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1/2010

내 희망은 그에게서 온다

<지인이 보내준 사진들입니다.>


11년 전쯤, 서울에서 살 때는 공동체로 “사는 것”에 참으로 관심이 많았습니다.
농촌의 생산자와 도시의 소비자를 직접 연결하여 유기농 상품이나 친환경 생산물을 공정하게 거래하는 생활협동조합, 아이들 교육을 부모와 교육자가 함께 풀어가는 공동육아조합, 입양이나 위탁을 통해 여러 자녀들을 보살피고 홈스쿨링을 하는 가족공동체,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 사는 공동체….
이런 여러 공동체의 이웃,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려는 정신과 하나님을 사랑하는 신앙이 보태져 도시에서 가능한 신앙공동체를 만들어보자며 남편과 친구 목사님이 공동목회를 하던 때였습니다.

공동목회보다 먼저 시작된 것은 공동육아였는데, 초등학교 가기 전 아이들을 가진 몇몇 부모들이 아이들을 유치원에 보내지 않고, 아빠들은 마음으로 힘이 되어주고(!?) 엄마들이 아이들을 직접 교육하는 것이었습니다.
아이들을 누구보다 잘 아는 엄마들이 아이에게 필요한 교육 내용 가운데, 각자가 관심 있거나 전문적으로 교육할 수 있는 영역을 나누어 아이들과 놀면서 가르치고 배우는 품앗이 교육이었습니다.
노래와 놀이를 맡은 방글 엄마, 그림과 만들기를 맡은 색종이 엄마, 우리 가락과 악기를 가르치는 얼씨구 엄마, 나들이를 맡은 산들 엄마, 건강과 위생을 책임지는 ** 엄마(왜 생각이 안 나지? 미안...생각났음. 튼튼 엄마 ^^), 책 읽어주는 호호 엄마….

다 기억이 안 나지만 7~8가정이 늘 공동육아에 함께 했고 10가정쯤 되었던 때도 있었습니다.
3, 4년 지속되었던 공동육아의 경험은 교육을 통해 신앙인으로서 건강하게 살아보려는 노력들이었고, 교육 내용은 정말 창조적이어서 기쁘게 능동적으로 참여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공동육아에 참여하던 아이들 가운데 저희 첫째 아이가 초등학교 입학통지서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 즈음에 대안교육의 하나인 홈스쿨링 하는 여러 가정이 사례를 발표하면서 제법 큰 모임이 서울에서 만들어지고 있었고, 우리 가정도 그 대열에 끼어 있었습니다.
아이를 초등학교에를 보낼 것인지, 홈스쿨링을 할 것인지 결정해야만 했습니다.

복잡한 서울, 넓지 않은 골목을 두고 마주 보는 집들이 촘촘하게 붙어있는 주택가, 여러 가구가 한 집에 사는 다가구 주택 2층, 거실 큰 창문 앞에 앉아 있던 어느 날이였습니다.
갑자기 제가 공중으로 붕 떠오르더니 점점 위로 올라가서 서울을 벗어나고, 한반도를 벗어나고, 지구를 벗어나, 우주의 어느 곳에 멈추었습니다.
그리고는 방금 전 제가 떠나온 지구를 내려다 보았습니다.

보이는 것은 여러 갈래의 길과 그 길들을 따라 움직이는 작은 점들이었습니다.
이렇게 갈라지고 저렇게 갈라진 길들은 아주 복잡하게 얽히고 설켜 있었는데, 그 모든 길들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 한 곳에서 만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이라고 생각되는 아주 작은 점들이 길 위에서 옴지락거리며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창가에 앉아서 졸았던 것 같지는 않고 지금도 그 순간이 또렷하게 생각이 나는데, 아주 짧은 시간이 지난 것 같습니다.
어느 선배님은 저의 그런 경험을 유체이탈(OBEs :Out of body experiences)이라는 그럴듯한 용어로 표현해주시기도 하셨습니다.
어쨌든 왜 그때 그런 장면을 보게 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자신이 선택한 길들을 가게 되는데 결국은 한 곳에서 만나지 않던가? 그리고 수없이 많은 길들이 있는데 내 앞의 사람이 간 길이라고 해서 내가 반드시 그 길을 가야 하는 것은 아니지.’
그리고 나서 첫째 아이의 홈스쿨링을 마음의 갈등 없이 결정하게 되었습니다.

나중에 남편이 사역하던 목회지가 옮겨지면서 공동육아에 참여할 수 없게 되었고, 첫째 아이는 10 살에 초등학교 1학년에 입학하게 되었습니다.
뒤늦게 들어간 초등학교 생활을 저희 아이는 훌륭하게 해냈습니다.
지금은 아이 나이에 맞게 고등학교를 다니고 있구요.


이제 새로운 모험의 길을 떠나야 하는 아니, 벌써 그 길에 들어서 있으면서, 오래 전 유체이탈의 경험이 생각났습니다.
그때는 의식의 수준에서 새로운 모험을 결심했다면, 지금은 감히 영적인 수준으로 통찰하고 싶습니다.
사람의 생각과 하나님의 뜻 사이의 경계에서 어정쩡하게 서성거리는 것이 아니라, 나의 생각을 내려놓고 온전히 하나님의 이끄심을 기대하는 것입니다.

그래도 떠나야 하는 길에 대한 두려움이 다시 찾아올 때면, 10년 전, 20년 전, 40년 전부터 지금까지도 한결같이 제 인생 가운데 펼쳐지는 온갖 모험을 지휘하셔서 감사할 수 밖에 없는 꼬~옥 알맞는 삶을 허락하시는 하나님을 기억하며, 그 믿음 가지고 나아가렵니다.
이 믿음 지킬 수 있게 기도를 부탁 드립니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 길은 다시 시작되고"- 백창우

이렇게 아무런 꿈도 없이 살아 갈 수는 없지
가문 가슴에, 어둡고 막막한 가슴에
푸른 하늘 열릴 날이 있을 거야
고운 아침 맞을 날이 있을 거야
길이 없다고, 길이 보이지 않는다고
그대, 그 자리에 머물지 말렴
길이 끝나는 곳에서 길은 다시 시작되고
그 길 위로 희망의 별 오를 테니

길을 가는 사람만이 볼 수 있지
길을 가는 사람만이 닿을 수 있지
걸어가렴, 어느 날 그대 마음에 난 길 위로
그대 꿈꾸던 세상의 음악 울릴 테니
지금까지 걸어온 길과 이제부터 걸어갈 길 사이에
겨울나무처럼 그대는 고단하게 서 있지만
길은 끝나지 않았어, 끝이라고 생각될 때
그 때가 바로, 다시 시작해야 할 때인 걸.

“내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기다려라. 내 희망은 그에게서 온다. / 하나님만이 나의 반석, 나의 구원, 나의 요새시니, 나는 흔들리지 않는다.”(시편62편5-6, 표준새번역)

댓글 5개:

  1. 요한이나 바울 같은 믿음의 선배들이 경험했던 귀한 일을 경험하셨군요. 늘 감사하는 생활이 이어지실 수 있도록 기도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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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제 경험을 믿음의 대선배들의 것에 비추어 보아주시고, 또 함께 기도해주시니 마음 깊이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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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내일 일은 난 몰라요 장래 일도 몰라요 험한 이 길 가고 가도 끝은 없고 험해요 이것은 하나님을 믿는 이들에게 국한 된 것은 아닌 듯해요. 모든 이 지구상에 존재하는 사람들이 다 똑같지 않을까요? 하나님께 항상 의지할 수 밖에 없는 연약한 존재이지만 또 하나님이 함께 계심으로 인해 강해질 수 밖에 없는 우리들이 아닐까 싶어요. 하나님이 너무도 사랑하는 언니와 목사님 산과 윤이! 사랑하고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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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내일 일은 난 몰라요 장래 일도 몰라요 험한 이 길 가고 가도 끝은 없고 험해요
    그러나 항상 그 길에 동행하고 계시며 나의 고백을 듣고자 기다리고 계시는 분. 나의 약함을 앎과 동시에 강함도 아시는 분. 그래서 나를 빛나는 당신의 보석으로 가꾸고 계시는 분. 그분이 언니와 목사님 산과 윤을 그렇게 소중하게 다듬어 가시느라 함께 애쓰고 계시리라 믿어요.
    언니! 목사님! 산아! 윤아!
    싸랑하고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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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정오기의 댓글들(!)을 보고 우리 가족을 향한 많은 관심과 기도의 흔적을 느낄 수 있었어.
    무늬만 믿음이 아니라 속 알맹이가 온통 믿음인 삶을 살아야 할텐데...
    의지와 열정을 다하여 살아보련다.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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