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3/2009

머리 하는 날


“보자기 하나 있으면 줘 봐.”
“뭐 하시게요?”
“머리 염색 좀 하려고 그래.
응, 그런데 네가 한번이라도 더 염색하려면 그거 그냥 놔두고 집에 가서 하려고.”

어머님은 이곳에 계시다가 한국으로 돌아가실 때쯤 흰머리 염색하시려고 염색약을 하나 사오셨나 봅니다.
언젠가부터 제 머리에도 새치가 제법 많아져서 가끔 염색을 해주곤 합니다.
한국에서도 머리카락 전체를 염색해야 할 때면 엄마가 해주곤 하셨기 때문에 이번에 우리 집에 오시면서 저 쓰라고 염색약 여러 개를 사오셨습니다.
어머님은 그걸 보시고는, 자신이 쓰시려고 사온 것도 저한테 보태어 주려고 그러시는 것 같습니다.

“어머님, 괜찮아요.
어머님 염색 하세요.
저는 여기서 사서 쓰면 돼요.”
이렇게 말씀드려도 제가 쓰겠다고 하면 자신이 염색하는 것을 그만두실 것처럼 머뭇거리셨습니다.
어머님은 저한테서 “괜찮다”는 말을 두어 번 더 들으시고는 아버님을 부르셨습니다.
아버님 머리를 먼저 깎아 드리려고 그러시나 봅니다.

어머님은 그럴싸한 자세로 얼마 남지 않은 아버님 머리를 다듬어가기 시작하셨습니다.
“어머, 잘 깎으시네요.
늘 이렇게 깎아드리세요?”
엄마는 재미있게 바라보며 물어보십니다.
“네, 동네 할머니들도 다 이 사람이 깎아줘요.”
아버님은 자랑스럽게 한 마디 거드십니다.
“어이 저리 가 계세요.”
어머님은 엄마가 바라보고 있는 것이 부담스러우신가 봅니다.
엄마는 호호호 웃으시며 한쪽으로 물러나십니다.

“예배 시간에 뒤에 앉은 사람이 머리가 지저분하다고.... 하얗다고...” 하시는 걸 들어보면, 머리를 단장하시는 것이 한국으로 돌아가실 준비라기보다는 이곳에서의 마지막 주일 예배에 예쁘게 하고 가시려는 마음인 것 같습니다.

오늘 저도 미용실에 다녀왔습니다.
두 분 어머님들은 제 머리가 긴 것이 자꾸 거슬리시나 봅니다.
“너는 요렇게 짧게 한 것이 애잔해 보여.”
어머님은 얼마큼 짧아야 되는지 제 머리카락 길이를 재어 보이시며 몇 번 말씀하십니다.
엄마는 오신지 며칠 지나지 않아 제 머리를 꼼꼼하게 염색해 주시며 한 말씀 하십니다.
“사람이 가꾸고 살아야지. 좀 길지 않냐?”

머리를 좀 자르라는 소리를 이래저래 듣게 되기도 하고 어머니들에게 예쁘다는 소리도 듣고 싶어서 머리를 손질했습니다.
머리를 산뜻하게 자르고 퍼머도 하고 미용실을 나와서 집으로 돌아오는데 길가에 벚꽃 꽃망울이 분홍빛을 또렷이 드러내고 있는 나무들과 하얀 목련이 하루 이틀 사이에 곧 터져 나올 것 같은 풍경들이 눈에 들어옵니다.
마치 몇 개월 동안 제 머리카락으로 가려져 보이지 않던 풍광들이 오늘에서야 보이는 것 같은 기분이었습니다.

“아버님, 저 머리 했어요. 어때요?”
“머리 잘랐구나. 좋다!”
1층에 계시던 엄마, “어머 훨씬 낫다. 얼마나 좋아!”
2층에 계시던 어머님, “이쁘다. 넌 이렇게 해야 어울려.”
ㅋ ㅋ ㅋ

‘가난한 아들이 어머니 생신 때 해 드릴 것이 없어 어머니 앞에서 춤을 추었다던 그 옛날 이야기가 가당치도 않게 왜 생각이 나는지...
따지고 보면 너는 니가 좋아서 해놓고...’
어쨌든 어머니들께 예쁘다는 소리 실컷 듣고, 저는 저대로 분위기를 바꿔보니 좋고 그렇습니다.


제가 머리 하고 온 것에 힘입으셨는지 어머님은 아버님 머리를 깔끔하게 깎아드리고 염색해 드리고 어머님도 염색을 하셨습니다.
저는 제 방에 들어와 있는 동안 한 통의 염색약으로 어머님은 엄마도 염색해 주시고, 또 남은 것으로 엄마는 아빠도 염색해 드렸답니다.
네 분 머리카락 색이 똑같아졌습니다.
흰머리는 어디로 사라지고 모두 젊어지셨습니다.

재미난 그 분들 모습을 담아놓으려고 다시 사진기를 들고 옵니다.
엄마는 어머님이 머리를 빗겨드리는 동안 우리 네 식구가 한국을 떠나고 나서 얼마나 마음이 쓰였는지 퍼머를 연거푸 두 번이나 했는데도 제대로 되지 않았다며 제가 옆에 있거나 말거나 눈물을 글썽이십니다.
“이 순간에 왠 눈물. 자, 찍을 거예요.”

남편 머리도 얼마 전에 교회 집사님이 다듬어 주신 것 같고, 강산이도 어제 밀알 미용 시간에 봉사해주시는 형제님이 언제나처럼 깎아주셨습니다.
강윤이는 머리를 길러보겠다고 합니다.

여덟 식구가 함께 지내는 며칠 남지 않은 날들 가운데 어제, 오늘 우리 가족 머리 하는 날이 지나갑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12:1)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