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8/2013

멋진 힘 조절


아틀란타한인교회 마당에서.


동남부 한인연합감리교회 목회자 가족 수련회에 갔었다. 2 3일을 미국에서 고향 같은 애틀랜타에서 보내면서 반가운 사람들도 많이 만나고 새로 얼굴을 익히게 된 사람들도 있었다.

수련회 둘째 날, 한인연합감리교회(아래 연감)와 기독교대한감리회(아래 기감) 목회자들의 친선 경기가 아틀란타 한인교회에서 열렸다. 경기 종목은 탁구, 족구와 배구였다. 목회자 아내들은 경기가 열리는 동안 각자 자유롭게 시간을 사용하도록 허용되었다. 덕분에 아틀란타 한인교회 근처에 있는 한인 마트를 어슬렁대다 돌아왔더니 탁구와 족구 경기는 끝나 있었다. 경기 결과는 연감과 기감이 1:1 상황이었다. 마지막 종목인 배구 시합은 딱히 할 일도 없고 해서 구경하기로 맘 먹고 자리를 잡고 앉았다. 친선 경기이니 누가 이겨도 좋겠으나 남편이 연감 쪽 선수로 뛰게 되었으니 당연히 연감을 응원했다.

9명의 선수가 참여하는 9인제 배구가 시작되었다. 배구공이 날아가고 튕겨지는 곳으로 눈길이 바쁘게 따라다녔다. 목사님들이 재주가 많으신지 배구도 잘 하셨다. 그 자리에서 만들어진 팀이니 팀 플레이 보다는 각자가 열심히 경기하는 모습이었고, 그 중에서 좀 더 기술적으로 잘 하시는 분들도 계셨다. 빠르고 힘차게 날아온 공을 가볍게 받아서 공격할 수 있도록 기회를 만들어, 때론 힘차게 내리꽂거나 때론 살짝 네트를 넘겨 점수를 획득할 때마다 구경꾼들은 환호와 박수로 선수들을 응원했다. 엉뚱한 방향으로 날아간 공을 살려낼 때도, 갑자기 자기 앞으로 날아오는 공을 민첩하게 받아낼 때도 선수들은 박수를 받았다. 선수들은 땀을 뻘뻘 흘리면서 3 세트 경기를 했고, 연감이 이겼다. 올해 수련회 친선경기에서는 전체적으로 연감이 이기게 되었다.

구경꾼들은 박수로 선수들을 격려하고 선수들은 물을 마시며 흩어지려고 하는데, 어느 목사님께서 40, 50대 나눠서 경기해 보자고 제안하셨다. 이 제안은 연감과 기감 목회자들이 섞여서 경기하자는 말씀의 다른 표현이었던 것 같다. 경기가 재미있게 진행되었다. 연령대가 높으신 목사님들은 배구 기술이나 경기에 임하는 열정이 젊은 세대에 뒤지지 않으셨다. 하지만 힘은 좀 부치시는지 시간이 지날수록 공이 네트를 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옆에서 50대 목사님 편을 응원하시던 사모님 한 분이 경기를 하고 있는 젊은 목사님께 애교 섞인 항의를 하셨다.

살살 좀 하셔~”
이건 경기에요. 경기는 이기려고 하는 거에요.”

젊은 목사님께서 짐짓 진지하게 대꾸하시는 모양에 웃음이 나왔다. 그리고 몇 마디 더 말씀을 나누시는 것 같았는데 다 들리지는 않았다. 그러다 젊은 목사님이 하시는 말씀이 귀에 쏙 들어왔다.

힘 조절 하는 것도 능력이에요.”
맥락 없이 들린 말이긴 한데 이 말이 자꾸 되뇌어졌다.

공을 잘 받아내는 상대 선수를 향해서는 강한 스파이크로 공격하고, 연세 많으신 선수를 향해서는 퉁퉁 튕겨 공중에 띄워 힘 빠진 공을 넘겨주기도 하고, 공을 서비스 할 때도 점수를 내기 위해 잘 받아내지 못하는 선수 쪽으로 스리슬쩍 보내기도 하고…… 이런 걸 두고 힘 조절 잘 한다고 하는 것이리라.

내 눈에는 배구 경기를 하고 있는 양팀 선수 열 여덟 명 모두 힘 조절하는 능력은 다르지만 힘을 다해 경기를 하고 있었다. 심판은 어느 팀이 이겼는지 정확한 판가름을 하려고 힘을 다하고 있었다. 환호하는 구경꾼들은 경기에 집중하면서 선수들을 응원하는데 힘을 쏟고 있었다.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며 주변을 맴도는 구경꾼들도 저마다의 이유에 힘을 쓰고 있었다. 운동신경이 둔하고, 융통성이 없고, 순발력이 떨어져서 상대적으로 무기력해 보이고 존재감 없는 나라는 사람은 구경꾼으로 앉아 이런 저런 생각을 하는 데다가 힘을 싣고 있었다.

이 장면에서 쓸데없는 군더더기 힘은 아무 것도 없었다.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자기가 가진 힘을 자신의 선택과 결정에 의해 어딘가에 사용하고 있었고, 적어도 그 시간은 각양 각색의 힘들이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멋지다!

2013년 세밑이다. 다가오는 새로운 해에는 어디에 힘을 쏟아야 할까…… 

12/19/2013

믿고 기다리는 연습




몇 주 전 아침이었다. 뒤뜰이 내다보이는 창문의 블라인드를 여는데 이상한 조각들이 눈에 띄었다. 뭐지?, 하며 얼굴을 창문 가까이에 대고 좌우로 살펴보았다. 이런! 옆집 J 아주머니네 울타리 일부분이 부서져 있었다. 그 울타리는 왕복 2 차선 도로 쪽에 쳐진 것으로 우리 동네를 둘러싸고 있다. 울타리가 하나로 쭉 연결되어 있으나 집집마다 자기 땅에 해당하는 부분의 울타리를 각각 소유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 집이 있는 쪽은 동네를 둘러싼 울타리만 있을 뿐, 집과 집 사이 경계되는 곳에 울타리를 치지 않고 산다. 그래서 뒤뜰에 나가면 옆집 뒤뜰과 다 연결되어 있어 엄청 넓어 보인다. 그래도 남의 집 뒤뜰로 걸어 들어가는 경우는 거의 없다.

J 아주머니네 울타리가 부서져 크고 작은 나무 조각들이 우리 뒤뜰에까지 날라온 것이다. 그리 굵지 않아도 제법 잎이 많이 달리던 나무 하나도 부러졌다. 길가 쪽에 서 있는 전봇대 보호판도 부서져 이리저리 흩어져 있었다. 울타리와 나무, 그리고 전봇대 보호판까지 상한 걸 보면 바람에 넘어진 것 같지는 않다. 이곳에 그리 오래 산 것은 아니나 그렇게 심한 바람이 부는 걸 아직 보지 못했다. 남편은 밖에 나갔다 오더니 자동차가 들이받은 것 같다고 했다.

옆집 J 아주머니는 홀로 사시는데 몸이 많이 아프시다. 이웃이 되어 처음 만났을 때 지팡이를 많이 의지하고 계셨고 말소리에도 힘이 없으셨다. 그런데 요즘에는 몸이 더 안 좋아지셨는지 간호보조사들이 돌아가면서 거의 24 시간 아주머니를 돌보고 있다. 병원도 자주 가시는 듯 하다. 그런데 집 울타리까지 말썽이다. 아주머니가 많이 속상하실 것 같았다. 경찰이나 보험회사 직원들도 만나야 할 테고…… 아니면 아프신 분이니 누군가 돕는 사람이 있을 지도 모르겠다.

한국 생활이 몸에 베인 내가 느끼기에 미국 사람들은 일을 서둘러 하지 않는 것 같다. 일을 처리 하는 기간이 명시된 것은 그 시간을 잘 지키는 편이다. 별 거 아닌 일로 판단하고 일찍 일이 해결될 거라고 기대했다가는 속만 태우기 십상이다. 정해진 시간을 다 채운 후에야 일이 마무리되는 것을 종종 경험하게 된다. 한편, 일 처리 기간이 딱히 정해져 있지 않는 경우는 그 결과가 언제 나올지 잊어버리고 있어야 한다.

지난 여름, 한국을 방문하고 있을 때 여기는 비가 많이 왔다고 한다. 한국에서 돌아온 후에도 꽤 굵은 비가 심심치 않게 내렸다. 그러다 보니 뒤뜰 한 쪽에 빗물이 땅 속으로 미처 빠지지 못해 웅덩이가 길게 생겼다. 웬만하면 하루 정도 지나서 물이 빠지고 잔디가 원래대로 회복이 된다. 그런데 올 여름에는 비가 연이어 내린 탓인지 배수에 문제가 생긴 것이다. 이 물웅덩이가 생기는 것을 알고 있는 친절한 A 아주머니는 동네 관리하는 업체에서 사람이 오기로 했다고 전해주셨다(A 아주머니는 동네 일을 보고 계신 듯하다). A 아주머니에게 그 얘기를 듣고 비가 몇 번이 더 왔는데 관리 업체 사람들을 만나지 못했다. 물웅덩이는 점점 커졌고 며칠을 지켜보아도 물이 빠지지 않았다. 둘째 아이도 물웅덩이가 눈에 거슬리는지 가까이 가서 살펴보고는 모기 같이 생긴 벌레들이 많다고 걱정을 했다. 나는 물웅덩이를 사진으로 찍어두고 동네 관리하는 곳에 이메일을 보냈다. 상황을 간단하게 설명하고 우리 집을 방문하게 되면 연락 달라고 했다.

여름이 서서히 물러가면서 비는 자주 내리지 않았고 물웅덩이도 점차 줄어들어 흔적이 없어지도록 그것을 살피러 오는 사람은 없었다. 홍수가 난 것도 아니고, 비록 오랜 시간이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고인 빗물이 사라지기는 했으니 관리 업체에 독촉하기가 어정쩡해졌다. 그리고 옆에 있는 남편은 기다려 보라, 고 하니…… 이메일을 보내놓고 물웅덩이가 그대로 있는 동안은 이메일의 받은 편지함을 확인할 때마다 약간 짜증이 났었다.

어느 날 운동하려고 집을 나서는데 웬 청년들 서넛이 우리 집을 기웃거리고 있었다. 동네 관리하는 사람들이 온 것이다. 관리회사에 이메일을 보낸 지 두 달 반이 지난 때였다. 자기네는 배수관을 살펴보러 온 사람들인데 어디에 물이 제일 많이 고이냐고 물어왔다. 이 사람들을 반갑다고 해야 될지, 어이가 없다고 해야 될지…… 어쨌든 이 문제를 해결해야 좋은 사람은 내 쪽이기에 찍어둔 사진을 얼른 보여주었다. 리더인듯한 청년은 사진이 있어서 문제가 무엇인지 얼른 알 수 있었다며 고맙다고 했다. 물웅덩이가 생기는 곳에 배수관을 새로 묻어 빗물이 동네 도로 쪽으로 빠지게 공사하겠다고 설명을 덧붙였다. 앳돼 보이는 젊은이가 상냥한 태도를 보이는 바람에 어이없던 마음은 정말 어이없게도 금세 사라졌다. 그리고 일이 이런 식으로 아주 더디게 해결될 수도 있다는 걸 다시 한번 알게 되는 순간이었다.

이런 일들을 몇 차례 경험한 바가 있는지라 J 아주머니네 울타리는 언제쯤 고쳐지려나, 는 마음으로 바라보았다. 그저 성탄절 전에 울타리가 복구되어 아주머니에게 메리 크리스마스가 되면 좋겠다는 마음도 있었다. 사고가 나고 며칠이 지나지 않아 전봇대를 교체하는 작업이 이루어졌다. 주민의 안전을 위한 일이라 그런지 많은 사람들이 와서 빠르게 일을 마무리했다. 그로부터 한 열흘쯤 지나고 나서는 넘어진 울타리와 나무를 치우고, 또 며칠이 지나 새로운 울타리가 뚝딱 생겨났다. 예상보다 일찍 울타리가 복구되어 내 기분이 다 좋았다. 아주머니의 마음도 편안해지셨을지……

삶을 정성껏, 천천히살아가고자 하며 감정의 기복이 심하지 않은 편인데 요즘은 조급증이 생긴 것 같다. 살아가는 환경이 바뀌어서 그런지 나이가 들어 호르몬이 바뀌어 그런지 모르겠다. (주로 나와 가족과 관련된 일- 이렇게 사족을 달아놓고 보니 비겁한 표현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 우주가 다 연결되어 있는 것을)이 내 맘처럼 진행되지 않으면 마음이 불편해지고 짜증이 난다. 마음이 불안하고 화를 내도 일이 해결되는데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 줄 알면서도, 부정적인 감정들을 들쑤셔 스스로를 괴롭히기도 한다. 호르몬이 바뀌어서 그런 거라면, 감정의 변화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조절할 수 있는 나만의 방법들을 찾아봐야겠다. 삶의 자리가 바뀌어서 조급증이 생겼다면, 이곳의 문화와 사람들을 신뢰하는 것이 필요할 듯 하다. 응급상황이 아니라면 믿고 기다리는 연습을 더 해야겠다. 일이 처리되는 과정을 다 알 수 없어도 해결될 거라고 믿고 기다리는 마음은 평안할 것이다

12/12/2013

엉성하고 느슨한 성탄축하예배


2012 성탄축하예배






추수감사절이 지나자마자 라디오에서는 캐럴을, 텔레비전에서는 성탄이 소재가 되는 영화나 드라마를 많이 듣고 보게 된다. 어떤 채널에서는 이런 것들을 하루 종일(!) 듣거나 볼 수도 있다. 내가 사는 미국 동남부, 특히 사우스캐롤라이나 주에서는 눈을 거의 볼 수 없고 기온이 낮아져 서리가 내리면 겨울철인가 보다 할 정도의 날씨다. 그렇다 보니 분위기 있는 카페에서 카푸치노가 담긴 컵에 손을 녹이며, 커다란 창 밖으로 내리는 함박눈 속에서 바쁘게 오고 가는 사람들을 친근한 눈길로 바라보며, 아련히 들려오는 캐럴이 성탄절기를 보내고 있으며 곧 한 해가 마무리 될 것이라는 것을 온 몸으로 느끼고 있는 모습은 영화 속에나 등장할 법하다. 같은 동부인데도 북쪽은 요즘 눈 폭풍이 휩쓸고 있고 정부가 셧다운할 정도라고 하니, 눈이 마냥 낭만적이지 않고 재해인 곳도 있어 안타깝기도 하다. 하여튼 추운 계절에 듣는 캐럴은 기분을 달뜨게 하는 그 무엇이 있다.

지난해에도 올해처럼 캐럴을 즐겨 들으며 성탄 장식이 자주 보이는 미국 영화도 가끔 찾아 보고 있었다. 그러다 어느 시골 교회에서 성탄절 연극(?)하는 장면이 눈에 띄었다. 내레이터가 성경 본문을 읽으면 교인들이 그걸 몸으로 표현했다. 말은 필요치 않았다. 아주 소박해 보이는 성탄극이었다. 하지만 극에 참여하고 있는 교인들은 저마다의 역할에 맞는 의상을 그럴듯하게 차려 입었고 소품도 아기자기 하게 여러 가지가 준비되어 있었다. 연극이라는 것이 대사를 외워야 하는 어려움이 있는데, 대사가 없는 연극이라니 우리 교회에서도 해볼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그래서 성탄을 기뻐하는 마음을 담아, 성경 말씀을 몸으로 표현해보자는 의미를 두고 진행이 되었다. 목사님은 성탄과 관련된 성경 본문을 찾아 시간의 흐름대로 나열하여 이야기를 만들었다. 셀별로 이야기를 나누어 맡았다. 영화에서처럼 대부분 내레이터가 본문을 그대로 읽어주면 셀원들은 몸으로 본문을 표현했다. 때로 이야기의 이해를 돕기 위해 아주 간단한 대사가 들어가기도 했다.

몸으로 표현하는 성탄이라는 의미를 계속 강조했으나 성탄 때마다 들어온 말씀을 그대로 읽고 표현하다보면 자칫 지루해질 수 있는 성극인데 잘 참여하시려나 아주 조금 걱정했다. 그런데 성극을 준비하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내 생각은 기우에 지나지 않음을 알게 되었다. 60 , 70 세 넘으신 분들이 맡은 역할을 잘 표현하기 위해 서로 조언해주며 하하 호호 즐겁게 극을 꾸며갔다. 96 세나 되신 할머니 권사님께서도 참여하셨다. 와우! 극중 의상도 솜씨 좋은 분들은 만들기도 하고, 언젠가 성극할 때 입었던 옷을 찾아오신 분도 있고, 이집트 여행할 때 사두었던 옷을 가지고 오신 분고 계셨다. 성극에 참여하지 않는 교인들은 대부분 찬양이나 연주 등으로 준비를 했다.

성탄주일 예배는 우리가 준비한 모든 것을 발표하는 것으로 드려졌다. 무대 의상을 입은 채로 예배를 드리다가 자기 순서가 되면 무대에 나가서 자기가 준비한 것을 보여주었다. 연습한 시간도 길지 않았고 대사도 없는 성극은 예상대로 어설펐다. 무대 위에 올라가 서로의 자리를 정하느라 우왕좌왕하기도 했다. 내레이터 맡으신 어느 집사님은 평상시에도 혼자 잘 웃으시는데, 이 날 어떤 장면에 눈길이 가셨는지 웃음을 참지 못해 그 자리에 주저앉아 버리셨다. 교인들 모두가 미소를 머금은 채 예배를 드리는 동안 성탄의 기쁨이 슬그머니 그들의 마음 문을 두드리는 듯 했다. 이 날 성탄예배는 엉성하고 느슨하면서도, 화목한 분위기로 드려졌다.

올해 성탄축하예배는 지난해와 구성은 비슷하나 성극이 대사가 많아졌다. 이번에도 주인공들은 60 대 중반 되신 권사님들이다. 지난해보다는 각자 좀 더 열심히 준비 중이신데 서로 만나서 연습하는 시간이 적은 것은 마찬가지이다. 어느 권사님은 대사를 못 외우면 극본을 보고 하면 되고, 틀리면 그게 더 재미있는 거라고 하신다. 연세 많으신 권사님들이 성탄 축하에 기꺼이 순종하는 마음으로 참여하는 모습이 보기 좋다.

성탄예배가 좀 엉성하고 느슨하면 어떤가! 그 엉성하고 느슨한 빈 틈을 따라 아기 예수님이 누워 계신 곳으로 인도할 유난히 밝고 시린 별빛이 흘러 들어오는 그림이 그려진다. 그 별빛을 따라 거친 들판을 걸어가는 목자들처럼 설레는 마음으로 한 걸음 내딛는 사람들이 여기에도 있다.   

 




12/05/2013

영혼의 불꽃을 일으킨 한 단어, 순수


즐겨 걷는 길가에 서있는 오래된 참나무(Oak)다. 
나무 이름이 참(!) 좋다.


어려서부터 교회 다니는 것을 좋아해서 주일에 교회를 거의 안 빠지고 예배에 참석했다. 교회 선생님들이 가르쳐주는 대로 잘 따라 했다. 성경 구절을 외우라면 외우고, 찬양을 예쁘게 부르라고 하면 그렇게 하려고 애썼다. 교회 선생님들은 나를 많이 귀여워해 주셨고 나는 더 열심히 선생님들의 말씀을 잘 듣고 따랐다. 어린 나에게 교회는 유익하고 즐거운 놀이터였다.

교회 선생님으로부터 성경 말씀과 그들의 신앙 태도를 여전히 배우면서, 중학교 2 학년 때부터 나도 교회학교 아이들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나의 모교회는 작은 교회가 아니어서 청년들도 많았는데 어린 나에게 성경을 가르칠 수 있는 기회를 주신 것이다. 어찌 일이 그렇게 되었는지 잘 모르겠고 그 맡겨진 일을 얼마나 잘 감당했을까, 돌아보니 의구심이 들지만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은 늘 흥분되고 도전이 되었다. 아마도 교회는 나에게 학교 선생님이 되고 싶었던 꿈을 꾸게 해준 곳이었던 것 같다.

교회 안에는 지금이나 그때나 남들에게 드러나지 않는 귀찮은 일들이 있다. 행사준비, 청소, 식사준비, 설거지, 예배 후 뒷정리…… 난 무슨 생각이었는지 집에서는 손도 까딱하지 않으면서 교회에서는 그런 일들이 마치 나의 일인 양 참 잘도 했다. 그때의 마음을 기억해보면 칭찬을 받으려고 한 것도 아니고 생색을 내려고 한 것은 더 더욱 아니었다. 그냥 남들이 잘 안 하려고 하는 일을 누군가는 해야 되는 것이고 그런 자리에 내가 있었을 뿐이었다. 개신교와 천주교, 뭐 이런 개념이 없던 어린 시절에는 난 수녀가 되어야 하나 보다 생각했던 적도 있었다. 이 밖에도 나의 모교회는 내 삶의 태도나 인격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고등학교 3 학년이 되어 가고 싶은 대학을 고르기 전까지 신학대학이라는 학교가 있는 줄 몰랐다. 난 학교 선생님이 되어서 세상 지식을 가르치면서 복음을 전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꿈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신학대학이라는 존재를 알고 나서 어떤 길이 하나님을 위해 더 잘 일할 수 있는지, 일 년 동안 밤 9 시만 되면 교회 있는 곳을 향하여(왜 이렇게 했는지 모르겠다. 더 정성스럽다고 여겼는지…… 나의 과거지만 딱히 설명할 수 없는 일들이 참 많다는 걸 알게 된다) 무릎을 끓고 하나님께 물었다. 그리고 만약 하나님께 더 헌신하길 원하시면 증거를 보여달라고 했다. 그 증거로 대입 학력고사 점수를 몇 점을 달라고 내 맘대로 정했다. 학력고사 결과가 나왔는데 점수는 기도하던 것에서 일 점도 어긋나지 않는 딱 떨어지는 그 점수였다. 난 망설임 없이 신학대학을 가기로 결정했다. 일반 대학에 진학하길 바랐던 기대를 저버린 딸에 대한 부모님의 분노도, 친척들과 친구들이 찾아와 신학대학 가는 것을 말리는 충고도 이미 확실한 증표를 가진 내 마음을 바꾸지는 못했다.

감리교신학대학교 면접이 있었던 날이다. 교수님은 왜 신학대학을 왔냐고 물으셨다. 내 대답은 간단했다. 하나님 일을 더 잘하고 싶어서, 라고 대답했다. 난 교회가 좋고 교회를 위해서 뭔가 더 잘 하고 싶은 단순한 마음이었다. 원서 접수를 할 때 신앙고백을 적어 내는 것이 있었다. 난 거기에 사도신경을 적어서 냈다. 그 보다 더 좋은 신앙고백문이 있을 수 없다는 고매한 생각에서가 아니라 신앙고백이라고는 사도신경 밖에 몰라 그걸 적은 것이다. 나중에 생각해 보니 자신의 신앙을 고백해 보라는 것이 아닐까 싶었다. 교수님은 내 대답과 신앙고백문을 보고 어찌 생각하셨는지 알 수 없는 웃음을 웃으시며 나중에 교수님 자신의 아들을 소개해 주겠다고 하셨다(교수님의 두 아들이 같은 학교에 다니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교수님을 통해 그 아들을 소개받는 일은 없었지만 교수님은 재미있는 기억 하나를 만들어 주셨다). 신학과 180 명 신입생 가운데 다섯 번째의 꽤 괜찮은 성적으로 입학을 했다.

성실한 교회 언니에서 신학생이 되고, 전도사가 되고, 20 여 년 전부터 목사의 아내가 되어 살고 있다. 지난 시간을 되돌아보니, 교회와 더불어 신앙생활 하면서 기쁘고 은혜롭고 감사한 일들과 슬프고 황당하고 괴로운 일들이 참으로 많이도 찾아왔다가 사라지곤 했다.

숲길을 걸으며 남편과 새해에는 무엇을 기도해야 하나 이야기 하게 되었다. 야트막한 산 속을 한 시간 반 이상 걷다 보면 수다를 많이 떨게 된다. 이 날은 이야기가 흘러 흘러 교회와 관련된 나의 어린 시절을 더듬고 있었다. 이런저런 얘기 끝에 남편은 당신의 순수함을 보시고 이 길로 이끄셨나 보네,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 말이 발에 밟혀 부스러지는 나뭇잎 소리에 섞여 스쳐 지나갔다. 곧이어 남편은 들으라는 듯이 목소리를 높여 말했다.  
당신의 그 순수함을 회복해야 될 때 같은데.”
순수함?’
머릿속에서 반짝하는 불꽃이 튀었다. 일정한 주제도 없이 떠들어댄 기억의 조각들 속에서 나의 순수함을 읽어준 남편이 예뻐 보였다. 동시에 미국으로 와서 느슨해져 있던 기도의 끈을 다잡아야겠다는 마음이 생겨났다.

나이가 어리든 나이가 들어가든 순수하게 살 수 있다. 어릴 때는 세상에 물들지 않아 그 자체로 순수한 상태라면 나이가 들어서도 사사로운 욕심이나 그릇된 생각을 하지 않는 순수에 머무를 수 있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미국으로 온 뒤로 난 자꾸 순수와는 거리가 먼 속물이 되어 가는 것 같다. 낯선 현실이 불안하게만 여겨졌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은 성경 가방 속 깊숙이 밀어두고, 한 달의 수입과 지출에 맞추어 모든 것이 숫자로 표현되었다.
당신 원래 그런 사람이 아니었어~”
아니야, 나 원래 그런 사람이야. 어떡할 거야!”
남편과 이런 주제로 때때로 실랑이를 벌이곤 했다. 이게 아닌데, 하면서도 지금까지 왔다. 그런데 나에게도 순수한 구석이 있었노라 남편이 일깨워주고 있는 것이다

생각해 보니 그 동안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을 들었을 때의 마음가짐도 보통 때보다 순수한 상태였다고 할 수 있겠다. 불안과 걱정, 지식과 경험, 선택과 방법, 손해와 이익 계산을 다 떠나 보내고, 앞으로 열려질 모든 가능성이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으며 그 어떤 것을 주셔도 그것은 좋은 것이라는 믿음으로 기도하는 것이다. 그리고 나 자신의 유익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하늘나라의 모형인 가족과 교회를 위한 응답을 바라는 마음이다. 한 마디로, 하나님이 선한 길로 인도해주시리라 믿고 마음을 텅텅 비우는 것이다. 그런 마음으로 기도하면 하나님은 한결 같은 사랑으로 나의 삶을 인도하고 계심을 확신시켜 주셨다.

이제부터 하나님께 드릴 기도의 키워드를 찾아냈다. 바로 교회다. 미국에 온 뒤로 목사는 교회라는 일터에서 월급 받는 고용인 같다는 느낌이 많았다. 난 그 고용인의 월급으로 살림을 사는 아내일 뿐이고 말이다. 누구도 이렇게 얘기한 사람은 없다. 그냥 나의 시답잖은 느낌이다. 이런 느낌도 불필요한 것이므로 흘러 보내려 한다. 그저 나는 교회를, 교인을 사랑하면 되는 것이다. 남편 말대로 혹여 교회를 사랑하는 나의 순수함을 보시고 지금의 자리로 이끄셨다면, 그래서 빈 마음으로 다시 교회를 사랑한다면, 하나님은 분명 나의 기도를 들어주실 것이다. 우리 교회가 사랑이 넘치는 교회, 소망이 있는 교회가 될 것이다

11/21/2013

소설『높고 푸른 사다리』를 읽고


 
 
전자책으로 한 권의 책을 완독했다. 처음이다. 전자책이 대세가 되어가고 있는 요즘도 나는 종이책이 더 좋다. 종이가 주는 느낌이나 냄새도 좋고, 맘에 드는 구절은 연필로 삐뚤삐뚤 줄을 긋거나 동그라미를 쳐 놓을 수도 있고, 책 내용과 관련되어 떠오르는 생각들을 적어놓기도 하고, 그래서 종이책이 좋다. 전자책을 읽을 수 있도록 만든 기기나 일부 앱들의 기능이 나날이 발전하고 있어 종이책을 읽으면서 하는 줄긋기, 메모, 북마크를 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원하는 내용을 찾아주는 검색 기능도 있어 편리하기도 하다. 그래도 아직 나는 손으로 한 장 한 장 넘기면서 읽는 종이책이 익숙하고 정겹다.

그런데 이번에는 한국 책을 구입할 수 없는 이곳에서  빨리 읽고 싶은 마음에 전자책 구매를 하자는 남편의 의견에 동의를 했다. 온라인 서점에서 책 값을 결제하면 바로 내려 받아 읽을 수 있으니 말이다. 처음 구입한 전자책은 공지영 작가의 새로운 소설, 높고 푸른 사다리. 공지영 작가의 소설은 시대정신을 반영하고 있는 것들이 많다. 그런 점이 공지영 작가의 글을 자꾸 읽게 한다.

높고 푸른 사다리』에서도 감동적이고 역사적인 사실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한국전쟁이 시작된 1950 12월에 있었던 흥남 부두 철수사건과 관련된 이야기가 소설 속에서 잔잔한 배경이 되어 자리잡고 있다. 전쟁에 필요한 연료를 전달하기 위해 흥남 부두를 향해 미국 국적의 배 한 척이 항해를 한다. 북쪽 흥남 부두에 도착했을 때 중공군의 개입으로 대대적인 철수가 이루어지고 있는 때였다. 피난을 떠나려는 많은 사람들은 부두에 모여 어떻게 해서든 배를 타기 위해 몸부림을 치기도 하고 승선이 허락될 배를 조용히 기다리기도 한다. 이것을 본 연료 운반선의 선장은 열 두 명이 정원인 배에 무려 1 4000 명을 태운다. 배가 가라앉거나 바닷속 지뢰가 터질 위험을 감수한 결정이었다. 사흘 동안 바다를 달려 한 명의 사망자도 없이 무사히 거제도에 도착한다. 이런 기적 같은 일을 경험한 선장은 종적을 감춘다. 이 사건의 자세한 내용과 그 후 선장이 어찌되었는지 소설에서 만나볼 수 있다.

이 소설에서는 사랑이라고 꼬집어 말하지는 않으나 여러 가지 사랑 이야기가 나온다. 한 미국인 선장의 피난민을 향한 사랑, 북한에서 선교하다가 죽거나 살아서도 자기 나라로 돌아가지 않고 남한에서 평생을 수도하는 외국인 수사들의 우리나라 사랑, 철탑에 올라가 있는 여성과 그녀의 가난한 아이들을 보듬는 어느 수사의 사랑, 친구들끼리의 사랑, 신부 서품을 앞두고 한 여성과 사랑하게 되어 신부가 되려는 것도 다 버리겠노라 하는 주인공 수사의 열렬한 사랑……

동시에, 사랑하기에 견뎌내야 하는 아픔과 이해할 수 없는 고통과 고난을 겪으며 하나님께 도대체, ?” 라는 물음을 계속 묻는다. 이러한 물음과 톨스토이가 물었던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에 대한 대답은 같다.  공지영 작가는 우리는 사랑하는 법을 배우기 위해 이 지상에 머문다고 표현한다.

높고 푸른 사다리』의 현실적인 배경은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과 거기서 노동하며 기도하는 수사와 신부들이다. 그들은 나와 교단은 다르지만 하나님의 부르심 대로 살아가려고 애쓰는 신앙인이라는 동질감이 생겨 그들의 이야기를 진지하게 읽었다. 내 생각이나 욕심과 하나님의 뜻 가운데서 늘 갈등하면서 그래도 하나님의 뜻을 묻고 따르려고 애쓰며살아가는 나의 마음에 남는 글귀가 있어 적어본다. 주인공인 요한 수사는 소설의 끝부분에서 미국에 살고 있는 노년이 된 연료운반선의 선장을 극적으로 만난다. 이 선장님이 요한 수사에게 한 말이다.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그날 배를 운전한 것은 제가 아니었습니다. 당신 자신을 그대로 놓아주세요. 힘을 빼고 즐거워하세요. 그러면 어떤 항구에 도착할 것입니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절대 미리 모든 것을 가르쳐주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한 가지만은 가르쳐주셨습니다. 반드시, 반드시 고통을 통해서만 우리는 성장한다는 것을요.”

11/14/2013

포옹


엄마의 화장품을 놀잇감 삼아 놀았던(으~~~) 산과 윤이.
 
 
둘째 아들 윤이가 싸놓은 도시락을 챙겨 학교에 가기 위해 주방 쪽으로 온다. 그러면 나는 가방 앞 쪽에 도시락을 편안하게 자리잡아 넣는 아이를 옆에 서서 지켜본다. 아이는 가방의 지퍼를 밀어 잠그고 나를 향해 돌아선다.

엄마, 나 갔다 올게.”

그래, 잘 갔다 와~.”

우리는 서로 꼭 끌어안는다. 그리고 이어서 나 보다 키가 훨씬 큰 윤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거나 뺨을 어루만져 주며 한 마디 빼놓지 않고 덧붙인다.

축복합니다.”

나는 엄마로서 윤이에게 아주 미안한 몇 가지 잊지 못할 일들을 가지고 있다. 첫 번째는 윤이가 새로운 생명으로 우리에게 찾아왔을 때이다. 첫째 아이 강산이를 얻은 이후로 임신이 되었을 때 마냥 기뻐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다. 강산이의 다운증후군 장애를 검사했던 병원에서 다음 아이를 갖게 되어도 검사를 받는 것이 좋다고 했기 때문이다. 우리 부부는 아이를 임신한 사실을 주변 사람들은 물론 가족에게조차 알리지 않고 조용히 검사를 받았다(왜 하나님을 믿는 신앙인이 이런 태도로 새로운 생명을 맞이했는지 제발 묻지 말아달라. 겨우 감추고 사는, 그래도 잘 감추어지지 않지만, 나의 어리석음과 부족함을 적나라하게 드러낼 용기가 아직은 없다). 검사 결과, 정말 정말 감사하게도 건강한 아이였다. 하지만 검사 결과가 나오기 까지 임신 기간의 절반은 걱정 속에서 보내야만 했다. 태아가 가장 잘 느끼는 감정이 두려움이라는데 윤이가 의식하지 못한다 해도 두려움 속에서 그의 삶을 시작한 것이다. 무엇으로도 갚을 길이 없는 미안함이다.

두 번째는 아이들을 더욱 안전하게 지켜주지 못한 것이다. 서울에서 살 때의 일이다. 한 전셋집에서 다른 전셋집으로 이사를 가기 위해 짐을 싸고 있었다. 이사 비용을 아끼기 위해 이삿짐 센터에 맡기지 않고 남편과 둘이서 살림살이를 정리하고 있었다. 미리미리 조금씩 짐을 싸두었다 해도 이사 전 날에 싸야 할 짐이 제일 많았다. 우리 부부는 짐 싸는데 온통 정신을 쏟고 있었고, 아이들은 현관 앞에 있는 정말 손바닥만한 화단에서 흙 장난을 하고 있었다. 그 화단은 창고 건물 지붕에 꾸며져 있던 것인데, 우리가 살던 2층집 현관과 창고 지붕이 연결되어 생긴 아주 조그만 공간이었다. 아무런 안전 장치도 없는 그 좁은 공간에서 아이들이 놀도록 방치한 것이다.

짐을 싸다가 뭔가 싸한 느낌이 들었다. 밖에 나가보니 윤이는 계단 10 개 정도의 높이인 창고 지붕에서 아래로 떨어져 있었다(십 몇 년 전 일인데 여기에 사실을 밝혔다고 경찰에 잡혀가지는 않겠지?). 두 살 반 밖에 되지 않은 작은 아이가 콘크리트 바닥에 누워 있는 것이 보였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고 모든 것이 정지되어 있는 것 같은 그 때의 적막한 느낌이란…… 다시는 느껴보고 싶지 않은 분위기다. 한 쪽 팔꿈치 아래에서부터 손목까지 깁스하고 몇 개월 치료하는 것으로 그 사건은 지나갔다. 하지만 지금도 윤이가 몸 어디가 불편하다고 하면 지붕에서 떨어진 일과 자꾸 연결시켜 생각하게 된다. 미안한 마음이 언제나 가실 지 모르겠다.

엄마 노릇을 제대로 못한 것이 이 밖에도 많으나 마지막으로 미안한 마음이 큰 일은 윤이가 어릴 적에 너무 엄하게 대한 것이다. 예절까지는 아니더라도 내가 아는 상식에 어긋나는 행동은 늘 지적당하고 바로 잡아져야 했다. 목회자 가정이다 보니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자리에 가는 경우도 많았고 공동육아 하면서 친구들과도 어울릴 때가 많았는데, 사람이 많은 곳에서건 그렇지 않은 곳에서건 어리광이나 칭얼거림을 잘 받아주지 못했고 단호했다. 교육에 일관성이 있어야 된다는 명분 아래 상이든 벌이든 “~하면 ~ 한다고 말했으면 그대로 지키려고 애썼다. 고지식하여 융통성 없는 나의 성향 대로 아이를 키운 것이다.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넓은 공간에서 옷을 비롯하여 여러 가지 생활용품을 일정 기간 동안만 팔고 없어지는 세일 행사장이 빈번히 열리던 때였다. 집에서 자동차로 10 여분 떨어진 곳에 그런 행사장이 열렸다는 소식을 듣고 젊은 교인들과 그들의 아이들과 함께 쇼핑을 갔다. 장난과 호기심도 많아지고 이리저리 잘 뛰어다니던 6 살쯤 된 윤이도 함께 있었다. 행사장이 복잡하고 사람도 많았기 때문에 그 입구에서 윤이에게 주의를 주었다. 주의의 내용은 엄마를 잘 따라 다녀라, 딴 짓 하다가 엄마 놓치면 그냥 두고 간다”, 정도 되었던 것 같다. 이것은 엄포를 놓으려고 흔히 말하는 관용어구 같은 것이었다.

행사장 안으로 들어가 둘러보길 잠깐의 시간이 흘렀는데 윤이가 보이지 않았다. 온 길을 되짚어 행사장 밖에 까지 나왔으나 윤이는 보이지 않았다. 같이 간 교인들도 이리저리 흩어져 찾아 다녔다. 행사장 안 있던 곳까지 다시 들어갔다가 또 밖으로 나왔다. 그런데 하얀색 승용차가 그 복잡한 틈으로 들어오더니 윤이를 내려놓는 것이었다. 윤이는 편안한 얼굴이었다. 운전석에 앉아 있는 사람은 중년의 여성이었는데 자동차 뒷좌석에 백화점 쇼핑 가방이 여러 개 있었고 옷 차림새로 보아 잘 사는 사람처럼 보였다.

아이의 말을 들어보니 여기 계실 것 같아 다시 데리고 왔습니다.”

난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잘 알지도 못하면서 고맙습니다, 만 여러 번 말하고 있었고, 그 여성은 휭하니 그 자리를 떠났다. 쇼핑이고 뭐고 다 집어치우고 윤이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왔다.

윤이는 행사장에 들어서자 마자 잠깐 한눈파는 사이에 엄마와 일행을 잃어버린 것이다. 엄마를 놓치면 두고 간다고 했으니 엄마는 저를 두고 가버렸다고 생각한 것이다. 윤이는 밖으로 나와 주차장에서 울고 있는데 어느 아주머니가 울고 있는 이유를 물었다고 한다. 윤이는 엄마가 자기를 두고 집에 갔다라고 설명을 했고, 우리 교회 있는데 까지 데려다 주시면 집을 찾아갈 수 있다고 했단다. 아주머니는 기꺼이 윤이를 승용차에 태워주었고, 윤이는 차 안에서 아주머니의 핸드폰으로 나와 지 아빠와 교회에 전화를 했으나 통화가 안 되었다. 교회 십자가 탑이 보이는 곳에 다다랐는데 그제서야 엄마인 나와 아주머니가 통화가 되었고, 아주머니는 다시 세일 행사장으로 돌아온 것이다(이것은 윤이의 증언(!)에 따른 것이다. 그 아주머니와 통화한 기억이 사실은 없다. 정신이 없긴 했나 보다). 가슴 철렁하고 어이없고 황당한 이 일을 윤이는 대단한 일을 해낸 모험담처럼 떠들었다. 윤이가 엄마를 원망하지 않고 그 정도로 기억해주어 고맙다. 정말 아찔하고 미안한 일이다.

이런 일들은 잊혀지지 않고 종종 윤이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게 했다. 무엇이 계기가 되었는지 기억은 나지 않는데, 어느 날 아침 잠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윤이를 더욱 따뜻하게 보듬어야겠다는 마음이 진하게 들었다. 오늘 실행하지 않으면 안 될 같은 절박한 마음도 들었다. 그 날부터 등교하는 윤이와 포옹이 시작되었다. 일 년이 조금 넘은 것 같다.

윤아, 오늘부터 엄마랑 허그 하고 학교에 가자.”

윤이는 선뜻 그러자, 고 하고 꼬옥 안았으나 서로 어색했다. 윤이는 나를 껴안는 팔의 힘 조절을 어떻게 할 지 몰라 했다. 팔을 내 등에 얹는 듯 마는 듯 하길래 성의 없이 이게 뭐야, 했다. 그랬더니 다음 날은 어찌나 세게 껴안는지 내 가슴이 터지는 줄 알았다. 나는 또 피드백을 해 주었다. 그것도 반복되는 훈련 같아서 익숙해지고 자연스러워졌다. 그리고 이제는 엄마와 포옹하고 나서 학교 가려고 윤이는 나를 기다리기도 한다. 축복의 말도 꼭 듣고 싶어하는 것 같다.

윤아, 엄마는 네게 줄 복을 갖고 있지 않아. 엄마가 축복합니다~, 라고 말하는 것은 그 말 앞에 예수님의 이름으로, 가 생략된 거야.”

나도 알아!”

알고 있다니 고마운 일이다. 포옹하고 나서 자동차에 오르고, 차고의 문이 열리고, 자동차가 차고를 빠져 나가고, 다시 차고 문이 닫히기 까지 윤이를 바라보며 기도한다. 축복합니다~, 뒤에 생략된 기도도 이 기회에 윤에게 들려주고 싶다.

주님, 윤이가 만나는 선생님과 친구들의 관계 속에 늘 함께 있어주세요. 학교에서 배우는 모든 지식이 하나님을 알아가는 지혜가 되게 해 주세요. 세상과 사람을 위해 사랑으로 헌신하여 하나님 나라를 위해 일하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게 해 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아멘

11/07/2013

IEP (2)


Prom 2013


 
앞으로 두 번 정도 남은 IEP 미팅이라도 잘 해보자는 생각으로 일 년 전 받았던 IEP 서류를 꺼내 다시 훑어보았다. 모든 학교 생활이 끝나면 부모와 같이 산다고 하더라도 독립적인 생활이 가능하도록 계획되어 있다. 전자레인지를 이용하여 간단한 음식 조리해 먹기, 식기세척기나 세탁기 사용하기, 시계보고 시간 알기, 동전과 지폐의 가치 알고 헤아리기, 일터에서 다른 사람의 건설적인 비판을 존중하고 받아들이기…… 이러한 목표들을 학교에서, 집에서 얼마나 잘 수행했는지 묻고 답하게 될 것이다.

다음은 직업훈련과 관련된 질문을 적어보기 위해 강산이가 그 동안 일했던 곳과 맡겨진 일이 무엇이었는지 다시 살펴보았다.

여기 지역 과도기 학급(transition class, 만 18-21 세)의 직업훈련은 기본적으로 다니던 고등학교에 출석하면서, 학교 안에서 일하는 것(school-based work experience)과 지역사회에서 일하는 것(community-based work experience) 가운데 선택할 수 있다. 참고로 전에 살았던 곳에서는 직업훈련이 ADAPT(Assisting Developing Adults with Productive Transitions)STRIVE (Supported Training and Rehabilitative Instruction In Vocational Education) 프로그램으로 나뉘어 있다. ADPAT는 다니던 고등학교에 계속 머무르면서 학교와 지역사회를 경험하는 프로그램이다. STRIVE는 교육 시간 내내 일터로 직접 나가서 직업 훈련을 하는 프로그램으로, 이것 역시 공교육 과정에 들어 있는 것이다. 고등학교 4 년을 마친 후 이 두 프로그램 가운데 하나로 들어가게 된다. 이러한 프로그램들은 주마다 다르고, 같은 주라도 카운티마다 조금씩 다르다. 사실 강산이를 통해 미국의 특수교육을 아주 조금 경험했을 뿐 새로운 현실에 맞닥뜨리면 여전히 어리바리 하다.

강산이네 학교 안에서 이루어지는 직업훈련은 학교 소식지 발송을 위해 라벨 붙이기, 온실 관리, 일정 지역 청소 등을 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강산이가 지역사회에서 했던 일은 피트니스 센터에서는 수건 정리하는 일, 백화점이나 Family Thrift shop(재활용품 파는 곳)에서 옷 따위를 옷걸이에 걸어 진열, 정리하는 일을 하기도 했다. 그리고 USC School of Medicine(사우스캐롤라이나대학 약학대학)에서는 사무실 업무 보조 역할로 편지 발송을 위한 라벨 붙이기와 간단한 서류 정리를 했다고 한다. 직업훈련과 관련되어서는 실습을 나간 곳에서 강산에게 맡겨진 일들을 잘 하고 있는지, 어떤 일을 가장 재미있게 잘 하는지를 꼭 물어보리라 적어두었다.

그리고 강산이가 학교 밖에서 잘 하고 있는 일 한 가지를 더 적어두었는데, 교회 재정부에서 집사님들을 도와드리고 있는 것이다. 언제부턴가 집사님들이 헌금 정리하시는 시간에 강산이가 교회 사무실에 들어가는 것을 알게 되었다. 주일마다 사무실에 들어가는 것 같아 집사님들에게 방해가 되지 않을까 신경이 쓰였다. 하루는 사무실 문을 살짝 열고 강산이 보고 그만 나오라고 했다. 그랬더니 집사님은 괜찮다고 하셨다. 그래도 마음이 쓰였다. 그런데 어느 날인가 한 집사님께서 강산이가 어디 있느냐며 찾으셨다. 재정부 일 볼 시간이라면서 말이다. 집사님은 일부러 강산이와 함께 일을 하고 계셨던 것이다. 집사님들 곁에 강산이의 자리를 마련해주신 그 배려에 어찌나 감사하던지…… 강산이가 사무실 안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하는지는 모른다. 그저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재정부 일이 끝났는지 종이 두 장을 들고 나온다. 그 중 하나인 헌금 수입 보고서는 모두가 볼 수 있도록 교회 게시판에 걸어두고, 다른 하나인 재정보고서는 재정부장님과 목사님의 사인을 받아가지고 간다. 그 일을 하는 동안 강산이의 걸음은 얼마나 힘찬지 모른다. 이 사실을 IEP에 가서 얘기하고 싶어 잘 보이게 적어놓았다.

정해진 IEP 미팅 시간보다 조금 일찍 학교에 도착했다. 학교 현관에서 체크인을 하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회의실이 있는 3층으로 갔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려는데 마침 강산이와 담임 선생님이 엘리베이터 문 앞에 와 있었다. 회의실이 1층으로 바뀌었다며 내려가자고 했다. 엄마가 학교에 온다고 강산이가 많이 좋아라 했다며 선생님께서 전해주셨다. 선생님이 그 말을 하는 바람에 금방 잊었지만, 엘리베이터 앞에서 두 사람을 만나지 못했으면 조금 헤맬 뻔 했다. 학교가 생각보다 넓고 복잡하다.

담임 선생님은 회의를 시작하자며, 그 동안 여러 차례의 IEP 미팅을 하느라 애쓰셨을 텐데 오늘이 마지막 회의가 될 것이라, 고 말씀하셨다. 2014 1월에 강산이가 스물 한 살이 되므로 이번 학년도가 마지막이라는 것이었다. 나는 장애 학생은 스물 두 번째 생일 전 날까지, 그러니까 교육 받을 수 있는 21 세까지는 꽉 채워 학교에 다니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러면 강산이는 이번 학년도가 끝나는 2014 6월이 끝이 아니라 스물 두 살 생일이 들어있는 2015 1월이 끝이어야 하는 것이다. 내년 6월이 끝인지 몇 번 확인을 했는데 그렇다는 것이다. 한 학기 일찍 학교를 마친다고 해서 큰 일이 일어나는 것은 아니지만 마음에 의문이 가시지 않았다.

게다가 학교 심리학자는 사우스캐롤라이나 경제가 어렵기 때문에 강산이가 학교를 마친 후에 일할 곳을 구하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했다. 강산이가 자원봉사든, 보수를 받든 일을 할 수 있는 곳이 생긴다는 것은 사회와 소통하는 길 가운데 중요한 하나다. 그 분은 현실을 있는 그대로 얘기하는 것일지라도 아직 시간이 남았는데 어떤 노력도 하기 전에 단정지어 얘기하는 것 같아 마음이 답답해져 왔다. 한편 일터와 더 먼 거리에 있는 중증장애인들을 생각하면 강산이의 경우는 투정에 지나지 않을 것 같다.

담임 선생님은 강산이가 지난 IEP 목표들을 대체로 잘 수행했다고 평가해주셨고, 나는 준비해간 직업훈련과 관련된 질문들을 주로 했다. 선생님은 강산이가 특히 사무실 업무를 좋아하고 잘 한다고 하셨다. IEP 초안에도 사무실 일과 관련된 기술들을 강화하는 계획들이 들어 있는 것을 보게 되었다. 사우스캐롤라이나대학의 약학대학 사무실에서도 일을 아주 잘 했다고 하셨다. 강산이가 교회 재정부에서 일을 돕고 있다는 것도 비슷한 종류의 일인 것 같아, 선생님의 평가에 이어 자연스럽게 잊지 않고 얘기할 수 있었다. 보통은 IEP 회의에 가도 난 그다지 말이 많지 않은데, 이번엔 미리 준비한 얘기가 적절하게 강산이의 강점을 드러내는데 도움을 준 것 같았다. 신기하고 감사했다. 담임 선생님은 이번 IEP모임을 한 장에 정리한 문서를 나중에 보내주셨는데, 강산이가 사무실 업무를 더 잘하기 위해서 지역 내 다른 교회나 미술을 가르치는 사무실 등에서 훈련할 것이라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이것은 잘 되었다.

또 마지막 IEP 모임이기 때문에 가디언십(Guardianship, 장애인의 법적인 후견인을 세우는 일)이나 직업재활센터에 대한 정보를 다른 때보다 구체적으로 제공해주었다. 데이케어(day care, 주간보호시설)에 대해서는 지난 번과는 달리 언급하지 않으셨다. 언젠가 방문하여 알아본 데이케어 종일반에 다닐 경우 매월 3,000 달러 정도의 비용이 든다. 또 현재 어느 장애학생이 다니는 데이케어에서도 그 정도의 비용을 받는다고 그 어머니로부터 들은 바 있다. 이 비용은 개인적으로 부담하기도 하고, 메디케이드 웨이버(Medicaid waiver, 연방정부가 정한 기준에 해당되는 장애인에게 주정부가 제공하는 서비스)를 받는 사람은 주정부가 그 비용을 담당하게 되므로 장애인 본인은 무료로 데이케어의 서비스를 받을 수 있다. 그런데 메디케이드 웨이버 대기자가 몇 천명에 이른다. 여기는 5,000 명 정도 된다고 했다. 강산이가 데이케어를 이용하려면 그 비용을 개인이 부담해야 한다. 와우! (더 적은 비용으로 다닐 수 있는 주간보호시설이 있는지, 이것을 지원하는 정부차원의 다른 서비스가 있는지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한다. 와우! 반면, 만약 저렴한 비용으로 다닐 수 있는 데이케어가 있다면 애틀랜타에서 만난 여러 장애우들이 다니고 있었을 텐데 그 당시에는 내가 만난 이들 중에 한 명도 없었다.)

회의를 마치고 갑갑한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왔다. 차근차근 하나씩 풀어가면 되겠지, 하면서도 산 넘어 산 같이 여겨진다. 당장 의문을 해결할 수 있는 것이라도 해서 그 짐을 덜어내리라. 애틀랜타에 살 때 알고 지내던 어느 장애학생의 어머니에게 전화를 했다. 공립학교에 언제까지 다닐 수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역시 내가 알고 있던 대로 스물 두 번째 되는 생일 전 날까지 다니는 거라고 했다.

나는 선생님께 이메일을 보냈다. 애틀랜타에서는 스물 두 살 생일이 되는 전 날까지 학교를 다니는데 강산이에게 이번 학년도가 마지막인 것이 맞느냐고 말이다. 선생님은 바로 답장을 주셨다. 주마다 법 적용이 다양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곳 정책에 따르면 21 세 생일이 들어 있는 학년도까지만 학교에 다니게 되어 있다는 설명이었다. 그래서 내년 6 6일이 마지막 날, 맞는다고 하셨다. 자세한 설명을 해주어 진심으로 감사하다는 답글을 보내드렸다.

보통은 자녀들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이나 직장을 갈 나이쯤 되면 부모의 품을 떠나는데 우리 강산이는 더 가까이 오게 된다. 강산이가 학교를 다 마친 후의 삶을 어떻게 준비해야 할 지…… 앞으로 펼쳐질 새로운 패턴의 삶이 딱 한 학기만큼 더 가까이 와 있다.  

10/30/2013

IEP (1)


<고등학교 첫해에 참석한 홈커밍 파티에서 >
 


IEP Individualized Education Program 혹은 Individual Education Plan(개별교육프로그램)의 준말이다. 나의 첫째 아들 강산이 같이 장애가 있는 학생(student with special needs-장애인을 나타내는 영어 단어로는 the handicapped, the disabled, 그리고 special needs 따위가 있다. 그 가운데 special needs가 제일 맘에 든다)은 일 년에 한 번씩 IEP를 검토, 수정, 보완하기 위한 모임을 갖는다.

보통은 일 년을 주기로 IEP 모임을 갖지만 일 년이 되지 않았을 때에도 장애학생을 교육하는데 IEP 모임이 필요하다고 판단되면, 부모나 교사는 언제고 모임을 요청할 수 있다. IEP 모임 일정은 학교측에서 한 달 전, 그리고 적어도 5일 전, 이렇게 두 번 알려주도록 되어있다. 한 달 여유를 두고 모임 날짜를 알려주지만 사정이 생기면 날짜와 시간을 형편에 맞게 조정할 수도 있다.

이 회의에는 학생, 부모, 특수학급 교사, 일반학급 교사는 꼭 참석하고 IEP를 결정해야 하는 사항에 따라 학교 심리학자, 과도기 전문가(transition specialist), 상급학교 교사, 학교 사회복지사(school social worker) 등이 참석하기도 한다. 영어가 능숙하지 못한 부모는 통역사를 요청할 수도 있다. 그리고 부모 입장에서 교사들에게 내 아이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하여 학교 밖에서의 생활을 얘기해줄 수 있는 사람을 초청할 수도 있다. 예를 들면, 교회학교 교사나 과외활동 지도교사 등이다. 이런 경우에 부모와 함께 동행하는 사람에 대하여 학교에 미리 알리는 것이 예의인 것 같다.

IEP 모임에 대해 알고 있는 일반적인 규칙을 생각나는 대로 적어보았다. 미국에서 아이를 어려서부터 키운 부모나 이민 생활이 오래된 부모들은 IEP에 대한 경험이 많을 터이니 여기에 덧붙일 것들이 더 있을 지도 모르겠다.

강산이는 현재 공립학교의 과도기 학급(transition class, 18-21 )에 속해 있다. 장애가 있는 학생은 공립학교에 만 21 세까지 다닐 수 있도록 특수교육법에 정해져 있다. 과도기 학급은 학교를 떠나서 사회에 나가면 독립적인 생활을 하고 일자리를 얻어 봉사하거나 급여를 받아 생활할 수 있도록 훈련하는 곳이다. 과도기 과정을 위한 계획은 고등학교에 다니기 시작하는 만 14 세부터 세워진다. 그리고 고등학교 4년 과정 이후에 과도기 학급에서는 사회에 통합할 수 있는 학습과 훈련을 더 적극적으로 하게 되는 것이다. 어떤 부모님은 고등학교 이후에 정규 교육 과정으로 과도기 학급에 다니는 아이들을 두고 대학 다닌다고 재미있게 얘기하기도 한다.

미국에 와서 처음 살았던 애틀랜타에서 첫번째 IEP 회의에 참석했을 때는 선생님들이 물어보는 것에 답하는 것 밖에는 말을 거의 안 한 것 같다. 이 모임의 성격도 잘 파악하지 못한 상태였기 때문에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미국 학교에 처음 다니게 되는 강산이를 이해하려는 마음이 느껴지지 않아 속이 상해있기도 했다. 낯선 사람과 환경 속에서 강산이는 자기를 어떻게 표현할 줄 몰라 몸도 마음도 웅크리고 있던 때였다. 언어도 통하지 않았음은 물론이다. 선생님이 뭘 지시해도 알아들을 수 없었을 것이고 그러니 그 지시를 따를 수는 더더욱 없었을 것이다. 한국에선 한 학년이 새로 시작되는 시기였으나 미국은 학년 말이어서 많은 부분 기다려주고 설명해주어야 하는 새로운 전학생이 그다지 반갑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그렇게 학교의 입장을 이해하고 학교에서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가고 하며 두어 달을 괴롭게 보내고 모인 자리였다.

그 모임에는 고등학교 선생님 두 분이 와 있었다. 강산이는 한국에서 홈 스쿨을 하다가 남편의 목회지가 옮겨지면서 더 이상 홈 스쿨을 할 수 없어 뒤늦은 만 9 세에 초등학교 일 학년에 입학하였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미국으로 왔기 때문에 중학교에서 수업을 받으러 간 것이었다. 그런데 중학교 측에서 강산이를 어찌 생각했는지 나이를 문제 삼았다. 미국 학제에 따르면 고등학교에 진학했을 나이이므로 고등학교 선생님을 초청했다는 것이었다. 미국에 왔으니 미국 법을 따르는 것이 당연한 일이나 중학교 과정을 통째로 건너뛰는 것이 어찌 이상했다. 학생, 부모, 선생님이 동의가 되면 나이가 한 살 많아져도 중학교에 남아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나중에 다른 장애학생 부모님을 통해서 알게 되었다.

고등학교 선생님 두 명 가운데 남자 선생님은 짧지만 한국 경험이 있는 분이었는데, 강산이에게 다가가 한국 말로 인사를 나누어주셨다. 또 다른 선생님도 잔잔한 목소리로 영어 인사를 건네며 웃어주셨다. 강산이는 고등학교 남자 선생님과 악수도 하고 포옹도 하면서 관심을 나타냈다. 매가리가 하나도 없고 웃음을 보여주지 않는 중학교 담임 선생님과 심술궂고 딱딱한 표정의 특수학급 전담 교감 선생님과는 참으로 대조적이었다(이러한 인상은 중학교 선생님들이나 나나 서로에게 마음이 열려있지 않았기에 그리 보였을 거란 걸 안다). 세 시간 가까이 엄청 오랫동안 진행된 IEP 모임에서(그 이후에는 평균적으로 한 시간 반 정도의 시간이 소요되었다) 함께 참석하고 있던 강산이는 매우 의젓한 태도를 보여주었고 중학교 교감 선생님의 친절한(!) 지시에 따라 주어진 과제도 문제 없이 수행했다. 중학교 측의 강산이를 밀어내는 듯한 입장이나 고등학교 선생님들과 강산이 서로의 호의적인 태도, 공립학교에 소속된 어느 한국인 선생님의 조언에 따라 고등학교에 진학하기로 결정했다.

고등학교에 다니기 시작한 강산이는 하루가 다르게 적응해 나갔고, 일 년이 지나 IEP 모임에 갔을 때는 학교 생활을 즐거워하고, 자기 반 친구들 친절하게 잘 도와주며, 게다가 영어로 학교 생활하는데 문제가 없다는 선생님 말씀에 깜짝 놀랐다. 우리 식구 중에서 영어를 두려움 없이, 많이 사용하는 사람이 강산이가 되었다(강산이는 그때나 지금이나 영어보다 한국말을 더 많이 사용한다. 한국어를 읽거나 쓰는 것도 문제 없다. 이 또한 자랑스럽다). 또 여기 사우스캐롤라이나주, 콜럼비아로 이사 와서 같은 학교에 다니고 있는 동생 윤이가 전해주는 말에 따르면, 형이 학교에서 무척 인기가 높고 아는 사람도 많다고 한다. 특히 여학생들과 친한데 서로 아는 척하며 포옹하는 것을 늘 본단다. 누굴 닮은 것인지……

지난 주에 강산이를 위한 IEP 모임이 있었다. IEP 회의에 가려면 늘 긴장됐는데 이번에는 왠지 모르게 마음이 편안했다. 여러 해 동안 IEP에 참석했다고 여유가 생겼나, 생각했다. 담임 선생님이 미리 작성한 IEP 초안을 가지고 회의를 하다 보면 그 문서의 내용이 자세하고 강산이에게 필요한 교육 목표들을 적절하게 제시하고 있어서 질문하기 보다는 잘 듣고, 동의하고 그와 관련된 강산이의 강점을 애기하는 정도였다. 그런데 이제는 강산이가 사회로 나갈 시간이 점점 가까워지고 있어서 그런지 직업 훈련과 관련된 질문들이 여러 개 떠올랐다.
 
---다음에 이어서

10/17/2013

아버님, 편안히 가세요


한국에서 보내준 사진


 
한국에 계신 아버님께서 돌아가셨다는데 나와 아이들은 그냥 여기, 미국에 있다. 마음이 아주 불편하다. 이렇게 기분이 싱숭생숭하고 쓸쓸할 지 몰랐다.

올해 2월 간암 수술과 6월 뇌종양 수술을 받고 집에서 투병하시던 아버님께서 음식을 전혀 못 드시고 호흡이 아주 거칠어지는 등 건강 상태가 아주 많이 안 좋아지셨다. 가까이서 아버님을 돌보시는 어머님은 첫째 아들인 남편이 한국으로 빨리 와주길 바라셨고 남편도 서둘러 비행기편을 알아보고 고향집으로 날아갔다. 아버님의 병과 수술, 그 후 건강이 악화되는 과정을 함께 겪으신 어머님과 뇌종양 수술 후 병원에 머무르며 아버님 상태를 잘 알고 있던 남편은 아버님에게 닥칠 무엇인가를 감지하고 있던 것 같다.

아버님은 화요일 저녁 늦게 한국에 도착한 남편과 하룻밤을 보내셨다. 한국이 아침 식사 시간이 되었을 즈음에 더 늦으면 안 될 것 같은 마음이 들어 둘째 아이 윤이와 나는 전화로 마지막 인사를 드렸다. 그 동안 할아버지의 건강을 위해 기도를 많이 하던 강산이는 할아버지와 전화 통화를 하지 않겠다고 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실 것 같다는 얘기를 하면 자꾸 울어서 전화 통화하도록 더 이상 권하지 않았다.

할아버지, 그 동안 고마웠어. 할아버지가 있어서 좋았고, 할아버지가 곁에 없어도 우리 마음에 있을 거야. 하늘 나라에 가서 편안히 계셔. 할아버지, 사랑해.”

아무 대꾸도, 소리도 내지 못하시는 할아버지께 윤이는 차분하게 자신의 마음 전했다. 나는 말보다 울음이 앞서 제대로 말을 못했다. 그리고 나서 그날, 10월 16일 수요일 낮 1 30(한국 시간)에 편안히 숨을 거두셨다.

아버님은 성실하고, 약간의 유머가 있으시고, 곧은 소리 잘하시고, 볼멘소리 하시면서도 어머님을 잘 도와주시고, 손주들에게는 무뚝뚝한 분이셨다. 아들 딸 구별 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 권장하던 시기에 마을 이장 하시면서 솔선수범해야 한다며 아들 둘만 낳고 그만두신 결단력 있는 분이다. 그리고 두 아들을 대학까지 보내기 위해 아주 열심히 농사 지으셨다고 한다. 두 아들은 아버지의 바람 이상으로 대학원을 나와 목사와 특수학급 교사로 아버님처럼 성실하게 자기 역할을 하고 있다. 아버님은 30 대에 교회 장로가 되셔서 돌아가시기 까지 목사들을 도와 교회를 섬기셨다. 세상 즐거움을 엿보지 않고 하나님 믿는, 신앙 안에서만 기쁨을 누리셨다. 그렇게 사시다가 육신을 가진 삶을 조용히 마무리 하시고 영원한 삶을 누리는 하나님 나라로 떠나셨다.

앞으로 아버님과의 마지막 시간들을 기억할 때 내가 얘기할 수 있는 것은 이것 뿐이다(남편이 돌아와 아버님 장례에 대해 들려주는 얘기가 내 기억에 보태어질 것이다). 그리고 돌아가신 아버님을 조문하기 위해 찾아오시는 많은 손님들을 맞이하고 대접하며, 그러는 중에도 장례 일정이 순조롭게 진행되도록 이렇게 저렇게 마음 쓰고 있을 가족들의 고단함에서도 나는 멀리 떨어져 있다.

여기 분위기는 담담해. 다들 농촌에서는 추수가 끝나서 제일 한가로운 시간이고, 날씨가 덥지도 춥지도 않은 좋은 계절에 가셨고, 그리고 내가 여기 급하게 오고 다음날 임종을 지키는 가운데 돌아가셔서 복되다고 하셔.”

남편이 보내준 문자 메시지의 내용이다.

담담하다…… 아버님이 돌아가시면 남편만 한국에 가게 되리란 걸 알고 있었지만 함께 가 뵙지 못한 죄송스러움과 어쩌다 이리 멀리 떨어져 살게 되었나 하는 생각이 꼬리를 물고 자꾸 파고들어 난 새벽기도 때마다 소리 없는 울음을 참았다. 차라리 가족들과 조문객들과 섞여 함께 있는 편이 아버님의 죽음을 곱씹으며 장례 과정을 상상만 하고 있는 것보다 덜 슬플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한국에 가 있는 남편이 알려준 대로라면, 아마도 이 글을 올릴 때쯤(한국 시간으로 금요일 오전 9) 장례식장을 떠나서 평생 섬기시던 교회에서 발인예배를 드리고, 12 시쯤이면 아버님의 부모님과 이미 돌아가신 교우들이 잠들어 있는 교회 장지에 묻히시게 될 것이다. 나도 이젠 슬픔을 거두고 하늘 나라로 가신 아버님께 사랑하는 마음을 담아 인사를 드리련다.

아버님, 편안히 가세요. 나중에 다시 뵈어요.”

그러므로 그들이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고 또 그의 성전에서 밤낮 하나님을 섬기매 보좌에 앉으신 이가 그들 위에 장막을 치시니 / 그들이 다시는 주리지도 아니하며 목마르지도 아니하고 해나 아무 뜨거운 기운에 상하지도 아니하리니 / 이는 보좌 가운데 계신 어린 양이 그들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라”(요한계시록 7:15-17)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이르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 /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요한계시록 21:3-4)

10/12/2013

빨랫줄


이 사진만  찍고 이불을 가지고 얼른  집안으로 들어왔다.
경찰에 잡혀갈까봐!? ^^
 

밤이 점점 길어지는 시기라 그런지 해 뜨는 시간이 늦어지고 있다. 거기에 일광절약(daylight saving) 기간이라, 한 시간이 빠르므로 오전 9 시쯤 되어야 햇살이 밝게 펴진다. 가을의 곱고 보드라운 햇살은 한낮이 되면 화씨 80 (섭씨 26.7 ) 정도의 좀더 진하고 강한 빛으로 바뀌는데 그래도 여전히 부드럽다. 다만 해가 지고 나면 기온이 뚝 떨어져 아침 저녁으로 서늘해지는 날씨에 감기 걸리지 않도록 잠 자리 이불을 따스한 것으로 바꾸고, 덮었던 것은 깨끗하게 빨아 햇빛에 뽀송뽀송 말리면 좋을 때다.

미국에 와서 사는 동안 운 좋게 뒷마당이 있는 집들에서 살고 있다. 지금 사는 집은 뒷마당이 넓어 잔디를 돌보아야 하는 수고스러움이 있지만 답답하지 않아 좋다. 이불 같은 큰 빨래를 할 때면 건물로 가려지지 않은 한적한 뒷마당 한 가운데에 빨래틀을 펴놓고 따사로운 햇빛과 솔솔 부는 바람에 말려보고 싶은 마음이 늘 든다. 그런데 여태 한 번도 그렇게 해 보질 못했다. 가만히 눈치를 보니 집 밖에 빨래를 너는 집이 없다. 송화 가루나 꽃가루가 너무 많이 날리는 시기에는 어쩔 수 없다 해도 그렇지 않은 때에도 다른 집 마당에 빨래가 널린 것을 본 적이 없다. 이불 하나 빨 것이 생겼는데 세탁기에 넣어 돌려놓고 궁금한 것이 생기면 찾아가는 곳, 인터넷을 찾아가 빨랫줄 사용에 대해 물어보았다.

주로 2008 년을 이후로 나온 글들이 많았는데, 빨랫줄 사용 운동이 전개되는 것과 관련되어 있었다. 그러니까 이런 운동이 벌어지는 것은 빨랫줄금지법에 반대하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 재미있는 법이다. 이 법이 만들어진 배경에는 빨래를 집 밖에 널어 놓으면 가난한 모습으로 보여 보기에 좋지 않다는 것과 빨래건조기를 만드는 가전제품회사나 건조기에 사용되는 전기를 공급하는 전력회사의 정치권과의 막후교섭 때문이라는 것이다. 2008년 매사추세츠 주에서는 빨래를 실외에 널지 말라는 요구를 무시하던 남성이 총에 맞아 죽기까지 했다는 것이다(연합뉴스 10.8.2010).

조금 다른 문제인데, 태양열을 이용하여 에너지 절약할 수 있다면 왜 선진국인 미국은 그걸 대중적으로 사용하지 않는가 궁금해 하며 교회 집사님과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집사님은 전력회사가 태양열 사용에 대해 흔쾌히 생각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상당히 설득력 있는 얘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빨랫줄 사용과 관련되어서도 비슷한 이유로 금지되어 있다는 사실이 좀 씁쓸하다.

위키피디아에 빨랫줄 사용에 대한 장단점이 잘 적혀 있는데 당연하면서도 재미있어서 몇 가지 옮겨보려 한다(http://en.wikipedia.org/wiki/Clothes_line).

장점으로는……

l  돈을 절약할 수 있다(전기요금, 빨래건조기 구입비, 섬유유연제).

l  온실가스를 배출하지 않는다(가정에서 배출하는 온실 가스의 3 분의 1이 빨래건조기에서 나오는 것이란다).

l  화학 섬유유연제 없이도 신선한 새물내(clothes-line fresh)를 맡을 수 있다.

l  옷이 줄어들거나 구김이 가는 것, 천의 마모 정도가 덜하다.

l  정전기로 달라붙는 현상이 덜하다.

l  빨랫줄이 끊어지거나 상하여 고치는데 드는 비용이 빨래건조기가 고장 나서 고칠 때보다 훨씬 적게 든다.

단점으로는……

l  빨랫줄에 빨래를 너는데 시간이 걸린다.

l  비가 오면 빨래를 실내에 널어야 되고, 갑자기 날씨가 바뀌면 젖을 수도 있다.

l  빨래를 도둑 맞을 수도 있다.

l  , 꽃가루, 새똥, 자동차 오염물질 같은 것들이 묻을 수도 있다.

l  빨래 집게 자국이 남는다.

최근 자료에서는 빨랫줄금지법을 폐지하고 햇빛에 말릴 수 있는 권리(Right to dry)를 회복하는 법이 미국 내 19 개 주에서 통과되었다는 것도 새로이 알게 되었다(애리조나, 캘리포니아, 콜로라도, 플로리다, 하와이, 일리노이, 인디애나, 루이지애나, 메인, 매릴랜드, 매사추세츠, 네바다, 뉴멕시코, 노스캐롤라이나, 오레곤, 텍사스, 버몬트, 버지니아, 위스콘신 / 시애틀 타임스 8.13.2013). 비록 내가 사는 주는 거기에 속하지 않지만 빨랫줄을 다시 사용하자는 운동이 점차 확산되고 있음이 분명하다.

주정부가 이러한 법을 통과시켜도 이미 빨래건조기는 생활필수품이 되었고, 마당에 내걸린 빨래가 보기에 좋지 않다는 의식을 바꾸기 까지는 시간이 걸리겠지. 이불 빨래를 해놓고 집 안에서 말리며(보통 때는 건조기에서 어느 정도 말리고 집안에 널어놓고 또 말린다) 쏟아지는 가을 햇빛이 아까운 마음이었는데 언젠가 우리 집 뒷마당에서도 빨래를 널어볼 날이 오려나, 막연하지만 그래도 기대를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