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1/2004 - 동행

얼마전 엄마와 피아노 독주회에 갔습니다.
엄마가 이사오시 전에 다니시던 교회에서 친하게 지내던 곽집사님의 따님이 숙명여대에서 독주회를 하게 되었는데 '꼭 가겠노라' 이사오기 전에 약속하셨다는 것입니다.

연주회 하는 날이 토요일 오후라 교회 청소와 주일 준비가 마음에 걸렸습니다.
또 한편으로는 새로 이사온 이곳의 모든 것이 낯설고, 다리도 불편한 엄마를 '혼자 다녀오시라' 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엄마를 모시고 다녀오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습니다.

사실 조금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피아노 독주회가 어떤 것인지 궁금하기도 했고, 숙대가 어떻게 생겼는지도 알고 싶었습니다.
그 궁금증이 내 삶에 큰 도움이 되는 것이 아닌줄 알지만 그저 알고싶고 보고싶은 호기심이 발동을 했습니다.

싱싱한 젊음이 넘쳐나던 20대 울적한 기분이 드는 날에는 혼자 이곳저곳 잘도 다녔습니다.
'버스 종점에 가면 무엇이 있을까'
인천에 살고 있었기에 7번(검단), 22번(신천리), 4번(박촌?) 버스를 타고 가서, 여전히 사람이 살고 있는 '그 곳'을 확인하고 돌아오곤 했습니다.
아마도 내가 사는 동네나 나와 생김새가 비슷한 사람들이 살고 있음을 보며 위로를 받았나 봅니다.

단순한 호기심을 빌미로 일상을 탈출해보려는 시도는 그만...
내가 본 그 대학은 커다랗게 지어진 현대식 건물만 웅장하게 보일뿐 운치라고는 찾기 힘들었습니다-그 모습이 다가 아닐지도 모릅니다.

게다가 피아노 연주가 시작되고 얼마 안있어 슬슬 잠이 몰려오기 시작하더니 끝날때까지 몽롱한 상태가 계속되었습니다.
선정된 곡의 작품해설을 열심히 들여다보며 들려오는 리듬이나 선율을 느껴보려고 처절하게 애를 썼으나 허사였습니다.
하이든 Sonata Hob.XVI:52 E Major, 처음 들어보는 벨라 바르톡 Suite Op.14, 브라암스 Sonata Op.5 F-Moll.
피아노 독주회를 할만큼 수준있는 곡들일텐데 듣는 제게는 너무 무거운 시간이었습니다.

연주가 끝나고 엄마에게 나는 무척 힘들었노라 했더니 엄마는 "독주회가 다 그렇지 뭐" 하십니다.
엄마의 음악 수준이 이렇게 높은줄 몰랐습니다.

연주자의 마지막 인사가 끝나자 엄마는 고향 사람들을 만난듯이 서로의 안부를 묻느라 정신이 없습니다.
관객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엄마가 다니시던 교회의 교인들이었습니다.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사이에 목사 사모인 딸을 자랑이라도 하듯이 나를 불러 인사를 시키기도 합니다.
그런 엄마 모습을 사진에 담기도 하며 옆에서 가만 지켜보자니 그 며칠 사이에 저 교인들 가운데 엄마의 자리가 사라졌다는 느낌이 문득 들었습니다.

주최측의 실수로 저녁도 못먹고 전철역으로 걸어오는데 엄마의 절룩거리는 걸음이 더욱 힘들어보였습니다.
10년 넘게 다닌 교회를 뒤로 하고 이제 새로운 신앙의 자리를 만들어가야 하는 엄마에게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계단을 오르고 내릴 때 내 손을 빌려드리는 것 밖에는 없었습니다.
엄마는 "야, 니가 있어서 다행이다. 여길 나 혼자 어떻게 왔다가니!" 하십니다.
아무 것도 아닌 나를 의지하는 엄마의 모습이 너무 쓸쓸해보였습니다.


기분이 영 가라앉기만 하는 것 같아 배가 별로 고프지도 않은데 도너츠 가게로 들어갔습니다.
엄마가 좋아하시는 쵸코렛이 많이 묻어있는 도너츠를 골랐습니다.
이런 음식점에는 세번째 오는 것이라며 엄마는 커피를 조심스럽게 마셨습니다.

그리고 전철역을 올라갔습니다.
전철이 플랫폼에 닿자 엄마는 날렵하게 노약자석에 자리를 잡고 앉습니다.
언제 내 다리가 아팠냐는듯이.무릎의 연골이 거의 없어지고 ㅇ자 모양처럼 휘어질대로 휘어진 다리에서 느껴지는 고통이 얼마나 될지 전철이 달리는 내내 헤아려 보았습니다.

하나 밖에 없는 엄마와 하나 밖에 없는 딸.서로를 애틋하게 여기며, 여인의 삶을 조금씩 알아가며 철들어가고 있는 딸이 곁에 있음을 축복으로 여기실 수 있도록 잘 살아봐야겠습니다.

"네 부모를 즐겁게 하며 너 낳은 어미를 기쁘게 하라"(잠2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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