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6/2013

양파 잼 만들기


 
 
아침 식사로 빵이나 시리얼을 먹어온 지 오래되었다. 거기에 과일 한 조각과 진하지 않은 블랙커피 한 잔이면 행복한 아침 상차림이 된다. 그리고 요즘엔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CCM(여기 지역은 FM 89.7 MHz 이다)이 아침 메뉴에 보태졌다. 음악은 몸에 남아 있는 잠도 털어내고 아이들을 좀 더 부드럽게 깨우는데도 도움이 된다.

내 덩치가 표준일 때나 비만에 가까워지고 있을 때나, 한국에서 살았을 때나 미국에 사는 지금이나 아침 식사 내용이 다르지 않다. 그런데 엄마는 이번 한국 방문 때 아주 듬직해진 나의 모습을 보고 그 원인이 때문이라고 하신다. 추석 즈음에 엄마에게 전화를 했는데 안부를 묻고 끊을 때쯤 되니 통화 때마다 빠지지 않는 에 대한 주제가 기다렸다는 듯이 등장을 한다.  

우리 사모님이 그러시는데 살을 빼려면 빵을 끊어야 된대.”
그럼 빵이 주식인 사람은 다 뚱뚱하겠네!”
어쨌든 우리 딸 살 더 안 찌게 해 달라고 기도하고 있다~.”
그런 기도는 안 들어주셔!”

엄마는 깔깔깔 웃음을 참지 못하면서도, 예상치 못했던 한 마디 말씀을 얼른 덧붙이신다.
 
그래도 할 거다.”

엄마는 약속 시간을 잘 지키는 사람이다. 중보기도도 정해진 시간에 하려고 많이 노력하시는 것을 알고 있다. 그리고 엄마가 가진 기도의 내용들을 빼놓지 않고 기도하기 위해 평상시에도 늘 되뇌는 모습도 보아왔다.

엄마의 기도 덕분인지 요즘은 아침에 먹는 토스트 2(겨우!)에 대한 욕구가 덜해졌다. 사실 이 식빵 2장을 적게 먹거나 안 먹는다는 것은 토스트에 발라 먹는 땅콩버터의 양도 줄어든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는 땅콩버터를 좋아해도 너무 좋아한다. 부드러운 크림 타입의 땅콩버터도 좋고, 땅콩 알맹이가 씹히는 청크(chunk) 타입도 좋다. 아침 식사 때마다 토스트와 땅콩버터를 먹는 나를 그리 오랜 시간 동안 지켜만 보던 남편도 이제는 나보다 땅콩버터를 더 잘 먹는다.

    엄마와의 통화 이후 또 하나의 변화는 땅콩버터 대신 양파 잼을 먹는 것이다(땅콩버터가 먹고 싶을 때는 두 개를 같이 먹기도 함). 언젠가 문화센터 요리교실에서 서너 가지 배운 것 가운데 하나이다. 요리 선생님 말씀에 의하면, 유럽 여행 때 먹어보았는데 거기 사람들은 양파 잼을 흔하게 먹는다고 한다. 처음엔 양파로 잼을 만드는 것이 낯설게 여겨졌으나 양파 잼을 먹어보면 양파 자체가 몸에도 좋고, 맛도 깔끔하니 괜찮다. 얼마 전부터 만들어야지 마음은 먹고 있었는데 게으름 피우다 드디어 만들었다.
 
    무엇을 먹든 음식과 건강 주심에 감사한 마음으로, 기쁘게, 적당히 먹으려 한다. 이런 마음 자세도 좋긴 한데...... 건강을 위해, 가족을 위해 살이 좀 빠지기는 해야 된다.


 <양파 잼 만들기>

재료: 양파 1 , 포도씨유 2 큰술, 흑설탕(또는 황설탕) 4 큰술, 식초 2 큰술, 소금 1 작은술, 발사믹 식초 4 큰술

 
1. 앙파를 가늘게 채 썬다. 이것은 양파 3개 분량.
 
2. 포도씨유를 두르고 양파가 나른해질 때까지 볶는다.
3. 양파 색이 투명해지면 흑(황)설탕을 넣고 볶는다.
4. 식초와 소금을 넣는다.
 
5. 양파에서 생긴 물을 졸여준다. 한 20분 쯤(양파 양에 따라 조절).
 
6. 발사믹 식초를 넣고 10분 정도 더 졸인다. 꼭 짜장 같다.^^
 
양파 3개로 만든 양파 잼 양은 900g 들이 병의 이 정도.
 

9/20/2013

영화 "말할 수 없는 비밀(Secret)"을 보고




애틀랜타에 살 때부터 즐겨보는 유선방송 채널이 있다. 여행 채널(TRAVEL CHANNEL)이다. 그 채널 가운데서도 세계 곳곳(미국 국내를 포함해서)을 여행하면서 볼거리, 먹을거리, 잠잘 곳 따위를 직접 체험하면서 소개해주는 쇼들을 좋아한다. 예를 들면 Rachel Ray$40 a day, Anthony BourdainThe Layover or No Reservations, Samantha Brown, 그리고 Andrew ZimmernBizarre Foods 이다.

$40 a day는 여기 콜럼비아에서는 본 적이 없으나 애틀랜타에서는 방송 시간을 기억했다가 찾아서 보곤 했다. 이 쇼의 진행자 Rachel(요리사)은 하루에 40 달러를 가지고 세 끼를 해결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여행한 지역에서 주로 유명한 식당들을 찾아 다니는데 음식값이 비싼 곳에서는 가진 돈이 적다며 코스 요리에서 음식 하나만 골라 시킬 때도 있다. 그러면 음식점 주인이나 종업원은 흔쾌히 주문을 받는 것은 물론, 자기네 대표음식을 소개해주기도 하고(비싸도 그냥 주기도 한다), 비싼 음식이면 양을 적게 주어 음식값을 적게 받기도 한다. 처음엔 저렇게 알뜰하게 여행을 할 수도 있겠구나 했다. 그러다 방송을 촬영하는 카메라가 없거나 유명한 방송인이 아니고, 평범한 동양 여인이 방문해도 저런 합리적인 호의를 받을 수 있을까, 쓸데없는 상상을 하기도 했다.

여기서는 애틀랜타에서와는 달리 한국 방송 보는 시간이 늘어나면서 미국 방송을 보는 시간은 많이 줄었다. 유선방송 요금을 내는 것이 아까울 정도니 말 다했다. 그래도 내 손에 텔레비전 리모컨이 쥐어지면 어김없이 여행 채널부터 눌러본다. 화면으로나마 미국과 세계를 경험하는 것도 즐겁다.

한국 방송 중에도 여행과 관련된 쇼들을 즐겨본다. 정글의 법칙, 아빠 어디가?, 12, 한국인의 밥상, 그리고 요즘 흥미롭게 보고 있는 꽃보다 할배가 있다. 앞의 것들은 여행하면서 생존, 미션, 게임, 음식과 결합된 것이라면 꽃보다 할배는 그냥 순수한 여행 체험기다. 70 세 이상 된 4명의 연륜 있는 배우들과 젊은 배우 한 명이 대중교통을 이용하여 예약한 숙소를 찾아가고, 명소를 찾아 다니고, 음식점을 찾아 끼니를 해결하는 모습은 여느 사람이 여행하는 모습과 비슷하다. 다른 예능 쇼에서 주로 볼 수 있는 인위적인 미션 같은 것 없이도 그 안에는 낯선 곳에서 겪을만한 긴장과 흥분, 감동이 다 담겨있다. 그런 면에서 꽃보다 할배를 무척 재미있게 보고 있다.


요즘 꽃보다 할배는 지난 번 유럽에 이어 대만 여행기를 방송하고 있다. 101 타워, 신베이터우 온천, 단수이 해변 공원 등을 소개하고 있다.  단수이 해변에 이르러서는 강 하류인데 바다와 연결되는 곳이며, 주걸륜이 감독한 영화 말할 수 없는 비밀의 배경이 된 곳이라고 이 방송의 PD는 알려준다. 바로 그때, 이 방송을 함께 보고 있던 둘째 아들 윤이가 한 마디 한다.

, 저기였구나!”
너 저 영화 봤어?”
. 좋은 피아노 곡 찾다가 어떻게 하다 보니까 사람들이 좋다고 해서 나도 봤어.”

윤이는 한참 전부터 알려진 “River flows in yours”, “Flower Dance”, 일본 애니메이션 삽입곡들 중 또 다시인생의 회전목마같은 곡들을 잠깐씩 피아노로 연습하기도 한다. 리듬이 감미로운 것들이기에(사춘기 아들이 좋아할 만하다) 윤이가 연주하면 듣기 좋다. 정신이 사나워 피아노를 그만 쳤으면 할 때도 아주 가끔 있지만 거의 참고 듣는다. 아들이 연주하는 피아노 소리를 언제까지나 들을 수 있는 것은 아닐 테니까. 윤이는 가지고 있는 피아노 곡들이 어느 정도 손에 익으면 다른 곡을 찾아보곤 했었나 보다. 그러다 말할 수 없는 비밀이라는 영화도 보게 되고.

그 영화 재미있어?, 했더니 잔잔하고 볼만하단다. 주걸륜이 감독도 하고 주연도 맡았으며 피아노도 직접 쳤다며 주절주절 말이 길다(인터넷으로 검색해보니 주걸륜이 피아노를 잘 치는 것은 사실이며 영화에 나오는 피아노 배틀 장면에서 직접 연주했는지 여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한 듯). 잔잔해? 지루한 것 아니야?, 물어보려다 그만두고 꽃보다 할배를 보는 중이니 영화와 관련된 이야기는 나중에 듣겠다며 윤이의 입을 막아버렸다.

토요일 오후, 저녁을 먹고 나면 각자 방으로 흩어진다. 남편은 주일 설교 원고를 다시 한번 살펴보는 시간이다. 그런데 윤이는 영화 보자며 컴퓨터 자판을 두드려대고 남편은 푹신한 팔걸이 의자에 앉아 영화감상 모드를 취하고 있다. 다음 날, 그러니까 주일 설교는 우리 교회 중등부에서 설교를 해주시는 톰슨 목사님이 하시기로 되어 있다는 걸 깜빡 잊고 있었다. 톰슨 목사님은 다른 주에 있는 미연합감리교회에서 은퇴하시고 여기 사우스캐롤라이나에서 살고 계신다. 우리 교회 집사님과의 인연으로 주일마다 중등부 아이들과 예배를 드리신다. 그 목사님 덕분에 남편은 여유 있는 한 토요일 오후를 보내게 된 것이다.



영화 말할 수 없는 비밀(Secret)”의 첫 장면부터 인상적이었다. 길을 따라 야자나무가 줄지어 있는 깔끔하고 고급스러워 보이는 고등학교가 비춰진다. 영화에서 나오는 키가 큰 야자나무와 같은 종류인 작은 야자나무(Palmetto)는 이곳 주(state)를 대표하는 나무이고 곳곳에서 볼 수 있어 눈에 익숙하다. 하지만 아직도 야자나무가 심기어진 것을 보면, 살고 있으면서도 이국적이라는 느낌이 더 많다. 대만이 여기처럼 따뜻한 기후를 가지고 있음을 감지하며 어떤 내용이 펼쳐질지 기대가 되었다. 참고로 이 학교는 담강예술고등학교로 주걸륜이 실제로 다닌 학교라고 한다(별걸 다 알아봤다).

이 학교로 전학 온 상륜(주걸륜)은 피아노를 매개로 계륜미(샤오위)를 만나게 되고 예쁘고 상큼한 그리고 시간이 갈수록 가슴 시린 사랑을 하게 된다. 세상살이에 눈이 밝기 전, 조금 어린 나이에 설레고 소화가 안 되어 얹혀 있는 느낌 같은 첫사랑을 해 본 이들은 그들이 보여주는 사랑에 살며시 미소를 짓게 될 것이다. 그리고 윤이같이 아직 사춘기에 있는 이들은 아마도 주인공들의 감정에 동화되겠지…….

사이 사이에 음악학과 친구와 상륜이 피아노 배틀을 하기도 하고, 계륜미와 함께 피아노를 연주하기도 하는 등 아름다운 연주곡도 들을 수 있다. 그리고 두 주인공이 가는 곳, 사는 곳의 배경이 단수이 해변을 중심으로 펼쳐진다. 평화롭고 고풍스러운 분위기는 한낮의 햇볕이 점점 부드러워져 가는 이 가을과 잘 어울리는 영화라는 생각이 든다.

앞서 말한 꽃보다 할배에서 이 영화를 몇 줄 자막으로 소개를 한다. 화면이 빨리지나 가는 바람에 눈여겨보지 못했는데 오히려 영화의 재미를 위해서 잘된 일이었다. 여기 그 자막을 그대로 옮겨보련다. 영화를 볼 마음이 있거든 눈을 게슴츠레 하게 뜨고 획 지나치듯 읽으면 좋겠다. 그들의 사랑이 애절하게 느껴지는 이유가 될만한 단어들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주걸륜이 감독 및 주연을 직접 맡은 판타지 로맨스 영화.”
흥미로운 음악과 풋풋한 사랑, 그리고 시간 여행을 한데 묶어 호평을 받았다.”(꽃보다 할배)

영화를 다 보고 나서 장면들과 사건들의 앞뒤를 맞추어보거나 영화에서 다 말하지 못한 이후의 이야기를 상상해보는 것도 재미가 있다. 윤이와 함께 이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보여지는 장면에만 집중하고 있던 50대를 바라보는 나와는 달리 그 상상력이 놀랍고 넓었다.

신문을 보다가 영어 한 문장을 발견했다.

“When you know that you love her, you’ll know what to do.”

사랑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지 알게 된다, ! 이 말은 남자 주인공 상륜의 용감한 선택을 표현해주는 말 같아 적어두었었다. 그리고 ‘her’‘Jesus’로 살짝 바꾸어 묵상의 소재로 삼아보기도 했다.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요한일서 4:18)

9/14/2013

쪼끄만 꽃무늬 같은 착한 짓


강산이가 어머니 날 선물로 준 꽃.
손바닥만한 작은 화분에서 시들거리길래 꽃밭에 심어주었더니 지금까지 꽃이 핀다.
 
나는 초등학교 1학년 첫 학기를 인천 시내에서 마치고 그 해 가을, 변두리에 있는 학교로 전학을 갔다. 아빠 직장과 가까운 곳에 살기 위해서였다. 시내에서 버스를 타고 한 시간쯤 가는 거리인데 이사 가는 날은 택시를 타고 갔다. 태어나서 처음 이사 가는 거였는데 기억나는 어떤 느낌은 별로 없다. 다만 한 가지 잊혀지지 않는 장면이 있는데 코스모스 길이다. 그때는 비포장 도로였고 택시가 달릴 때 일으키는 뿌연 먼지를 몸을 돌려 뒤쪽 창으로 바라보며 가고 있었다. 시내로부터 새로 살 집까지 삼분의 이쯤 가면 남동 삼거리가 나오는데 거기를 분기점으로 그 이전 풍경과 사뭇 다른 풍경이 펼쳐졌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삼거리에 이르기 전 버스길 양쪽에는 집들과 작은 상점들이 드문드문 있었던 것 같다(잘 기억이 안 난다. 그 길이 어느 순간 포장도로가 되고 넓어지고 시청 같은 큰 건물들이 들어서면서 너무나 많이 바뀌어 이젠 옛날 길을 찾기도 힘들다). 그 삼거리를 지나면서부터는 논들이 펼쳐지면서 야트막한 야산도 보이고 그랬다. 논과 버스 길의 경계에는 길 양쪽으로 코스모스가 줄지어 가득 피어 있었다. 내가 타고 있던 택시가 일으키는 엄청난 흙먼지 바람에 코스모스가 뒤엉켜 힘겹게 흔들리는 모습은 첫 이사와 관련되어 아련한 한 장면으로 기억 속에 남아있다.

이곳에서 중학교 2 학년 봄 학기 마칠 때까지 살았다(다시 시내로 이사한 후에도 이곳에서 다니던 교회를 대학교 2 학년 때까지 다녔다. 그 교회는 나의 모교회가 되었다). 초등학교를 마치고 중학교에 다니기 시작하면서는 버스를 타고 시내로 다녀야만 했다. 내가 살던 지역에는 중학교가 없었기 때문이다. 버스는 한 시간에 한 대 정도가 다녔는데 그것도 제시간에 오지 않을 때가 많아 버스 시간 맞추는 것이 정말 어려웠다. 그러다 보니 등하교 시간에는 늦지 않게 다니려는 학생들로 버스가 늘 꽉 찼다. 옛날에는 버스 사정이 다 그랬나……. 그렇다 해도 정말 사람을 미어지도록 태우고 다녔다.

토요일 같이 중고등학교의 수업 끝나는 시간이 비슷한 날에 집에 가는 버스를 타기 위해서는 마음을 단단히 먹어야 했다. 버스 종점이 내가 다니던 중학교에서 걸어서 30 분쯤 되는 곳에 있었다. 학창 시절 추억이 많은 동인천이 바로 그곳이다. 종점으로 걸어가서 버스를 타는 이유는 조금이라도 편한 자리를 잡기 위해서였다. 의자에 앉으면 그날은 재수가 억세게 좋은 날이다. 그런 건 어쩌다 하늘의 별 따기였고, 그저 손잡이라도 제대로 잡고 서서 갈 수 있는 자리를 차지하면 그것으로 대만족이었다. 또 다른 이유는 종점에서 버스에 너무 많은 사람이 타고나면 내가 평상시에 기다리던 정거장에서 버스가 서질 않고 가버리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었다. ! 이런 일이……. 추운 겨울에 세 시간 넘게 집에 가는 버스를 기다려본 적도 있었다(이 버스 타기에 대한 이야기들은 언제 한 번 다시 떠올려봐야겠다. 재미있을 것 같다).

버스에 타는 것을 성공하고 나면 그 다음부터는 견뎌야 한다. 발이 밟히는 건 일도 아니고, 버스가 급정거라도 하면 검은 색 교복을 입은 학생들이 우르르 한 쪽으로 쏠리기도 하고, 그러다 누구 하나 넘어지기라도 하면 도미노처럼 쓰러져 사람들 밑에 깔리기도 하고, 소리지르고, 지금 생각하니 웃음이 나온다. 또 집까지 절반쯤 되는 거리에 있는 석바위를 지나면 비포장 도로로 바뀌었다. 온 몸과 정신이 고도의 긴장 상태가 된다. 버스가 조금 빨리 달린다 싶으면 도로가 깊게 패어진 곳에서는 학생들의 머리가 버스 천정에 가 닿을 듯이 튕겨진다. 그럴 때 조금 활달한 학생들은 일부러 요동이 심한 버스 뒷좌석을 차지해서는 까르르 숨 넘어가듯이 웃어대곤 했다. 나는 새침데기여서 잘 웃지도 않고 어떻게 해서든 넘어지지 않으려고 버스 의자나 천정에 달린 손잡이를 잡은 손에만 온통 정신을 집중하고 있었다. 왜 그렇게 뻣뻣하게 살았나 모르겠다.

어느덧 우리 가족은 다시 시내로 이사 나왔고 나는 중학교 3학년이 되었다. 학년 초였던 것 같다. 1,2 학년 때 같은 반을 해보지 않았던 친구들 가운데 한 명이 다가왔다. 한 번도 말을 주고 받은 적이 없는 낯선 친구였다.

너 나 기억하니?”

나는 분명 말도 없이 고개만 저었을 것이다. 처음 보는 친구였다.

나 도림동 살아.”

그래도 기억이 안 났다. 도림동은 집에 가는 길에 20 분 전쯤 있는 동네였다.

버스에서 네가 나 잡아줬잖아.”

도림동은 세 개의 버스 노선이 지나는 곳이어서 같은 번호의 버스만 타는 나와 마주칠 확률이 적었다. 버스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그 친구는 순박한 얼굴로 짧은 설명을 덧붙였다.

여느 날처럼 사람이 많은 버스를 타고 가고 있었는데 버스가 심하게 흔들렸고, 그 친구가 넘어질 뻔 한 것을 내가 잡아주어 괜찮았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한 반이 되어 반갑다, 며 두 눈이 안 보이게 온 얼굴로 웃었다. 나는 어떤 표정으로 친구와 마주보고 있었을까? 그 친구는 내가 다니던 교회 옆에 있는 성당에 다니고 있었다. 친구의 집에서 그 성당을 가려면 내가 타고 다니는 버스를 타야 했기 때문에 아주 가끔 버스에서도 만났고, 중학교 마지막 학년 동안 친하게 지냈다.

 

이것은 다른 이야기이다.

이번에 한국에 갔을 때(또 한국!) 다니던 교회에서 주일 예배를 한 번 드렸다. 부모님이 그 교회에 다니고 계시니 엄마네 집에 머무르는 동안 인사를 가는 것이 마땅했고, 지난 담임 목사였던 남편에게 설교할 기회를 주셔서 감사한 마음으로 예배에 함께 했다.

예배 시작하기 전 교인들과 어느 정도 인사를 나누고 자리를 잡아 앉았다. 그러자 뒤에 앉아계신 어르신 한 분이 등을 톡톡 건드렸다. 돌아보니 아주 낯설지는 않은데 이 교회에서는 처음 뵙는 분이었다. 무슨 일이신가요, 하는 얼굴로 쳐다보았다.

장날 오 천원(미화 오 달러 정도)이 없어가지고 그러니까 사모님이 빌려줄까요 했던 사람이에요.”

예배가 시작되려는 때이기도 해서 뭐라 답변을 제대로 못하고 다시 뒤돌아 앉았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살짝 궁금했으나 예배에 집중하기로 했다.

예배가 끝나고 1층 친교실에서 점심도 다 먹고 권사님들께 인사하고 일어나야겠다 싶어 권사님들 앉아계신 테이블로 옮겨가 앉았다. 어려운 교회 시절을 함께 겪었던 애잔한 마음이 남아있는 분들이다. 말로는 마음 속을 다 표현 못해도 나를 바라보는그들의 눈가에는 지난 날 함께 겪었던 신앙 여정이 어려 있었다. 나도 눈빛으로 답해드렸다.

마침 엄마가 옆에 와서 앉았고 예배 전에 뵈었던 어르신을 소개해 주셨다. S 권사님이라고 했다. 엄마는 이미 들은 바가 있는지 S 권사님과 나의 일화를 다시 설명해주었다. 어느 장날 S 권사님이 물건을 사고 계산을 하려고 지갑을 열었는데 있는 줄 알았던 돈이 없었단다. 당황해 하고 있는데 옆에 있던 왠 여인네가 오 천원 빌려드릴까요, 했다고 한다.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 돈을 빌려준다고 하니 괜찮다고 하고는 지갑을 다시 뒤적거리셨나 보다. 어찌된 일인지 지갑 옆면에 납작하게 붙어있던 돈이 나타나 물건 값을 치르셨고, 나중에 알고 보니 돈을 빌려주겠다던 낯선 여인이 이 교회 목사의 아내였고 그이가 나였더라는 얘기였다. 다른 교회에 다니셨는데 어찌어찌 이 교회로 나오신 지 꽤 되신 것 같았다. 엄마 말에 의하면 그 권사님네는 부자란다.

 

얘기가 길었지만 아주 작은 일들이었다. 넘어지려는 옆 사람을 잡아주었을 뿐이고, 당황하여 쩔쩔매는 할머니에게 적은 돈(조금만 더 큰 액수였으면 모른 채 했을 것이다)을 내어드리려던 것뿐인데, 그것을 기억해주니 오히려 고마웠다. 그리고 그들에 의해서 다시 들려진 이야기는 내 삶 어딘가에도 살포시 잘 저장해 두었다. 이런 착한 짓은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기분 좋은 연결 고리가 되기 때문이다.

내 인생이 평생을 두고 짜여지는 태피스트리(Tapestry)라면, 그 날줄이 신의 양 손에 붙들려있고 말과 행동과 생각 같은 것은 씨줄이 되어 나만의 무늬를 만들어가는 것 같다. 그리고 친구와 S 권사님의 이야기는 색실로 쪼끄만 꽃무늬 하나 만들어 넣은 느낌이다.

9/11/2013

놀라셨죠? 저도 제가 이렇게 될 줄 몰랐어요


 
      미국에 오기 전 신앙생활 했던 교회의 젊은 집사들과 만나기로 했다.  그 자리에 시내로 이사간 M 집사도 오기로 되어 있었다. M 집사는 다른 집사들과 같이 쭉 같은 교회를 다니다가 우리 가족이 미국으로 오는 시기와 거의 비슷하게 시내로 이사를 했고 교회도 옮길 예정이었다. 그 뒤로 그 집사네가 어찌 지내는지 들은 바가 없었다.

M 집사는 주관이 강하고 모든 일에 앞뒤가 분명한 걸 좋아하는 성격으로 알고 있다. 세상 돌아가는 사정에 대해서도 넓은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청년 시절 출판과 관련된 일을 했고 그러다 같은 일을 하는 남편과 만난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M 집사의 집을 방문해보면 출판 일을 하는 부부답게 집안 곳곳에 많은 책들이 보기 좋게 정리되어 있었다. 또한 찻잔을 비롯해 사용하는 그릇들이 전통 도자기여서 분위기 좋은 북(book) 카페 같은 집이었다.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주일 예배에 M 집사가 보이지 않아 주일이 지나고 안부 전화를 했던 것 같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은 아닌지 물었을 것이다. 내가 했던 말은 하나도 생각이 나질 않고 M 집사가 했던 한 마디 말만 또렷이 남았다.

주일에 교회 가는 것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 앞으론 이런 일로 전화 안 하셔도 돼요.”

좀 당황스럽고 서운했다. 같은 교회에 다니는 사람한테 관심도 갖지 말라는 것인지, 우리가 주일 예배를 핑계 삼아 안부 전화할 만큼의 사이도 아니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일반적인 교회에 대해서 늘 비판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는 줄은 알고 있었으나 그런 주제를 얘기 나눌 수 있을 만한 관계는 되었다. 하지만 신앙생활에 대한 생각의 차이는 좀처럼 좁혀지지 않았다.

이런 M 집사에 대한 나의 기억으로 이 집사의 됨됨이를 오해하면 안 된다. 말은 까칠하게 해도 예의에서 한 치의 어긋남이 없는 사람이다. 겉으론 당차 보이나 마음은 한없이 여리고 눈물도 많은 사람이다. 뒤집어 말하면 마음이 연약한 사람인지라 행동은 더욱 야무지게 하려 했는지도 모르겠다.

이번 여행 때 들은 바로는 M 집사는 이사 가고 나서 다른 집사들과도 거의 연락하지 않았다고 한다. 가끔 E 집사한테만 전화하곤 했단다. 어느 날 M 집사는 꿈에서 우리 부부를 보았다며 E 집사에게 전화를 했고, E 집사는 조금 있으면 우리 가족이 한국을 방문할 거라고 말해주었다고 한다. 우리는 7 년을 아는 사이로 지내다가 나는 미국으로, M 집사는 시내로 이사를 했고 거기서 또 5 년 반의 시간이 흘러, 다시 만날 만한 접촉점이 거의 없다고 생각했는데 다른 집사들과의 모임에서 만나게 된 것이다. 별로 대수로운 사람도 아닌 나를 만나러 와준다면 그저 반갑고 고마울 뿐이었다.

약속한 날 저녁을 먹으며, 한 교회를 꾸준히 섬기는 귀한 집사들과 함께 직장 여성이 겪는 생동감 있는 그들의 얘기를 나누었다. M 집사는 갑자기 장염에 걸려 병원 신세를 지는 바람에 만나지 못했다.

한국에 머무를 수 있는 시간이 점점 짧아지고 있었고 M 집사를 만나고 돌아가야 할 것 같았다. 새로운 사업도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었다는데 방문하여 기도도 하고 싶었다. 그를 위해 기도해주고 싶으면 조용히 어디서든 기도하면 될 것을, 이런 뜬금없는 마음은 뭔 지 모르겠다. 전화를 걸었다. 몸은 회복되었고 자기도 날 꼭 만나고 싶다고 했다. 그의 일터에서 만나기로 했다.

M 집사가 자기 사업체를 시작하는 것이니 마음 같아서는 성구가 담긴 액자라도 선물 하면 어떨까 싶었다. 생각해보다가 그만 두었다. 성구를 자기 사무실에 걸어두는 것을 좋아할지 싫어할지도 모르겠고(좋아하지 않을 것이라는 쪽으로 마음이 기울어 있었나 보다) 그가 다니는 교회에서 이미 그런 종류의 선물을 했을지도 모른다는 이유를 갖다 붙였기 때문이다. 대신 부담스럽지 않은 비타민 음료수를 한 박스 마련했다.

그가 불러준 주소대로 GPS에 입력을 하고 길을 나섰다. 처음 가보는 길이나 낯선 장소가 주는 묘한 감정이 있다. 익숙한 것을 벗어난 탈출, 해방감, 자유로움 같은 짜릿한 감정이라고나 할까. 하긴 그래서 사람들은 여행을 하는 것이겠지. 다만 나는 요즘 소심해서 그런지 이런 경험을 스스로 찾아나서는 경우가 거의 없고 꼭 해야만 하는 어떤 일을 하다가 이런 소소한 즐거움을 맛본다. M 집사의 일터가 있는 곳도 한국에서 살던 곳에서 가까운 곳이고 지나갔을 법한 길인데 전혀 새롭기만 했다. 그가 시작한 황토가게는 길가에서 눈에 확 띄는 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가게 앞의 교통량도 생각보다 많았다. 느낌이 괜찮았다.

가게 안으로 들어서자 황토 부대가 가득 쌓여 있었고 M 집사는 사무실에서 동행한 강산이와 나를 발견하고는 반가워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우리는 가볍게 인사를 나누고 M 집사가 안내하는 곳으로 점심을 먹으로 갔다. 그의 가게에서 멀지 않은 곳이었는데 염하강이 내려다보이는 레스토랑이었다. 우리는 음식을 주문해 놓고는 이야기 속에 빠졌다.

      M 집사가 오랫동안 다니던 직장에서 어려움을 겪었는데 돌아보니 지금 일터를 주시기 위한 하나님의 은혜였다는 이야기, 일 년 전 지인의 소개로 지금 다니는 교회를 찾아가게 된 이야기, 거기서 신앙 생활의 기쁨을 맛보고 있으며 성서통독을 벌써 네 번째(일 년 동안, 와우!) 시작하려고 하며 읽을 때마다 새로운 말씀을 발견한다는 이야기, 수요예배에도 나간 다는 이야기, 목사와 신앙 리더들의 인도를 잘 따르려고 한다는 이야기……. 그리고 우리 부부와 함께 교회 다니던 때 우리에게 잘 하지 못한 미안함이 있노라 했다. 이 모든 이야기를 전화로는 할 수 없을 것 같아 직접 만나서 들려주고 싶었다고 했다.

놀라셨죠? 저도 제가 이렇게 될 줄 몰랐어요.”

정말 기대하지 않았던 얘기들이었다. 말끝마다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하는 그를 보고 있는 순간순간이 마치 기적이 눈 앞에 벌어지고 있는 것 같았다. 황토가게를 곧 방문하겠다는 어느 손님의 전화는 기적을 맛보는 점심 시간이 끝났음을 알려주었다.

가게로 돌아와 M 집사는 부부 손님을 맞아 사무실로 들어갔다. 나와 강산이는 사무실 밖에서 기다리겠노라 했다. 그냥 돌아서 오기에는 뭔가 해야 할 것이 남아 있다는 판단에서였다. 손님들이 황토에 대해서 궁금한 것을 물으면 그는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거침없이 상세한 답변을 해주는 것이 들렸다. 황토와 관련된 일을 오래 해본 사람답구나 싶었다. 밖에서 남의 말 엿듣고 있는 것이 살짝 지루해지려고 하는데 손님들이 밖으로 나오고 있었다. 그는 마지막으로 가게 홍보까지 깔끔하게 일을 마친 사장님 모습이었다.

사무실에 들어가보니 내가 사온 비타민 음료수가 손님을 대접하는데 쓰인 것이 보였다. 그 음료수가 이 사무실에 오늘 필요한 물품이었다는 것이 기뻤다. M 집사는 출판업을 하는 남편이 만든 책을 여러 권 챙겨와 선물로 주었다. M 집사에게서 참으로 선물을 많이 받았다. 점심과 책, 그리고 무엇보다도 하나님 은혜에 푹 빠져 있는 M 집사 그 자체 말이다. 고마웠다.
 
       헤어지는 인사를 나누고, 함께 기도하고 싶다고 했다. 그리스도의 사랑의 향기가 찾아오는 모든 손님에게 전해지는 일터가 되게 해달라고 기도 드렸다. 그리고 돌아오는 차 안에서 다 나누지 못한 이야기 속에 들어 있을 기도가 필요한 영역에, 그리고 M 집사의 온 삶에 주님의 평안이 함께 하시길 빌었다.

9/07/2013

사은품 같은 인생만 되어도


 
한국 여행을 마치고 미국으로 돌아올 때 공항 면세점에서 한국 화장품 몇 가지를 샀다. 요즘 많은 한국 여성들이 얼굴 피부가 촉촉해 보이기 위해 사용한다는 미스트 제품과 쿠션이라는 단어가 들어간 메이크업 제품이다. 사용해보진 않았지만 믿음이 가는 제품들이라 구입한 것만으로도 얼마나 마음이 뿌듯하던지……. 함께 있는 아이들은 화장품에 관심도 없을 텐데 나 혼자만 기분이 살짝 들떴다.  그리고 나서 우리가 탈 비행기가 있는 게이트를 찾아 가는데 면세점에서 산 물건값의 합계가 얼마 이상이면 사은품을 받을 수 있다며 예쁜 여성 두 명이 안내를 해 주었다. 게다가 사은품까지!

그 이름을 뭐라고 하는지 모르겠는데, 판에 핀들이 여기 저기 꽂혀 있어서 위에서 공을 굴려 넣으면 핀 사이를 요리조리 빠져 나와 번호가 적힌 구멍으로 공이 들어가는 놀이판이 그들 앞에 있었다. 먼저 온 사람이 하는 것을 보아하니 공만 굴려 넣으면 되고 주는 사은품을 받아가면 그뿐이었다. 앞사람은 물 티슈가 당첨 됐다. 안내원이 같이 좋아하는 표정으로 말했다.
 
“쓸 데가 많은 물 티슈네요.”

물 티슈, 그거 괜찮은데, 생각하며 영수증을 보여주니 공 한 개를 내주었다. 소비한 금액이 클수록 공을 여러 개 주는 모양이었다. 강산이에게 놀이판 구멍에 공을 넣을 수 있는 기회를 양보(!)했다. 데굴데굴, 툭툭 공은 굴러 떨어졌다. 안내원은 무표정한 얼굴로 바라보다가 고무 재질로 만들어진 팔찌 하나를 집어 쑥 내밀었다. 얼핏 보니 팔찌 위에 그려진 비행기, 화장실, 환전소 따위를 나타내는 듯한 아이콘들이 보였다. 내 껀 아니다 싶어 강산이 손목을 잡아 끌어 안내원에게 내주었다. 우리 표정이 심드렁해 보였는지 안내원은 팔찌를 아이 손목에 끼워주고는 간단히 설명을 해 주었다.
 
“이렇게 손가락으로 아이콘을 가리키며 승무원에게 보여주시면 됩니다.”

설명을 듣고 나니 더 재미가 없었다. 공항이나 비행기를 이용할 때 도움이 필요하면 팔찌를 내밀고 요구사항을 말없이 바보처럼 손가락으로 가리키라는 말이었다. 이런걸 사람들이 받기 원할까? 우리 나라 비행기를 타는데 이게 왜 필요하지? 우리 한국말 다 잘하는데……. 이거 괜히 했다, 에 생각이 이르고 있는데 강산이가 내 가방을 더듬거리고 있었다. 팔찌를 빼서 넣을 곳을 찾는 것이었다. 그래, 너도 별로구나.

비행기가 인천공항을 출발해서 시간이 얼마큼 흘렀는지 강산이는 좌석 밑에 내려놓은 내 가방을 뒤적거렸다. 뭘 찾느냐고 했더니 이 녀석이 말은 안 하고 손가락으로 자기 손목을 동글게 말아 쥐는 것이었다. 내 가방에서 그런 몸짓과 관련된 것을 찾고 있었다면 공항에서 담아놓은 팔찌를 찾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심심한가 싶어 내주었다. 강산이는 팔찌를 손목에 끼워 넣더니 아이콘 하나를 가리켰다. 여성과 남성이 그려져 있는 표시, 화장실 표시였다.
 
“그래서 뭐?”
“형, 화장실 가고 싶다는 거 같은데.”

기가 막힌다. 말로 하면 될 것을 굳이 팔찌를 찾아 끼고 그 짓을 한다. 강산이가 사은품 주던 안내원의 설명을 제대로 알아들은 것이었다. 참 재미있는 것은 그때 마침 승무원이 강산이의 어줍잖은 행동을 보아주려는 듯 우리 좌석 가까이로 오고 있었다. 나는 그 승무원이 빠른 걸음으로 우리 좌석에서 멀어져 가길 바랐다. 하지만 강산이는 잽싸게 일어서더니(지가 하고 싶어서 하는 일에는 이렇다) 좌석들 사이에 있는 복도로 나가 승무원을 막아 섰다. 제발, 강산아~그냥 비켜서 가. 강산이는 해맑게 웃으며 승무원에게 팔찌를 내보이며 손가락으로 무엇인가를 가리켰다. 둘째 아들의 말에 의하면, 승무원은 바로 뒤에 있는 화장실이 사용중인 것을 확인하고 비행기 제일 뒤쪽에 있는 화장실을 강산이에게 알려주었다고 한다. 그리고 화장실을 다녀왔다. 강산이는 사은품 팔찌를 제대로 사용한 것이다..

우리가 받은 팔찌는 어쩌다 한 번 일지라도 쓸 데가 있는 사은품이었다. 없어도 아무 불편함은 없었겠지만 한 사람에게 비행시간 동안의 지루함을 아주 아주 잠깐씩 달래주었다. 강산이는 승무원이 있던 없던 그 팔지를 끼고 화장실을 서너 번 다녀왔으니 말이다. 혹시 자신의 모국어나 학습을 통해 배운 언어를 사용할 수 없는 곳으로 여행을 가는 사람에게 혹시 이런 팔찌가 필요할지도 모르겠다. 꼭 필요하거나 값진 것은 아니지만 있으면 나름 쓸모가 있는 것이 사은품인가 보다.

사은품에 대한 생각을 하다가 목회자의 아내를 두고 1+1(buy 1 get 1) 이라고 한다는 얘기가 문득 떠올랐다. 1+1은 물건 하나를 사면 똑 같은 또는 동등한 값어치의 것을 하나 더 주는 판매 방법이다. 1+1이라고 해도 판매자는 어떤 식으로든 받을 가격을 다 받을 것이라는 뚱딴지 같은 소견을 가지고 있다 해도 소비자에게 1+1 상품은 매력적이다. 하나를 살 수 있는 가격에 두 개를 얻게 되니 말이다. 그러니까 목사가 목회를 할 때 자신의 일을 따로 갖고 있지 않은 그의 아내는 남편 목사에게 거저 딸려온 덤이라는 것이다. 목사의 아내는 그들이 부부로 살아가는 한 다른 교회로 옮겨갈 위험이 없는 고정된 봉사자라는 의미일 것이다.

하지만 누가 목회자의 아내를 덤으로 생각한단 말인가, 교인들이? 아내 자신이?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교인이라면 나는 그를 안타까이 여기며 자신과 이웃의 삶을 좀 더 사랑스런 눈길로 살펴봐주길 바랄 것이다. 한편 목회자의 아내가 자신의 삶을 남편 목사에 얹혀진 동등한 가치를 가진 덤으로 생각한다면, 그리고 그렇게 사는 것이 행복하다면 거기엔 덧붙일 말이 없다. 그것도 하나의 아름다운 인생이 분명하므로.

사실 이 글을 쓰다가 공항에서 받은 팔찌를 사진으로 찍고 싶어서 찾아봤는데 어디에 두었는지 도무지 기억이 나질 않아 답답했다. 관심도 없다가 필요하다는 마음이 생기니 팔찌가 어서 눈앞에 뿅 하고 나타났으면 했다. 식구들의 증언을 토대로 자질구레한 것을 모아놓은 서랍과 바구니들을 이틀 동안 뒤졌건만 보이지 않았다. 찾아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사라지지를 않았다. 화장실에서 볼 일을 보고 생각 없이 세면대 아래 서랍을 잡아당겼다. 그곳에는 머리 말리는 드라이어가 들어있어서 매일 열어보는 서랍이다. 드라이어를 쓸 것도 아닌데 정말 그냥 서랍을 앞으로 쭉 끌어냈다. 그제도 어제도 안 보이던 팔찌가 거기 있었다(이럴 때 “감사”가 절로 나오기도 한다. 이게 뭐라고). 하찮은 것일지라도 필요할 때 어디에 두었는지 도무지 기억이 나질 않아 며칠을 두고 헤매다가 찾아낸 경험이 있는 사람은 이 흐뭇함을 알 것이다.

사은품이든 +1에 해당하는 상품이든 필요가 있어서 만들어졌을 것이다. 하물며 천하보다 귀한 생명을 가진 인생이며 꼭 필요한 곳에 쓰이도록 최고의 전문가가 철저한 계획 가운데 만든 인생인데,  +1 같은 인생이면 어떤가. 난 본 상품과 동등한 가치를 가지지도 않았고 받는 사람에게 꼭 필요할지 어떨지도 모르는 사은품 같은 인생만 돼도 좋겠다.

9/02/2013

전설이 될 만한 음식들


평범한 듯 보이지만 날씨가 무더워지면 어김없이 생각나는 J 권사님이 만들어주시는 냉면과 오징어 튀김입니다. 두어 주 전 어느 집사님이 올 여름에는 냉면 안 해주냐는 귀여운 투정에 권사님은 흔쾌히 해주지, ! 하셨습니다. 성가대를 위한 회식이면서 교우들 누구나 함께 참석할 수 있는 자리였습니다. 권사님은 재료를 준비하시고, 냉면 육수를 내고, 고명으로 얹을 무와 오이를 무치시고, 오징어는 초벌 튀김을 해 오셨습니다. 30여 명이 먹고도 남을 양이니 여러 날 준비하셨을 것입니다. 주일 오후에 교우들이 모여 냉면을 삶아 고명을 얹어 내고, 이미 한 번 튀겨진 오징어를 다시 한 번 튀겨서 더욱 바삭바삭한 튀김이 되었습니다. 오징어를 살짝 데쳐서 튀기면 생오징어를 튀길 때보다 기름이 덜 튄다는 요리 팁도 얻었습니다. 냉면을 안 드시는 몇몇 교우들은 핫도그를 준비해서 나눠 드셨습니다. 하지만 오징어 튀김은 누구나 좋아해서 튀기기가 무섭게 게눈 감추듯 입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자칫 지루해질 수 있는 여름 끝자락, 한가한 주일 오후에 열린 조촐한 잔치 자리였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역의 한인들 사이에서는 권사님의 냉면이 맛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다 안다고 교우들이 이구동성으로 알려주었습니다. 이곳은 미국 동남부에 위치하고 있어서 여름이 길고 무덥습니다. 그렇다 보니 여름이 되면 권사님만이 낼 수 있는 맛을 가진 시원한 냉면이 생각나고 언제 한 번 먹어보려나 기대가 생기나 봅니다. 권사님을 만나고 나서 여름마다 그 냉면을 대접받았습니다. 이대로라면 여름을 지내면서 권사님의 냉면을 먹지 않고 지나가면 여름이 왔는지 갔는지 알 수가 없다는 전설이 생기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번에 먹은 냉면은 무더웠던 여름을 마무리 하고 새로운 계절을 건강하게 맞이하는 늦여름 특별식이었습니다.

여름이 시작될 무렵에는 경기도 이천에 사는 친구, 부부가 만들어준 푸짐한 수육과 삼계탕, 밭에서 막 뜯어온 온갖 쌈 채소들이 기억납니다. 이 부부의 맛나고 몸에 좋은 음식을 먹기 위해, 그리고 멀리서 찾아온 우리 가족도 만날 수 있다는 이유를 살짝 보태어 이천 가까운 곳을 비롯하여 서울, 인천, 용인, 평창, 금산에서 친구들이 모였습니다. 친구의 남편은 고기를 부드럽고 담백하게 삶아, 솥에서 바로 꺼낸 따뜻한 수육을 친구들이 식사하는 내내 고기 접시가 비지 않도록 채워놓았습니다. 김치 그릇도 바쁘긴 마찬가지였습니다. 김치는 그의 아내 솜씨입니다. 요리를 해서 여러 사람들과 나누는 이 부부의 넉넉함과 그들만의 비법으로 만들어낸 건강한 음식에 대한 칭찬이 밥상을 더욱 가득 차게 했습니다. 그 부부나 그 자리에 함께 했던 지인들이나 오랜만에 만났어도 삼십여 년에 가까운 인연들이다 보니 늘 봐왔던 사람들마냥 편안하고 유쾌한 자리였습니다.

이천 친구 가족과는 도시에서도 가능한 신앙공동체를 만들어보자며 공동목회를 했었습니다. 서울에서 삼 년 동안의 그 실험적인 시간들은 엉성하기도 하고 엄청 가난하기도 했고 공동체가 쉽지 않다는(쉬울 거라고 생각한 적도 없지만요) 뜨거운 맛도 보았습니다. 또 한편으로는 신앙이나 시대를 바라보는 시각에 공통분모가 많아 공동육아를 지속할 수 있었고, 리더십에 대한 고민과 탐구를 하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고, 무엇보다 소중한 친구들과 가까이 살 수 있어서 행복한 시간이었습니다. 공동목회 하는 동안 그 부부 집에서 삼겹살을 참 많이도 구워 먹었습니다. 그 집에서 먹으면 왜 그렇게 더 맛이 있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삼겹살을 고르는 안목과 양념장에 뭔 비법이 있었던 걸까요? 그때도 그랬지만 지금도 그 부부의 음식은 친구들 사이에서 맛있기로 알아줍니다. 그 부부는 워낙 음식 솜씨가 좋은데다가 사람들이 편안하고 좋다 보니 음식에 그 모든 것이 담겨 감동적인 맛이 나오나 봅니다.



   음식을 만들어준 사람들과 만들어진 음식에게 고마운 마음입니다. 전설이 될 만한 음식들을 여름의 첫머리와 끝자락에서 맛보다니 입이 호강한 시간들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