융통성 없는 정직

<친구들과 학교 뜰에서>

고등학교 때의 일입니다.
제가 다니던 고등학교는 그 당시 70여 년의 역사가 있는 학교였는데, 전통이 오래된 만큼 학교 본관 건물도 많이 낡아 있었습니다.
교실과 복도 바닥은 나무 마루로 되어 있었고, 나무 바닥을 보호하기 위하여 왁스로 걸레질을 해야 했습니다.
청소는 분단별로 나누어 했었는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며칠 동안 모두가 청소를 했고 선생님은 꼼꼼하게 검사를 했습니다.

어느 날, 담임 선생님은 청소 시간에 바닥 닦을 손걸레를 개인적으로 마련해오라고 하셨습니다.
그 다음 날 학교에 가서 청소 시간이 되어 보니, 어떤 친구는 헝겊으로 만든 걸레를 가져 왔고 어떤 친구는 문방구에서 파는 스폰지를 꺼내는 것이었습니다.
아차!
깜빡 잊고 걸레를 가져오지 않은 것입니다.
문방구에서 파는 스폰지를 살 돈도 없었던 것 같고, 무엇보다도 교문 밖을 나갈 수 있는 시간이 아니었던 것 같았습니다.
어쨌든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청소 시간 처음부터 끝까지 열심히 쓸고 나르고 했습니다.
수업 시간에는 딴 생각을 할망정 청소 시간에 딴청 부리는 것은, 제겐 자연스럽지 않았다고나 할까요.--;

이제 왁스로 나무 바닥을 닦을 시간이 되었습니다.
잠시 나는 어떻게 해야 되나 하고 있는데, “야, 담임 온다!” 하는 외침이 들렸습니다.
군데 군데 모여서 수다 떨던 아이들이 모두 바닥에 웅크리고 앉았습니다.
그 중에 걸레를 준비하지 못한 아이들은 옆 친구가 가져온 스폰지를 반으로 잘라내느라 정신이 없습니다.
우리 교실은 교무실 옆에 옆에 있었기에 선생님이 곧 나타났습니다.
교실 앞 복도에 서있던 저는 이 짧은 시간 동안 저는 어떻게 할 지를 결정해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그냥 가만히 있기로 했습니다.
나름대로의 이유는 이렇습니다.
걸레를 가져오지 않고 가져온 것처럼 하는 것은 자신과 선생님을 속이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청소 시간에 한눈 팔아본 적이 없으니, 걸레 한번 안 가져온 실수는 선생님이 어여삐 봐주시지 않을까 하는, 되지도 않는 기대를 가지고 말입니다.

선생님은 모두 쥐 죽은듯 조용히 바닥을 닦고 있는데 손을 놀리지 않고 가만히 앉아있던 제가 눈에 금방 띄었나 봅니다.
“야, 너 뭐해. 일어나! 이리 와.”
그 선생(이 부분에서는 “님”을 생략하렵니다)은 손으로 제 머리를 쿡쿡 쥐어박으며 어쩌구 저쩌구 했습니다.
복도 한가운데 여러 친구들이 보는 앞에서 별것도 아닌 것을 가지고 야단을 맞았습니다.
그러나 이건 제 생각일 뿐, 선생님 편에서는 그럴 만도 합니다.
가져오라는 걸레는 가져 오지도 않고, 다들 열심히 바닥을 닦는데 뭐 잘한 것이 있다고 가만히 있냔 말이죠.
얼마나 뻔뻔해 보였겠어요.

정말, 융통성, 순발력, 눈치 같은 것들은 엿장수에게 주고 엿하고 바꿔 먹은 게 분명합니다.
아니, 저에게 융통성 같은 것들이 발견된다면 그것은 아마 후천적으로 개발된 것이지, 타고난 DNA 어느 구석에도 없는 것이 분명합니다.
말하고 보니, 이런 부분에 있어서 저와 비슷한 강산이가 제 아들인 것이 분명합니다.
“미안, 강산.”

고등학교 청소 시간 그때로 지금의 제가 돌아간다면 다른 선택을 할 수 있을까요.
걸레 가져오라는 지시를 적은 종이 쪽지를 방 여기저기에 붙여놓고 잊어버리지 않으려고 했을까요.
스폰지 걸레를 가져온 친구의 스폰지를 반의 반이라도 잘라내 청소하는 척 했을까요.
아니면 교무실에서 걸어 나오는 선생님에게 달려가 팔짱이라도 끼면서(여선생님이셨으니까) “선생님, 깜박 잊고 걸레를 안 가져왔거든요. 쫌만 봐주시면 안 될까요?” 하면서 애교를 떨었을까요.
그도 아니면 양말이라도 벗어서 걸레를 만들어 나무 바닥을 닦고 앉아 있었을까요.

80년대 초 경직된 분위기의 고등학교 청소 시간에 융통성 없는 정직함을 선택해서 부끄러움을 당한 제 자신이 그다지 싫지 않다고 여기는, 이처럼 아직도 지혜가 부족하며 융통성도 없는 이런 사람을 자녀로 삼아주시고 한없는 사랑으로 품어주시는 분이 계셔서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습니다.

“주는 나의 도움이 되셨음이라 내가 주의 날개 그늘에서 즐거이 부르리이다 / 나의 영혼이 주를 가까이 따르니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거니와”(시편63: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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