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6/2009

마음의 쿠션

<강산이 옆에 쪼끔 보이는 것이 선물로 받은 쿠션이야요^^>

결혼 선물로 아주 큰 쿠션을 선물로 받은 적이 있습니다.
대학 친구들이 마음을 모아 특별히 주문 제작한 것이었습니다.
한 사람이 올라가 앉을 수 있는, 때로는 몸을 움츠리면 잠을 잘 수 있을 정도의 넓고 푹신한 깔개 쿠션과 그 크기에 맞게 기댈 수 있는 등받이 쿠션이 한 세트였습니다.
잠깐 낮잠을 청할 때 가볍게 기대어 눈을 붙일 수도 있고, 아이들이 저 혼자 앉지 못하던 아기였을 때 거기에 앉혀놓으면 어느 쪽으로 쓰러져도 다칠 걱정 없는 여러 모로 쓸모 있는 쿠션이었습니다.

뜬금없이 그때 그 쿠션을 떠올리게 된 것은 이번 달 밀알 사역자 모임에서 <쿠션Cushion>(조신영, 비전과 리더십)이라는 책을 읽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자극과 반응 사이에는 공간이 있다는 어느 심리학자의 얘기를 인상 깊게 들은 적이 있었는데, <쿠션>이나 <쿠션>을 읽기 바로 전에 읽은 공지영 작가의 <즐거운 나의 집>에서도 보게 되었습니다.
“자극과 반응 사이에는 공간이 있다. 그 공간에는 반응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와 힘이 있다. 우리의 성장과 행복은 그 반응에 달려 있다.”(즐거운 나의 집, 179쪽)
여러 자극에 대한 반응들을 돌아볼 필요가 있어서 그 책들이 저에게 왔는지 모르겠습니다.

밀알 사역자 모임에 제출했던 독후감(?)을 그대로 옮겨보겠습니다.

***어느 심리학자가 얘기한 자극과 반응 사이의 공간을 소재로, 스토리텔링(storytelling)으로 전개되고 있는 이 책은 마치 추리소설을 읽는 느낌이었습니다. 유산 상속을 놓고 문제를 풀어가는 과정을 통해 주인공과 동화되어 이 책에서 말하려고 하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그 결론은 바로 자극이 주어지면 반응을 하게 되는데 그 사이에는 반응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가 있다는 전제에서 출발하게 됩니다. 자극에 대해서 즉각적인 반응이 아니라 올바른 반응을 선택하는 것이 이 세상을 책임 있고 성숙하게 살아가는 모습(Responsibility)이고 이것이 참된 자유(Liberty)를 누리게 하는 본질입니다.

내면의 힘
자극이 오면 반응을 하기 위한 작용이 이루어지는데, 그곳에서는 과거의 상처나 분노의 뿌리들이 있어서 올바른 반응을 방해하게 됩니다. 하지만 독서, 기도, 묵상을 통하여 내면의 힘을 기르게 되면 고도의 주도성을 갖게 됩니다. 이것을 저자는 “마음의 쿠션”이라고 말합니다. 또한 이 마음의 쿠션은 온유함에서 비롯된 긍정을 선택하는 반응 능력이라고 하며 진정한 자유라고 말합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마11:28-30)

고결한 언어
저자는 사고계-언어계-물질계의 선순환구조를 설명하면서 독서, 기도, 묵상을 통해 사고계가 가다듬어지면 마음의 쿠션이 자라 고결한 언어계를 갖게 된다고 합니다. 언어는 창조력, 각인력, 견인력이 있어서 믿음으로 내어놓은 긍정의 말들은 물질계에서 반드시 싹이 트고 열매를 맺게 됩니다. 여기까지 읽었을 때는 독서, 기도, 묵상이라는 방법이 너무 일반적이어서 그렇다면 나는 무엇을 읽고 묵상할 것인가,에 생각이 이르렀을 때, 저자는 슬쩍 고결한 언어로써 “하나님의 말씀”을 제시하는 것을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덧붙여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내면화시키기 위한 묵상을 제안합니다. “복있는 사람은…..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시편1:2)

성실하게 마음의 쿠션 만들기
온갖 반응이 주어질 때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쿠션에 깊이 기대었다가 주도적으로 올바른 반응을 선택하여 의식과 언어와 행동으로 표현될 수 있다면 참 멋있는 삶이 될 것 같습니다. 태초부터 있었던 말씀은 잠언을 통하여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만일 나의 말을 받으면….네 귀를 기울이면…..지식을 불러 구하며 명철을 얻으려고 소리를 높이면….” 신비한 마음의 쿠션을 최신 버전으로 업그레이드할 수 있는 지혜를 얻을 수 있다고 말입니다. ***

언젠가 텔레비전에서 초등학교 학생들의 일기쓰기 지도를 독특하게 하여 학급 분위기를 좋게 했던 선생님의 교육 방법이 소개된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들은 “경계”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어떤 행동이나 감정이 부정적으로 표현되려고 할 때 얼른 경계를 떠올리고 어떻게 반응을 했는지 일기로 써본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아마 자극과 반응이 맞닿아 있는 자리, 즉 경계(境界)를 객관적으로 보게 하는 훈련인가보다 했습니다.
방송이 진행되는 가운데 그 선생님은 원불교에서 배운 것을 아이들에게 적용한 것이라고 소개했던 것 같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원불교에서 사용하는 경계(警戒)는 잘못된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미리 마음을 가다듬어 조심한다는 뜻이었습니다.

경계(警戒)나 <쿠션>에서나 자극에 대한 올바른 반응을 하려는 것일 텐데, 경계(警戒)는 자극에 대한 소극적인 반응이라면 <쿠션>에서 얘기하는 것은 자극에 대해 주체적이고 적극적인 반응을 말하는 것 같습니다.
끊임 없는 자기 훈련이 필요한 두 가지 반응 가운데 어느 것을 사용할 지 선택해야 할 순간입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시1:1-3)

6/19/2009

완벽하기 보다는 진솔하게


20여년 전 신학생 때 인천 어느 교회에서 봉사하던 때였습니다.
청년부 형님들이 한 달에 한번씩 봉사하러 가는 곳이 있는데 저보고 찬양과 율동을 인도해 달라고 했습니다.
지금은 율동을 하려면 마음처럼 잘 되지 않지만 그때는 한참 젊을 때라 봐줄만했는지 부탁을 받았고, 저는 또 부탁해준 것이 고마워서 그러마 했습니다.
그런데 찬양하고 율동하는 것은 괜찮은데 봉사하러 가는 곳은 장애우들이 있는 곳이었습니다.
장애우에 대한 아무런 생각도 관심도 없던 터라 알 수 없는 부담감이 조금 있었지만, 내가 맡은 것만 하면 되겠지, 했습니다.

주일 예배를 마치고 찾아간 곳은 특수학교였는데 교실 하나에 꽤 많은 장애우들이 모여있었습니다.
물리치료 기구들이 있는 교실이었는데, 많이 낯설었지만 찬양을 시작했습니다.
찬양을 인도하면서 그들의 모습을 보니, 찬양도 많이 알고 있고 정말 기쁘고 즐거운 모습으로 찬양하고 있는 그들의 모습이 신기해 보였습니다.
여기까지는 그런대로 잘 지나갔는데 문제는 그 다음이었습니다.
찬양이 끝나고 다음 순서가 진행되는 동안 장애우들과 섞여 앉아 있는데, 저는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그들 앞에 조금 서있었다고 서로 제 옆에 와서 앉으려고 하고 저를 만지려고 하는데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당황스러웠습니다.

장애우에 대해 관심은 그만두고, 왜 그들이 그곳에 주일 오후에 모여 있었는지, 20명쯤 이었는지, 30명쯤 이었는지, 찬양 인도를 더 부탁 받았었는지 지금도 기억이 나질 않습니다.
분명한 것은 그 뒤로 그곳에 다시 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런 제가 결혼을 했고, 찬양을 엄청 좋아해서 가사와 율동을 아주 많이 외우고 있고,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만지려고 하고 껴안기를 잘 하는, 다운증후군을 갖고 있는 아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장애우 선교단체인 밀알에서 일을 하고 있고요.

이렇게 자세하게는 아니고 부끄럽지만 교사준비모임 때 이 이야기를 대부분 고등학생이거나 대학에 갓 들어간 자원봉사자들에게 해주었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참 좋은 선택을 했습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뭐 딱히 왜 좋은 선택인가를 설명하지 않았지만 이미 밀알에서 봉사하겠다고 찾아온 이들인지라 이심전심(以心傳心)으로 통하는 것 같았습니다.
아마 이런 말을 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나누는 사랑만큼이나 많은 것을 배우고 얻고 갈 수 있을 것이라고요.

밀알 여름학교 3주 동안 자원봉사자들을 보면서 참 은혜(!)를 많이 받았습니다.
미국에서 대학 가려면 봉사한 기록이 크레딧(credit)이 된다고 하는데, 이것과는 상관없이 그들의 따뜻하고 살가운 배려들을 엿볼 때마다 아직 어린 저들의 마음 어디에서 저런 사랑이 흘러나올까 자못 놀랍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하고 그랬습니다.
안아주는 것을 좋아하는 아이를 하루 종일 안아주고, 바닥에 누워있기를 좋아하는 아이를 위해서는 다른 아이들에게 밟힐까봐 자기가 막아서 앉아 있어주고, 축구를 하면서도 우리 아이들에게 공을 한번 더 차게 해주려고 자연스럽게 공을 밀어주고, 밖에 나가고 싶어하는 아이를 위해서는 휠체어를 밀어서 돌아다니게 해주고, 음식을 잘게 잘라 먹여주고 닦아주고, 고집부리면 기다려 주고…

그리고 무엇보다 3주 동안 거의 빠지지 않고 나와서 자기 맡은 일을 했던 봉사자들과 해마다 정성스런 점심을 제공한 교회와 교우들에게는 고마운 마음도 보태어 감동입니다.
첫 목회를 했던 강화에서 목회자 부인들이 노인들과 장애인들이 살고 있는 시설에 빨래를 해준 적이 있습니다.
무엇을 도와드리면 좋겠는지 시설 관계자에게 물으니, 물도 잘 나오지 않고 세탁기도 작은 것 밖에 없어서 이불 빨래를 자주 못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이불을 빨아주겠다고 했더니 그 관계자가 덧붙이는 말이 있었습니다.
“우리에게는 정기적으로 꾸준히 도와주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번 여름학교를 하면서 그때 들었던 그 말이 어떤 의미였는지 어렴풋이 느껴보았습니다.

오늘 밀알에서 3주 동안 있었던 여름학교를 마쳤습니다.
밀알을 진하게 경험할 수 있는 귀한 시간이었습니다.
밀알 학생과 그 가족들과는 조금 더 가까워지고 좀 더 깊이 아는 기회가 되었고, 자원봉사자들의 섬김이 얼마나 귀하고 고마운지 다시 깨닫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그 짧은 시간 동안 밀알에 대해 다 알았다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오늘 찍은 사진도 정리하고, 여름학교를 마친 느낌을 글로 적어볼 자원봉사자도 연락하고, 주변 정리도 하려고 했는데 그렇지 못했습니다.
장애우와 가족, 봉사자들의 사랑이 더 넘쳐나서 세상을 밝히는 빛이 되는 밀알이기 위해 저 또한 태워지고 썩어지는 밀알이 되어야 할 텐데 아직 길이 먼 것 같습니다.
제 자신이 한참이나 모자란 사람인줄 알기에 완벽한 것 보다는 진솔(眞率)한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이것도 말처럼 쉽지 않은 줄 알지만 그런 바람을 가지고 살으렵니다.
그렇게 애쓰며 살다 보면 지금 보다는 좀 더 진실하고 솔직한 사람이 되지 않을까 싶어서요.*^^*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 / 이같이 너의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태복음5:14-16)

6/13/2009

신나는 삶


할 말이 엄청 많은 한 주가 지나갔습니다.
그래서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될지 모를 정도입니다.

자서전은 보통 나이가 지긋하게 들어 자신의 삶을 조용하게 관조할 수 있을 때 쓰는 이유를 요즘 자주 느낍니다.
이리 쿵 저리 쿵 부딪치면서 삶을 만들어 가는 시기에 이것이 내 삶이다, 라고 말하기에는 한계나 헛점이 너무 많은 것 같습니다.

다만 제가 믿는 것은 주저주저 하며 선뜻 한 걸음 내딛지 못하는 모자란 구석이 있어도, 부족한 것 투성이일 지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사랑스럽고 존귀한 자라는 사실입니다.
호호호.

한참 잊고 지냈던 팝송 가운데 사이먼과 가펑클이 불렀던 Like A Bridge Over Troubled Water가 자꾸 흥얼거려집니다.
.......

sail on, silver girl, sail on by
Your time has come to shine
All your dreams are on their way
See how they shine

Oh if you need a friend
I'll sailing right behind
Like a bridge over troubled water
I will ease your mind

사는 것이 재미있습니다.
새로운 경험들이 흥미진진 합니다.
세상 속에서 어우러져 살아가는 맛이 이런 거구나, 이제 알아갑니다.
신나는 삶을 살아가려 합니다.
주님 안에서.

“여호와여 주께서 하신 일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주께서 지혜로 그들을 다 지으셨으니 주께서 지으신 것들이 땅에 가득하니이다”(시편104:24)

6/05/2009

거꾸로 붙인 그림


뭐 하느라 손톱이 이리 길도록 놔 두었는지….
노트북 키보드를 두드리다가 긴 손톱 끝으로 톡톡 대는 느낌이 별로이고, 흐릿한 머릿속도 정리하려면 먼저 손톱, 발톱을 깍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밀알여름학교가 이번 월요일에 시작되었습니다.
장애 학생들과 자원봉사자들이 만들어내는 여름학교입니다.

지난 토요일 자원봉사자들이 모여서 여름학교 준비기도모임을 하고 난 다음 교실에 이런저런 그림들을 붙이며 예배실? 큰 교실?-저는 아직도 그 곳을 뭐라고 부르는지 모르고 있네요-을 꾸몄습니다.
얼마가 지나고 있는데 같이 일하는 간사님이 큰일 났다며 저를 끌고 갑니다.
“저것 보세요. 어떻게 해요. 어떻게.”
뭘 보라는 것인지 뭐가 잘못되었다는 것인지 눈에 띄지 않습니다.
“뭐가요?”
“저거요. 저 그림.”
간사님은 길게 붙여 놓은 그림이라고 가르쳐주는데도 잘 모르겠습니다.
“이것 보세요. 아래, 위가 바꿨잖아요.”
그렇게 까지 설명을 해주니 그 그림을 거꾸로 붙여놓은 것이 보였습니다.
“그러네.”

자원봉사자들이 열심히 양면 테이프로 철썩 붙여놓은 것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 하며 몇 초가 흐르고 있는데 한 분이 거드십니다.
“그냥 두죠, 뭐. 그것도 나쁘지 않은데. 아래에서 바라보면 그렇게 보이지 않겠어요.”
그 말도 맞는 것 같고, 누군가 그 그림이 거꾸로 붙여진 것이라는 걸 발견하면 재미도 있을 것 같고, 거꾸로 붙여진 것을 저같이 모르고 지나갈 수도 있겠고, 무엇보다 그림을 떼어서 다시 붙이는 수고를 자원봉사자들에게 부탁할 염치가 없어서 그냥 두었습니다.

그러면서 많이 너그러워진 제 자신을 봅니다.
청년 시절 같았으면 아마 그 그림을 볼 때마다 마음이 편치 않았을 겁니다.
사람들과 충돌하는 것이 싫어서 그림을 그냥 그대로 두었을지는 몰라도 그 그림의 위와 아래가 반드시 상식적으로(?) 맞게 걸려야 한다고 생각했을 겁니다.
아무리 시간이 걸리고 돌아가야 해도 횡단보도가 아닌 곳으로 절대(?) 길을 건너지 않으며, 두꺼운 영어 사전에서 한 번 찾은 단어에는 같은 색의 형광펜으로 표시를 해두어야 하고, 책에 줄을 그어야 할 때는 자를 대고 반듯하게 그어야 하고 그랬습니다.
누구의 말처럼 이거 자폐 성향 같습니다.*^^*

대학 시절 항상 붙어다니던 단짝 친구는 그런 제가 답답하게 여겨지기도 했을 텐데 오랜 시간 저를 받아준걸 지금도 고맙게 생각합니다.
예술적인 성향이 많은 그 친구는 수줍은 듯 하면서도 자신을 연극이나 그림으로 표현하는 자유로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다른 기질을 갖고 있는 그 친구와 제가 오래 사귈 수 있었던 것은 서로에게서 어떤 영향을 주고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보고 싶다, 희야!


자, 이제 여름학교가 시작되고 놀이시간에 줄넘기를 하게 되었습니다.
굵고 긴 줄을 두 사람이 붙잡고 돌려주면 한 사람씩 혹은 여러 사람이 줄을 넘으면 됩니다.
뭘 하다가 들어가보니 고등학교 자원봉사자가 사뿐사뿐 줄을 넘고 있습니다.
저도 한번 뛰어보고 싶은 마음에 돌아가는 줄에 걸리지 않고 어렵게 줄 안으로 들어갔는데 두 번을 넘고는 제 발에 줄이 걸렸습니다.
어색하게 웃으며 학생들 옆에 가서 앉는데 무릎이 시큰합니다.
이런 이런 --;

학생들 한 사람 한 사람 이름을 부르면 나와서 줄을 넘어봅니다.
뛰어 넘는 모습이 저마다 다릅니다.
한 발을 들었다 놓으며 다른 한발을 살짝 들어 줄을 넘는 이도 있고, 텔레비전 광고에 나오는 것처럼 높이 뛰어 다리를 앞뒤로 엇갈려 벌리며 뛰는데도 줄에 걸리지 않고 잘 넘는 친구도 있고, 줄을 돌려도 꿈쩍도 하지 않다가 줄이 자기 발 아래에 턱 놓이면 그때서야 홀짝 넘는 아이도 있습니다.
어찌 그 모습들이 자기 멋대로인지 한참 웃었습니다.

줄넘기는 두 발을 모두어 뛰어야 잘 넘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습니다.
줄넘기에 대한 고정관념을 한 부분 깨는 시간이었습니다.

거꾸로 붙여진 그림이나 줄이 발 아래 멈추었을 때 넘는 줄넘기나 다 괜찮습니다.
사람이나 그 관계를 해(害)하는 것이 아니라면 틀린 것도 아니고 나쁜 것도 아닙니다.
-이거 맞는 말인가요???
자기가 경험한 것이나 그래서 굳어진 자신의 삶의 방식만 맞는다고 고집하지 않는다면 세상살이가 훨씬 부드럽고 넉넉해지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서로에게 배우고 사랑 나누며 산다면 꽤 풍성한 삶이 될 것입니다.

“아, 하나님, 내 속에 깨끗한 마음을 새로 지어 주시고 내 안에 정직한 새 영을 넣어 주십시오.”(시51:10, 표준새번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