변을 제대로 못하고 다시 뒤돌아 앉았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살짝 궁금했으나 예배에 집중하기로 했다.

예배가 끝나고 1층 친교실에서 점심도 다 먹고 권사님들께 인사하고 일어나야겠다 싶어 권사님들 앉아계신 테이블로 옮겨가 앉았다. 어려운 교회 시절을 함께 겪었던 애잔한 마음이 남아있는 분들이다. 말로는 마음 속을 다 표현 못해도 나를 바라보는그들의 눈가에는 지난 날 함께 겪었던 신앙 여정이 어려 있었다. 나도 눈빛으로 답해드렸다.

마침 엄마가 옆에 와서 앉았고 예배 전에 뵈었던 어르신을 소개해 주셨다. S 권사님이라고 했다. 엄마는 이미 들은 바가 있는지 S 권사님과 나의 일화를 다시 설명해주었다. 어느 장날 S 권사님이 물건을 사고 계산을 하려고 지갑을 열었는데 있는 줄 알았던 돈이 없었단다. 당황해 하고 있는데 옆에 있던 왠 여인네가 오 천원 빌려드릴까요, 했다고 한다.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 돈을 빌려준다고 하니 괜찮다고 하고는 지갑을 다시 뒤적거리셨나 보다. 어찌된 일인지 지갑 옆면에 납작하게 붙어있던 돈이 나타나 물건 값을 치르셨고, 나중에 알고 보니 돈을 빌려주겠다던 낯선 여인이 이 교회 목사의 아내였고 그이가 나였더라는 얘기였다. 다른 교회에 다니셨는데 어찌어찌 이 교회로 나오신 지 꽤 되신 것 같았다. 엄마 말에 의하면 그 권사님네는 부자란다.

 

얘기가 길었지만 아주 작은 일들이었다. 넘어지려는 옆 사람을 잡아주었을 뿐이고, 당황하여 쩔쩔매는 할머니에게 적은 돈(조금만 더 큰 액수였으면 모른 채 했을 것이다)을 내어드리려던 것뿐인데, 그것을 기억해주니 오히려 고마웠다. 그리고 그들에 의해서 다시 들려진 이야기는 내 삶 어딘가에도 살포시 잘 저장해 두었다. 이런 착한 짓은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기분 좋은 연결 고리가 되기 때문이다.

내 인생이 평생을 두고 짜여지는 태피스트리(Tapestry)라면, 그 날줄이 신의 양 손에 붙들려있고 말과 행동과 생각 같은 것은 씨줄이 되어 나만의 무늬를 만들어가는 것 같다. 그리고 친구와 S 권사님의 이야기는 색실로 쪼끄만 꽃무늬 하나 만들어 넣은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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